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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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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에도시대 일본 이노의 <이노즈(伊能圖)>

시대를 앞선 지도의 걸작 일본의 이노즈(伊能圖)

⊙ 이노 다다타카, 50세에 사업에서 은퇴한 후 천문에 관심 갖다가 지도 제작 나서
⊙ 17년간 10차례에 걸쳐 일본 전역을 답사, 현대의 측정치와 오차가 1/1000에 불과
⊙ 메이지 시대에 과학적 사고, 근면, 끈기의 스토리로 초급학교 교과서에 수록,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하나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글 | 신상목 (주)기리야마 대표

▲ 〈대일본연해여지전도〉(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가 측량 여행에 나설 때 참배하던 도미오카하치만구(富岡八幡宮) 신사 경내에 있는 이노의 동상.
예로부터 지도는 권력의 상징, 부의 원천, 문명의 척도였다. 서구는 ‘cartographer(지도제작자)라는 단어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지도 제작에 의미를 부여한 문명이었다. 대항해시대 탐험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새로운 루트를 발견하고 그 정보를 그래픽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 또는 탐험의 시대(age of exploration)로 일컬어지는 15~17세기, 서구 문명의 지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나침반, 망원경, 육분의(六分儀 ; sextant)의 등장으로 관념과 추정을 배제한 실측에 의한 정교한 작도가 가능해졌고, 지동설에 기반한 지구(地球) 개념 확립으로 경도, 위도의 좌표(coordinates) 시스템과 삼차원 정보를 이차원 평면에 옮기는 투영법(投影法)이 발전하였다. 이는 지구의 지리공간 정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지도가 정교해질수록 서구 문명은 세계로 뻗어 나갔고, 세계로 뻗어 나갈수록 서구 문명의 지도는 더욱 정교해졌다. 근대 지도의 발전은 서구 문명의 전세계적 확산의 원동력인 동시에 결과물이다.
 
  지도는 천문, 지리를 포괄하는 과학적 사고의 집약체이다. 어떠한 나라의 각 시대별 지도를 살펴보면 그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지도는 단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19세기말에 근대 작도법이 아닌 자체 방식으로 상당한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럽 문명을 제외하면)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이 당시 세계적 수준에 비추어 보아 손색이 없었음을 시사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선에 〈대동여지도〉가 있다면, 에도시대의 일본에는 〈이노즈(伊能圖)〉가 있다. 〈이노즈〉란 에도 후기 측량가인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가 제작한 일본 최초의 실측 지도이다. 정식 명칭은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이다.
 
 
  은퇴 후 시작한 천문학 공부
 
  제작자인 이노는 본래 지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상인이었다. 1745년 출생 당시 본래 이름은 진보 산지로(神保三治郞)였다. 양친의 사망으로 17세 때인 1762년 작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이노(伊能) 집안에 서양자(壻養子)로 입적되어 이노라는 성을 얻는다. 이노는 영민하고 수완이 좋은 사업가였다. 망해 가는 조그만 양조장을 궤도에 올려놓고 땔감(장작) 도매상, 미곡 중개상 등 사업 영역을 확장하여 거부(巨富)를 쌓는다.
 
  이노는 50세가 되는 해에 장남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한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에도(江戶)로 거처를 옮긴다. 에도로 간 그는 당시 천문학의 1인자이자 천문방(天文方·막부의 공기관으로 천문 관측 및 역(曆) 제작을 담당)을 맡고 있던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의 문하생이 된다. 30대 초반의 다카하시는 50대 이노의 청을 듣고 노인의 도락(道樂)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입문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형설지공으로 천문학을 공부하는 이노에게 크게 감복한 다카하시는 이노를 ‘스이호센세이(推步先生·推步는 별의 움직임을 관측한다는 말)’라 부르며 연령을 초월한 돈독한 사제 관계를 맺는다. 천문학에 심취한 이노는 거액을 들여 관측 도구를 구입, 에도의 자택을 아예 천문관측소로 개조하였다. 그의 천문 관측은 취미 생활을 넘어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일본 최초로 금성이 일본의 자오선을 통과하는 것을 관측하여 기록하는 개가(凱歌)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천문방은 기존의 역(曆)을 개정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책임자인 다카하시는 새로운 역인 ‘간세이레키(寬政曆)’를 완성하였으나 스스로 불만이 있었다. 당시 지식으로는 지구의 크기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역을 계산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과학자들은 네덜란드로부터의 전래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으나 자오선(子午線 ; 북극과 남극을 지나는 가상의 선) 1도의 거리를 확정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보다 정확한 역 제작을 위해서는 지구의 크기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천문연구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다.
 
