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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근의 잃어버린 문화재를 찾아서

케 브랑리 박물관의 ‘십이류면류관’과 한국 유물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립박물관으로 한국의 민속유물 600여점 수집
그 중에 1898년 수집한 ‘십이류면류관’ 있어
대한제국과의 연관성 조사 필요
박물관 측 공동조사연구에 필요성 공감

글 | 이상근 재단법인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1-2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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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 브랑리박물관 홈페이지 소개된 조선의 모자 등. 사진 홈페이지 캡처>

케 브랑리 박물관의 ‘십이류면류관’  

2018년 10월 25일, 문화유산회복재단 조사단은 스포츠 토토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국립박물관인 케 브랑리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박물관은 2006년에 개관한 곳으로 건물 외관부터 특이하였다. 박물관은 에펠탑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은 주로 인류 초기의 문명 유물 30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조사단은 이곳에 19~20세기 수집한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어렵게 열람 허락을 얻어 방문하였다. 한국 유물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십이류면류관’이었다. 조사단을 맞이한 박물관 측은 특별 열람실에 ‘십이류면류관’을 전시하고 관련 자료를 검색할 수 있게 컴퓨터도 연결하였다.  

십이류면류관은 ‘황제’만이 착용할 수 권위의 상징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자신만의 열두 줄 구슬이 달린 면류관을 사용하였지만 조선은 아홉 줄이 달린 구류면류관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은 황제국이 되었고 십이류면류관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순종황제가 십이류면류관을 쓴 사진은 있으나, 고종황제의 십이류면류관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사진조차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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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 브랑리박물관 십이류면류관 모습. 한 줄이 끊어지고 구슬도 곳곳이 빠져있다.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1898년 스테낙께르가 수집했다

조사단으로 참여한 김나래 박사는 수집 경위와 관련하여 “면류관의 경우 다른 한국 수집품과 함께 처음에는 1898년에 기메박물관으로 스테낙께르에 의해 기증되었다. 이후 1981년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 박물관(Musée des hommes)으로 다른 아시아 유물들과 함께 옮겨진 후, 다시 2006년에 께 브랑리 인류사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04년에 발간된 <기메 박물관 창립 25주년 기념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기증자 명단에 요코하마의 프랑스 영사였던 스테낙께르가 있으며, ‘돌조각상 하나와 한국의 머리장식 및 모자 컬렉션을 기증했다(Steenackers-Consul de France à Yokohama. Une statue pierre. Une collection de coiffures coréennes)’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서의 하나의 컬렉션이라는 표현이 모호하여 구체적으로 그 수량과 형태를 이 글만으로는 자세히 추정하기는 어렵다. 
  
현재 께 브랑리 박물관의 십이류면류관 유물 카달로그에는 기증자에 대한 정보와 함께 아래와 같은 옛 한국 모자의 형태, 왕실용 모자제작 등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Série de chapeaux coréens envoyés au Musée Guimet en 1898 par M. Steenackers le donateur.
Les chapeaux doivent se placer sur le sommet de la tête, ils ne sont pas faits pour être enfoncés, ce qui explique la petitesse du tour de tête, il en est de même pour la plupart des bonnets, sauf ceux en crin tressé et ceux formant capuchon, destinés à protéger du froid. Ces derniers se portent toujours sous le chapeau. Dans les couvre-chefs coréens présentant une partie plus haute que l’autre, la plus élevée est destinée à couvrir la tête, cette disposition a pour but de loger le topnot, touffe épaisse de cheveux relevée en forme de chignon, que les hommes portent au sinciput. Les chapeaux et bonnets royaux ne peuvent être confectionnés que par certaines personnes possédant ce droit héréditairement, nul autre ouvrier, sous peine de mort, n’a le droit de fabriquer les coiffures royales. Il est interdit à ceux qui sont autorisés à fabriquer les chapeaux du roi, de vendre ces objets, sous les peines les plus sévères. Les coiffures royales hors d’usage ou ne plaisant plus au souverain, sont détruites au Palais.

기증자 스테낙께르에 의해 1898년 기메 박물관에 보내진 한국 모자들

모자들은 눌러쓰는 것이 아닌 머리 위에 놓는 스타일로 머리 둘레가 작은 편인데, 말총으로 짜여진 것(탕건)이나 두건형태의 것을 제외한 추위를 막기 위한 대부분의 헝겊 모자들도 이와 같다.

