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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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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오바마가 방문하는 日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는 5월 말 아베 일본 수상과 함께 히로시마를 방문한다고 한다. 원폭 투하에 대한 사과는 없을 것이고, 핵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할 것이라고 한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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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원폭 3일 후 모습. / photo by 조선DB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는 5월 말 아베 일본 수상과 함께 히로시마를 방문한다고 한다. 원폭 투하에 대한 사과는 없을 것이고, 핵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할 것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편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유명한 평화주의자의 역할이 있었다는 사실은 핵무기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39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한 달 전 미국 프린스턴 대학 교수 엘버트 아인슈타인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스질라드였다. 아인슈타인처럼 나치를 피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유대인 과학자였다. 그는 나중에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부인이 유대인으로서 무솔리니의 탄압을 받자 미국으로 피신)와 함께 흑연을 減速材(감속재)로 이용, 최초의 연쇄반응을 성공시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를 만든 사람이다.

   스질라드는 친구인 아인슈타인에게,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핵분열에 성공하였으며 연쇄반응 실험에 몰두하는 것 같다면서 가공할 新武器(신무기)를 만들 위험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발견한 질량-에너지 等式(등식)인 E = mc2(제곱)이 핵폭탄 개발의 원리가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는 곧 깨달았다. 핵분열과 연쇄반응이 핵폭탄 제조로 연결된다는 것을. 스질라드는 미국도 대응책을 세워야 하니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올리자고 했다. 초안은 스질라드가 쓰고, 아인슈탄인은 교정을 보고 서명하였다. 이 편지는 아인슈타인-스질라드 편지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어떻게 편지를 전달하느냐였다. 스질라드는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 국민적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으나, 그가 고립주의자이고, 親나치 인물임을 알고는 포기하였다. 이 편지는 결국 알렉산더 삭스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맨해튼 계획
  
   1939년 10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직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명의의 편지를 받은 루즈벨트는 군사문제 고문인 와트슨에게 이를 건네면서 "행동이 필요해"라고 했다. 과학자들로 急造(급조)된 위원회는 대통령에게 대응책을 건의, 육군이 관할하는 핵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이 시작되었다.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맨해튼 계획엔 한때 13만 명이 종사하였고, 20억 달러(요사이 가치로는 230억 달러)가 들어갔다. 90%가 原子爐(원자로) 등 시설을 짓는 데, 10%가 폭탄 제조, 설계 등에 쓰였다.

   아인슈타인은 당초의 핵개발 계획이 느리게 진전되자 1940년 3월 다시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썼다. '베를린에선 우라늄 프로젝트가 급진전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신속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대통령은 긴급 대책 회의를 소집하고, 아인슈타인도 참여시키도록 지시하였으나 그는 감기에 걸렸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1945년 3월이 되자 종말이 가까워진 독일이 핵폭탄을 개발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미국의 핵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한 스질라드는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용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그는 다시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스질라드와 과학자들을 만나 줄 것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대통령은 전달된 편지를 읽지 않았다. 루즈벨트가 4월12일에 죽은 뒤 이 편지가 집무실에서 발견되어 트루먼 후임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그는 편지를 번스 국무장관에게 주었고 번스는 스질라드를 만났으나 건의를 묵살했다.

  
   原爆 사용 반대 건의
  
   스질라드는 독일이 망한 후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될 것임이 확실해지자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70명의 과학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아 1945년 7월17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이 탄원서에서 스질라드는 '우리가 개발한 원자폭탄은 첫 단계에 불과하고 앞으로 이를 발전시킬 경우 거의 무한한 파괴력을 갖게 될 것'이라면서 사용하기 전에 먼저 일본에 최후통첩을 할 것을 건의하였다. 즉 미국이 일본에 요구하는 조건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뒤 일본이 이를 거부하면 그 이후 신중하게 판단, 사용을 검토해달라고 하였다.