  이노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평소 측량이 제일 관심사이자 취미였던 이노는 거리를 알고 싶다면 측량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구상 두 지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북극성이 관찰되는 각도를 측정한다. 두 각도의 차를 비교하면 위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측정 지점 간의 거리를 정확히 알면 위도의 차이를 대입하여 지구의 외주(外周)를 계산할 수 있다.”
 
  이노의 발상에 당대의 최고 과학자 다카하시도 동의했다. 다만, 이 구상은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북극점 관측 지점 간 거리가 관측의 오차를 줄일 수 있도록 상당히 멀어야 하며, 또한 그 거리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리는 주어졌지만 실행이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끝나 버릴 탁상공론이지만, 이노는 생각이 달랐다. 측량 마니아 이노는 직접 에도에서 일본의 북쪽 끝단인 에조치(蝦夷地·홋카이도의 옛 명칭)까지 걸어서 그 거리를 실측하겠다고 결심한다. 이 결심이 인류 문명사에 남을 위대한 지도의 탄생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이노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17년에 걸친 10차례의 측량 여행
 
이노즈의 대지도 214장을 합친 모습. 이노즈 원본은 1873년 황거(皇居)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미국 의회도서관 등에서 발견된 사본이다.
  당시 홋카이도는 금단(禁斷)의 땅이었다. 막부의 허가 없이는 발을 들일 수 없다. 다카하시, 이노 사제(師弟)는 지도 제작을 명분으로 떠올린다. 18세기 말 이래 홋카이도 지역은 러시아의 접근으로 막부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홋카이도 동단에 위치한 네무로(根室)에 러시아 특사가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고, 북쪽 연안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무단 상륙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방의 관점에서 홋카이도 일대의 정확한 지도 제작 필요를 느끼던 막부는 다카하시와 이노에게 홋카이도 측량을 허락한다.
 
  1800년, 이노는 에도에서 홋카이도를 목표로 측량 여행에 나선다. 이노가 55세 되던 해였다. 총 9인으로 구성된 측량대가 4월 에도를 출발하였다. 5월에 홋카이도에 도착하여 8월까지 해안 일대의 측량을 마치고 10월 에도로 복귀하는 총 6개월의 여정이었다. 측량 기간 동안 낮에는 하루 평균 40km씩 이동하며 측량을 하고 밤에는 천문 관측 기록을 남기는 강행군이었다. 이노는 측량 여행 중 매일같이 일기 형식의 기록을 남겼다. 귀경 후 3주에 걸쳐 측량 데이터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 12월에 막부에 제출하였다.
 
  이노 지도의 정확성과 치밀함에 감탄한 막부는 이노의 공을 치하하고 동(東)일본 전체에 대한 지도 제작을 이노에게 의뢰한다. 지구의 크기 계산을 위해 나섰던 실측 여행이 이노도 알지 못하였던 천부적 지도 제작 능력을 끌어낸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노는 본격적인 전일본 해안선 측량 여행에 나선다. 1800년 제1차 측량부터 1816년 제10차 측량에 이르기까지 총 17년에 걸친 집념의 대여정이 계속되었다. 마지막 여행인 10차 실측에서 돌아왔을 때 이노의 나이는 고희(古稀)를 훌쩍 넘은 71세였다.
 