이것들(탕건이나 두건들)은 항상 모자 아래에 쓰여진다. 한국의 두건식 모자들은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높은데 가장 높은 부분은 머리를 덮는 곳이며, 이러한 형태는 남자들이 전두부에 머리를 틀어올린 상투끝을 놓기 위한 것이다. 왕실의 모자들은 대를 이은 특별한 장인들만 제작할 수 있으며, 다른 장인들은 왕실 머리장식이나 모자들을 만들 수 없으며 이를 어길 시 사형을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왕의 모자를 만들거나 심지어 파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일반적인 경우) 사용할 수 없거나 왕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왕실 모자들은 궁에서 파기된다.≫

설명대로 왕실에서 사용된 물품들은 궁에서 파기되기 때문에 어떤 경로로 궁 밖으로 유출되었는지, 어디에서 스테낙께르가 구입해서 1898년에 프랑스에 기증하게 되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참고로 이 면류관 외에도 께 브랑리 박물관에는 한국 왕실 의례 때 쓰였던 금관(목록번호 71.1981.93.18 D) 등 관모(官帽)를 소장하고 있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십이류면류관은 박물관의 홈페이지(collections.quaibranly.fr)에는 머리쓰개(coiffe)류로 분류되어 있으며, 목록번호(71.1981.93.21 D), 면류관이라는 한국식 발음 명칭, 인류 박물관에서 이전된 유물, 19세기 후반, 재질(종이, 천, 밀랍), 크기와 무게(20x25x20cm, 177g) 등의 기본 정보가 소개되어 있다. 오렌지색, 빨간색, 녹색의 12줄 구술 끈과 붉은 술이 특별한데 홈페이지의 첫 줄에 ‘공식의례를 위한 황제의 머리장식’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이후의 설명은 위의 카달로그 내용과 동일하다.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구류 면류관과 구장 면복을 입은데 반해, 황제는 십이류 면류관과 십이 장복을 입었음을 고려할 때 이 면류관이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7년경 제작된 고종황제의 면류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께 브랑리로 이전된 이후 먼지가 제거되고 떨어진 술과 면판의 박락된 모서리부분을 붙여놓았으며, 전체적으로 유물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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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십이류면류관'이 아니다

조사단이 촬영한 면류관의 사진을 본 궁중복식전문가들은 ‘우리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우선 구술 줄이 앞면에만 있고, 구슬의 배열과 면판도 오동나무면판이 아닌 종이에 천을 배접한 점 등 대한황실의 제작기법, 형태, 재질 등에 있어 상이함으로 유사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참고로 대한제국의 십이류면류관에 대한 기록은 <대한예전>에 있다. 대한예전은 대한제국이 창건됨으로 새롭게 제정한 예전으로 ”시일야방석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각고의 노력 끝에 편찬하였다.





<순종황제가 착용한 십이류면류관 모습>   


프랑시스 프레데릭 스테낙께르 Francis-Frédéric Steenackers (1858-1917)

김나래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프랑시스 스테낙께르는 유명한 행정가이자 조각가, 역사가, 문학가였던 프랑소와 프레데릭 스테낙께르(François-Frédéric Steenackers, 1830-1911)의 아들로 30살 무렵부터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8년 스위스의 프랑스 부영사를 역임했으며, 같은 해 기사훈장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1891년부터 일본의 프랑스 공사관에서 부영사로 일했다. 이 시기 스테낙께르는 일본 미술품 애호가였던 정치가 조르쥬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의 ‘눈’이자 자문 역할으로 그의 많은 일본 미술작품과 민속품 수집을 돕게 된다.

이 시기의 외교관들이 과학조사(mission scientifique)를 목적으로 현지의 민속학 자료 및 유물들을 수집해 프랑스로 보내는 일을 수행했다. 아시아 예술품에 해박했던 스테낙께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본과 한국의 민속품 등을 수집해 프랑스로 보냈으며, 1898년에는 기메 박물관에 십이류면류관을 비롯한 한국 민속유물들을 기증했다. 께 브랑리 박물관 카달로그에는 모자(삿갓, 면류관, 사령모자 등)류, 머리장식품, 부채류들의 기증자로 기록되어 있다.

1900년부터 1906년까지는 나가사키 및 요코하마 프랑스 영사로 일했으며, 폴 포탕의 군사자문이자 일본 전문가로 유명해졌다. 1908년에 프랑스 공사관이 일본에서 문을 닫게 되며, 스케낙께르는 프랑스로 돌아와 58세의 나이로 파시(Passy)에서 사망한다.

저서로는 우에다 토쿠노스께(Uéda Tokunosuké)와 함께 프랑스어로 편찬한 <백 개의 일본 잠언집(Cent proverbes japonais)>이 있다. 1885년에 파리에서 출간된 이 책은 각 페이지마다 소소한 일본인들의 일상을 그린 삽화들과 수묵화들이 포함되었으며, 각 격언마다 스테낙께르가 상세한 해석과 설명을 한 점이 인상적이다.

대한제국 선포의 역사적 의미와 면류관의 ‘진실’   

문화유산회복재단은 박물관에서 기록한 수집시기와 수집가에 대한 내용과 궁중복식연구가들의감정결과에 따라 케 브랑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유물의 출처조사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십이류면류관이 유사품이라면 이를 박물관에 알리고 바로 잡아야 하고 국내 연구자들의 기술적 범위에서의 감정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였다.  
 
자주독립국가의 상징인 ‘십이류면류관’은 ‘만세’운동의 상징성과 함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귀중한 단서가 될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상근 재단법인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대한불교조계종중앙신도회 사무총장
사단법인 날마다좋은날 상임이사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실행위원장
서울시문화재찾기시민위원 등 역임

(현)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
(현)명원문화재단 이사
(현)재단법인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등록일 : 2019-01-23 15:00   |  수정일 : 2019-01-2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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