   이 탄원서는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쓰지 않고 재래식 무기만 가지고 일본에 상륙전을 펼 경우 미군 피해는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국 정책 결정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 원자폭탄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사용하지 않아 엄청난 人命 피해가 났다는 비난이 쏟아질 경우, 정치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맨해튼 계획을 지휘하던 글로브 장군은 스질라드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고, 서명자 거의 전원을 해고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에 핵폭탄 제조 요청 편지를 쓴 걸 후회하면서도 독일의 핵개발 정보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려 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FBI가, 그의 평화주의적 성향 때문에 보안에 위험을 주는 인물이란 판정을 하였던 것이다.

  
   나가사키의 不運
  
   헨리 루이스 스팀슨은 2차세계대전 때 미국 전쟁성 장관이었다. 그는 공화당원이었으나 민주당인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하에서 요직을 맡았다. 국익(國益)만 생각하는 불편부당한 자세 덕분이었다. 1945년에 그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할 때 나이는 78세였다. 미국 지도부 인사들중 最年長者(최연장자)였고, 公職경력이 화려했다. 이런 권위로 해서 대통령도 그를 존중했다. 1893년에 그는 마벨 웰링턴 화이트와 결혼했다. 신혼여행을 일본 교토로 갔다. 1000년 古都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일본인들의 정직과 예절에 반했다.

   1945년 미국 지도부는 개발에 성공한 원자폭탄을 투하할 후보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1차 후보지로 추천된 곳은 히로시마, 교토, 니가타, 고쿠라였다. 이들 도시는 그때까지 폭격을 당하지 않았으며 軍 시설이 있었다. 스팀슨은 교토를 제외시켰다. 신혼여행 때의 좋은 인상도 한 이유였다. 일본의 정신이 담긴 이 도시를 파괴하면 민심(民心)이 흉흉해져 전후(戰後) 관리가 어렵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원폭 투하지 선정위원회는 제외된 교토 대신에 나가사키를 집어넣었다.

   1945년 8월6일 새벽 사이판 옆에 있는 티니안섬을 출발한 미군의 B-29 폭격기는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했다. 우라늄彈이었는데 '리틀 보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570m 상공에서 폭탄이 터졌다. 7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후유증으로 더 많이 죽었다.
   8월9일 새벽, 소련이 對日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침공하였다. 이날 오전 티니안을 이륙한 미군 B-29는 요코하마 상공에서 호위 전투기와 합류한 뒤 목표지인 北 규슈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다. 고쿠라의 하늘은 안개와 연기에 덮여 있었다. B-29는 몇 번 상공을 선회했으나 투하 목표물을 육안(肉眼)으로 볼 수가 없었다.

   기장(機長)은 B-29를 대체 목표지인 나가사키로 돌렸다. 여기도 구름에 덮여 있었다. 기름이 줄어드는 B-29가 마지막으로 상공을 선회하는데 구름이 갈라지면서 아래로 미쓰비시 중공업이 보였다. 거기를 향해서 '팻맨'이란 별명을 가진 플루토늄탄을 투하했다. 약500m 상공에서 터졌다. 오전 11시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플루토늄탄은 폭발력이 TNT 기준으로 2만t이었다. 히로시마 原爆보다 40% 더 강한 것이었으나 나가사키에는 산이 많아 피해는 덜했다.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나가사키엔 한국인들도 많았다. 미국인 포로 수용소도 있었다. 이 수용소에 있던 미군포로 수백 명도 죽었다.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군은 1945년 말에 일본에 상륙할 예정이었고, 소련군은 8월9일에 만주를 침공하기 시작하였으니,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점령되어 한국은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原爆 투하는 일본의 조기(早期) 항복을 불러 38선 이남(以南)을 자유지역으로 확보하도록 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6-05-11 09:50   |  수정일 : 2016-05-1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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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 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月刊朝鮮>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 傳記》(全13권)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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