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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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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구두쇠 노인으로부터 받은 빨간 세타

글 |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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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골드코스트에서 만났던 칠십대쯤의 노인이 있었다. 그는 오십대 부도가 나서 이민을 갔다고 했다. 그는 늦은 나이에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부터 시작했다. 얼마 후 작은 편의점을 차렸다. 구석에 작은 방을 만들어 거기서 밥을 해먹고 밤이면 침낭 속에 들어가 잤다. 들어오는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쌓인 돈은 어느새 스스로 눈 더미 같이 불어났다.
 
돈에 한이 서렸던 그는 해변가에 화려한 저택을 샀다. 집안에서 낚시는 물론이고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요트장까지 설치된 집이었다. 고급 승용차를 사서 주차장에 세워 놓았다. 망해서 도망쳐 왔던 그가 이제 다시 부자가 됐다는 알리는 상징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냥 편의점에 있는 어둠침침한 작은 방이 편했다.
 
어느 날 기침을 하는데 핏덩어리가 섞여 나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았다. 폐암이었다. 죽음의 사자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가자고 손짓을 하는 것이다. 그는 남은 시간 뭘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자기가 사서 빈집으로 놔둔 해변가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생전처음 널찍하고 깨끗한 방에서 바다를 내다보며 잤다.
 
그 다음은 고급물품을 파는 백화점으로 갔다. 그동안 한국에서 수출한 싸구려 청바지와 티셔츠만 입고 살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돈을 써보지 못했다. 그는 신사용 고급 정장을 사서 입어 보았다. 그는 생일 케익도 잘라보고 싶었다. 그런데 함께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살아왔다. 급하다고 돈을 꾸어달라고 손들을 벌려도 절대 돈은 꾸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얼음 같이 찬 인간이라고 욕을 했다. 그는 이따금씩 가게에 찾아와 부서진 진열장을 고쳐주는 베트남인을 불러 생일을 자축했다. 사실 그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었다. 이민을 와서 도중에 만났던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정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돈만 챙기려고 거짓말을 하다가 가 버렸다.
 
아이도 없었다. 그는 곰곰이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그의 편의점 단골인 열 살쯤 아래의 여인이 있었다.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그가 바쁠 때면 보고 있다가 대신 주문도 받아주었다. 그가 구석방에서 혼자 사는 걸 보고 설거지를 해 주고 간 적도 있었다. 그 여인이 기억의 벌판 저쪽에서 그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다.
 
그는 교민들에게 수소문해서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나이먹은 그녀를 자식들이 양노원으로 보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양복을 차려입고 그 양노원을 찾아갔다. 치매증상이 있다고 하는데도 그녀는 그를 알아 보았다. 그녀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감사하다고 했다. 그의 삶에 활기가 돌았다. 그는 매주 꽃과 케이크를 사들고 양노원을 찾아갔다. 죽음의 날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저택과 편의점을 팔았다. 그리고 그 돈을 그녀가 있는 양노원에 기부했다. 그리고 그도 그 양노원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는 얼마간 남긴 돈을 주변의 혼자 늙어가는 노인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평생 겨울들판에 서 있는 것처럼 춥고 외로웠다. 그는 평생 소중하게 보관했던 어머니의 백금반지를 꺼내 보았다. 가난 속에서도 팔지 않고 간직했다가 부도가 나서 도망가려는 아들에게 준 반지였다. 혼자였던 그에게 의지가 되었던 반지였다. 그는 그 어머니의 반지마저 남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저 세상을 향해 걸어갔다.
 
호주의 골드코스트에서 우연히 칠십대의 한 남자를 만나 그의 신산스런 지난 삶의 얘기를 들었다. 그가 빨간 세타를 소포로 붙여주었다. 바람결에 그가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변 사람은 그가 얼음같이 차고 인색한 면을 얘기했다. 죽음이 다가오는 그의 마지막 장면에 나의 희망과 상상을 조금 덧붙여 보았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8-01 13:35   |  수정일 : 2017-08-0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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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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