 
  봉인된 지도
 
에도 막부는 이노 다다타카의 업적을 기려 이노 부자(父子)를 칼을 차는 무사로 신분을 높여 주었다.
  1817년, 이노가 1차 측량에서 수집하지 못한 홋카이도 해안의 측량 데이터를 제자의 도움으로 마저 확보한 이노는 그동안 모은 데이터를 기초로 전일본지도 제작에 착수한다. 각 데이터에 기초하여 지역별 지도를 제작하고 이를 하나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노의 관심사는 일본열도의 해안선을 최대한 정확히 지면(紙面)에 표시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해안선은 정확한 일본의 모습과 크기의 구현을 의미한다. 이노는 이를 위해 곡면의 위치 정보를 평면으로 옮기는 오차 보정 계산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근대 유럽 지도의 투영법에 필적하는 발상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노는 일본 전도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18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나머지 작업은 이노와 함께 호흡을 맞추던 제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노 사거(死去) 3년 뒤 대망의 〈대일본연해여지전도〉가 완성되었다.
 
  1821년 7월 에도성에서 막부의 고위 관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도의 공개식이 거행되었다. 이노가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한발 한발 걸어 측량한 일본의 해안선이 살아 꿈틀거리듯 담긴 지도가 펼쳐지자 보는 이들은 눈을 의심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1/36000 축척 대지도 214장, 1/216000 축척 중지도 8장, 1/432000 소지도 3장으로 구성된 지도는 규모와 정확성에 있어서 당대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너무나 정확한 지도의 제작에 놀란 막부는 이노 지도를 막부의 공식 문서보관서인 모미지야마문고(紅葉山文庫)에 비장(秘藏)하고 외부 유출을 금지하였다. 지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막부로서는 이러한 상세한 지리 정보가 일반에 유통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이노의 지도는 서양 세력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이 거세지는 1860년대까지 막부 외의 일반 사용이 봉인되었다.
 
  지도의 공개 여부와 관계없이 막부는 이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합당한 대우를 하였다. 막부는 1차 에조치 측량 이듬해 이노 다다타카(忠敬), 가게타카(景敬) 두 부자(父子)에게 ‘묘지타이토’(苗字帶刀·무사계급 신분의 상징으로서 성(姓)을 사용하고 칼을 휴대할 수 있는 권리)를 허가, 신분 상승을 공인하였다. 이노가 측량 여행을 떠날 때마다 막부는 공무여행 통행증을 발급하고 소정의 여비를 지급하였다. 지도가 완성된 후에는 그 손자인 다다노리(忠誨)에게 봉록이 지급되고 에도에 사택이 제공되었다. 이노의 공적에 대해 막부는 대를 잇는 영예와 포상으로 보답하였다.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지도 제작
 
  이노 지도의 정확성은 놀랍다. 그 정확성에는 비결이 있다. 첫째, 이노의 천문학 지식이다. 이노 지도가 동시대 여타 동양 지도와 가장 비교되는 점은 정확성이 아니라 기저에 깔려 있는 지도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도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사방을 일정한 구획으로 나누어 지리 정보를 표시하는 방격법(方格法)에 기초하였다. 지리는 철학, 사상, 관념과 분리되지 못하였다. 근대 지도의 요체인 위경도(緯經度) 좌표 개념도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이노의 지도는 동양의 관념적 지도를 배제한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었다. 최초 측량 여행의 동기가 자오선호(弧) 길이의 계산에 있었던 만큼 이노는 구체(球體)로서의 지구와 위경도 좌표 개념 등 근대 천문·지리학에 입각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군대에서 독도법(讀圖法)을 배운 사람은 알겠지만, 현대 지도 사용의 첫 번째 단계는 현 위치 파악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지도 제작자가 각 지점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지도를 제작하였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노는 지표면에서 실측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측량 결과가 정확한지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노는 이를 위해 천문학 지식을 동원하였다. 태양과 주요 천체의 고도 및 운행을 관측하고 지표면의 주요 지형지물(주로 높은 산봉우리)을 통해 현 위치를 확인하는 삼각측량 방식을 고안하여 측량 결과를 지속적으로 검증하고 보정하는 한편, 이를 위도와 경도의 좌표로 설정하여 지도에 반영하였다.
 
