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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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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가 오래 살았다면…쿠바의 참혹한 가난을 뭐라 설명할까?

글 | 조성관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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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 게바라 / 사진출처=pixabay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가 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스물세 살 의대생 푸세가 주인공이다. 푸세는 대학 친구와 함께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4개월간 남미 대륙을 횡단하는 계획을 세운다. 중간에 오토바이가 고장나자 두 사람은 걸어서 여행을 계속하게 되고 여정은 8개월로 늘어난다. 그 도정에서 푸세는 남미 대륙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기나긴 여행이 끝난 후 그의 가슴속에는 출발할 때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꿈이 불타올랐다. 세상을 바꿔 공산주의 낙원을 만들겠다는 꿈! 그는 체 게바라다.
   
   지난 11월 말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1926~2016)가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을 접하고 많은 사람이 시가를 피우는 한 젊은 남자를 떠올렸다. 체 게바라(1928~1967). 카스트로 하면 게바라고, 게바라 하면 카스트로가 연상된다. 쿠바 수도 아바나 중심가에 가면 어디서나 게바라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아바나 한복판에는 체 게바라 박물관이 있고 두 사람이 자주 가던 술집이 있다.
   
   1959년 1월 1일, 서른세 살의 카스트로는 서른한 살의 게바라와 손잡고 친미(親美)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렸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지 꼭 10년 만에 미국의 안마당에 해당하는 카리브해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정권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는 내각을 모조리 혁명동지로 채웠다. 대부분 고졸 학력이거나 중졸 학력인 사람들이 장관에 임명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쿠바 공산혁명 이후 세계의 좌익들에게 게바라는 최고의 영웅이었다. 좌익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쿠바 혁명의 영웅인 게바라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중에는 프랑스의 대표적 좌익 커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있었다. 이미 작가로 세계적 명성을 날리고 있던 두 사람은 1960년 1월, 아바나에서 게바라를 인터뷰했다. 그때 게바라는 혁명군 복장을 한 채 두 사람과 만났다.
   
   199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에서 체 게바라 열풍이 분 적이 있다. ‘안온한 의사의 길을 내던지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건 남자’가 게바라였다. 누구라도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삶이었다.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그는 우상이었다.
   
   게바라는 서른아홉 살에 또 다른 혁명을 도모하다 볼리비아에서 숨졌다. 나는 게바라의 인생을 생각할 때마다 그가 요절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카스트로가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개조하는 도중에 그는 사망했으니. 만일 그가 볼리비아 정글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그는 자신의 과오와 오류를 미처 돌이켜볼 틈이 없었다. 서른아홉 해를 산 혁명가 게바라가 쓰거나 뱉은 말은 현실에서 실현된 게 거의 없다. 공허한 환상에 불과했다.
   
   만일 그가 카스트로처럼 장수했다면 젊음을 바쳐 이뤄낸 혁명의 땅에서 나오는 보트피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쿠바의 참혹한 가난을 뭐라 설명할 것인가. 아바나에 우글거리는 거리의 여자들을 보면서 뭐라 할 것인가. 게바라가 꿈꾼 세상은 정녕 ‘함께 똑같이 못사는 나라’였을까. 67년간 쿠바를 지배한 독재자 카스트로는 생전에 쿠바를 이렇게 표현했다.
   
   ‘고귀하고 이타적인 나라의 사람들이 교육·과학·문화의 발전을 통해 이룩한 영광, 권리, 정신적 풍요의 사회’.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6-12-26 10:17   |  수정일 : 2016-12-2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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