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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노동자 이경석의 ‘밥보다 소설’

엉뚱발랄 뉴요커의 러브 인 더 시티

조조 모예스 『스틸 미』

글 | 이경석 소설가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3-08 16:23

삶은 때때로 우리를 속인다. 번듯한 직장과 직위, 일로 맺어진 관계 등이 나를 규정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됐을 때, 오롯이 나라는 개인으로 남았을 때의 나를 떠올리면 어떤가. 그런 나는 무엇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내 것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이 결국엔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온갖 치장을 걷어내고 발가벗겨진 외로운 나를 목도하는 그 순간,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할까. 열두 시가 되면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유리 구두와 호박 마차, 화려한 드레스는 그 순간 내 것이었나 결국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나
조조 모예스(Jojo Moyes)의 장편소설 스틸 미(Still me)는 고향을 떠나 수천 마일 떨어진 미국의 뉴욕 5번가에서 상류층 가정의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 영국 여성 루이자 클라크의 이야기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과 복닥거리며 살아온 루이자는 뉴욕의 최상류층인 고프닉가에서 일하며 전혀 다른 삶을 만난다. 그녀의 업무는 고프닉가의 새로운 안주인 아그네스의 어시스턴트. 집 안에서의 소소한 잡무를 비롯해 아그네스의 미용과 쇼핑, 화려한 연회와 각종 자선 행사까지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쫓으며 손발이 되어주는 게 임무다. 멀리 떠나온 누구나 그렇듯, 루이자 역시 향수병을 앓고 영국에서의 일상을 그리워하지만 화려한 뉴욕 생활에 익숙해지며 점차 뉴요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
 
하루가 몽롱하게 지나갔다. 20분 후 우린 건물에서 나와 대기 중인 차에 타고, 몇 블록 떨어진 화려한 미용실로 갔다. 나는 평생 크림색 가죽으로 꾸민 검은색 대형차를 탄 사람처럼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 어딜 가나 조용하고 고급스러웠고, 아래 정신없는 거리와 다른 세상이었다.” 57p
 
내가 어딜 다니는지 너는 못 믿을 거야. 어젯밤에는 내 한 달 치 월급보다 비싼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갔어.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어.” 71p
 
뉴요커는 걸음이 정말 빨라서, 성큼성큼 인도를 지나 인파 속을 누볐다. …… 그들은 휴대폰이나 스티로폼 커피 컵을 들고 다녔고, 적어도 절반은 오전 7시 이전에 출근 복장이었다. …… 이제 장식이 있는 구두를 포기하고 운동화를 신는다. 덕분에 인파를 홍해처럼 갈라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지 않고 흐름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누가 내려다보면 나를 뉴요커로 알게 하고 싶었다.” 121p.
 
영국 로맨스소설협회상을 2차례 수상하며 로맨스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은 작가답게 조조 모예스는 스틸 미에 복잡다단한 루이자의 일상과 함께 때론 애틋하고 때론 신선한 사랑 이야기를 녹여냈다. 화려한 도시의 삶에 익숙해진, 그렇게 변해버린 루이자의 삶은 연인인 샘과의 관계에 파문을 일으킨다. 필요할 때 가닿지 못하는 육체의 거리, 수천 마일에 이르는 그 거리는 결국 마음의 거리로 이어지고 의심과 오해 속에 불같은 사랑은 쉬이도 식어간다. 다음 순서는 뭘까. 극적인 화해,라 생각했다면 당신은 꽤 순진한 사람일까. 로맨스의 여왕은 여기에 새로운 로맨스를 심는다. 그것도, 앞서 생을 마감한 사랑과 거짓말처럼 꼭 닮은 조시가 루이자의 삶 속에 불쑥 발을 들인다.
 
앉아서 식어버린 생선요리를 먹으면서 머리가 그만 윙윙대기를 기다렸다. ‘그는 윌이 아니야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달랐다. 눈썹 모양도 달랐다. 그는 미국인이었다. 그런데 태도가 비슷했다. 날카로운 지성과 자신감의 조화, 상대가 뭘 던져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분위기, 꼼짝 못하게 만드는 바라보는 눈길.” 94p
 
언뜻 엉뚱 발랄한 아가씨가 벌이는 한바탕 소동과 사랑을 그린 가벼운 소설로 읽히지만 스틸 미는 제법 묵직한 관계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적과 동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낯선 삶 속에 내던져진 루이자는 꽤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어렴풋 그 비결을 깨닫는다. 거짓 웃음과 친절을 갑옷처럼 두른 관계 속에서, 무심한 듯 반짝 빛나는 진짜 호의를, 사랑을, 신뢰를 당신은 구별해낼 수 있을까.
 
사실 스틸 미는 전작이 있다. 세계적으로 1400만 부 이상 팔렸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미 비포 유(Me Before You)의 후속작이다. 루이자를 둘러싼 여러 배경이 이어지는 탓에 전작을 읽지 않은 필자는 사실 인터넷을 도움을 받아 미 비포 유의 내용을 대략 훑었다. 하지만 전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스틸 미를 읽고 즐기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어림잡아 과거를 예측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스틸 미에 앞서 미 비포 유를 읽거나 영화를 관람하는 건 더 좋은 선택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젊은 여성 취향의 캐주얼한 소설-어떤 편견이라기보다는 소설의 편의상 분류를 위한 표현임을 이해해주시길-이 종종 그렇듯 해피엔딩을 예상했다면 스틸 미는 조금 다른 결말로 독자를 환기한다. 친구라 믿었지만 배신으로 제 안위를 지킨 이도, 안타까운 이별을 맞은 연인도, 지키지 못할 것을 지키고자 애쓰는 이들도, 충격적인 비밀을 간직한 이들도 모두가 여느 때처럼 오늘을 살아간다. 물론 어제와는 전혀 다른 오늘이며 이제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 갈수는 없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건 여전히 나. 눈물을 닦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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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미』 조조 모예스 지음, 공경희 옮김, 살림 펴냄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경석 소설가

밥보다 소설이 더 좋다는 초짜 소설가다. 실제로 점심시간마다 밥 안 먹고 소설이나 읽고 있다. 2016년 겨울, 한국작가회의 주관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공모에 단편소설 「삐걱삐걱」이 당선돼 등단했다. 부업으로 조선뉴스프레스 여성미디어본부에서 기자로 일한다. 장래희망은 전업 작가다.

등록일 : 2019-03-08 16:23   |  수정일 : 2019-05-0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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