  이노의 일기에는 총 3754일간의 측량 기간 중 1404일에 걸쳐 하루 수회에서 수십 회에 이르는 천문관측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측량의 결과, 이노가 실측을 통해 계산한 위도 1도의 거리는 현대의 측정치와 오차가 1/1000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노가 고안한 천체관측을 통한 지도 제작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읽었지만, 사실 문과 출신인 나로서는 전부 소화하기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이노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지도 제작에 대한 이해는 현대의 일반인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발달된 측량기술이 뒷받침돼
 
이노 다다타카가 사용했던 양정거(量程車: 거리측정기·왼쪽)과 반원방위반(半圓方位盤·오른쪽).
  둘째 비결은 일종의 사회적 공공재로서 일본 사회에 발전된 측량 기술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에도시대 들어 경제가 번성하면서 일본에는 각종 도로, 운하, 성, 수도 건설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빈번하였고, 이러한 사정은 각종 지형지물의 거리, 각도, 높이 등을 측정하는 고급 측량 기술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노는 전문 지도제작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이노가 상인 시절부터 마을의 제방이나 도로 건설 등 공공 토목사업에 참여하면서 측량의 기초를 접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노는 도선법(導線法)이라는 측량법을 사용하였다. 도선법이란 측량 지점에 폴(pole)을 꽂아 두고 다음 지점에 폴을 꽂아 양자 간의 거리와 각도를 기록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측정 지점 간의 거리, 각도, 방위, 경사도 등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당시 일본에는 이러한 용도의 계측 기구의 실용화, 상용화가 진전되어 있었다. 이노는 이러한 기구들을 구입하거나 필요에 따라 일부 개량하여 사용하였다. 에도 장안의 유능한 전문 기술자들과 협업하여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거나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노 지도 제작을 가능케 한 도구적 기초가 되었다.
 
 
  3만3889km를 답사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부분도.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놀랍도록 정밀하게 일본 국토를 그려냈다.
  셋째 비결은 이노 자신의 집념이다. 아무리 천문학 지식이 풍부하고 뛰어난 측량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직접 현장에 가서 측량을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일본은 큰 나라는 아니지만, 해안선이 엄청나게 길고 복잡한 형상을 하고 있다. 현대 기술로 측정한 일본 해안의 총연장은 3만3889km로 이는 지구 외경(약 4만km)의 85%에 이르는 거리이다. 이러한 해안선의 전모를 한 사람이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서 현장에서 실측을 하여 지도를 제작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평균 수명이 40세이던 시대에, 이노는 쉰이 넘은 나이에 전일본 해안선 실측이라는 도전에 나섰고, 누구도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그 도전에 성공했을 때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나이는 숫자일 뿐임을 증명한 이노의 집념과 생애는 어찌 보면 100년 인생이 주어지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와 관계없이 끊임없이 배움에 정진하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감으로 위업을 이룬 이노의 생애는 메이지 시대에 과학적 사고, 근면, 끈기의 스토리로 초급 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이노는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하나이자 본받고 싶어 하는 삶의 귀감으로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노즈는 〈대동여지도〉보다 수준이 낮은 지도?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한국의 서적이나 인터넷 블로그 등에는 이노 지도와 〈대동여지도〉를 비교하는 글들이 종종 보인다. 상당히 많은 글이 〈대동여지도〉와 이노 지도를 우열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있다. 일례로 어떤 지리공간 계측 전문가의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노 지도는 당시의 측량술인 거리와 방위에 의한 도선법으로 해안선과 도로를 따라 계측해서 작성한 지도이기 때문에 지도에 표기된 성과(成果)는 해안선과 도로, 전답, 호소, 섬 등에 그친 데 비해 대동여지도는 한반도 전역의 지형과 도로를 비롯하여 22종에 달하는 지형지물을 표기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지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 혼자의 힘으로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 3대 지도를 만들고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등 3대 지지를 편찬한 김정호와 단지 측량에만 전념한 이노를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겠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낀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5-11 15:07   |  수정일 : 2017-05-1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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