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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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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14〉]
뛰어난 임금도 간교한 신하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

⊙ “군자를 (함정까지) 가게 할 수는 있으나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속일[欺] 수는 있으나 옭아넣을[罔] 수는 없다”(공자)
⊙ 漢 武帝, 간신 강충의 이간질에 넘어가 태자와 相爭 끝에 태자 죽여
⊙ 태종(이방원), 간신 목인해가 부마 조대림을 꼬여 作亂했으나 사태를 명철하게 파악해 대처
⊙ “많이 듣고서(듣되) 의심나는 것은 제쳐놓고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만 신중하게 이야기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요, 많이 보고서 위태로운 것은 제쳐놓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행한다면 후회가 적을 것” (《논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 한때의 판단 착오로 태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漢 武帝
  성군(聖君)은 아니어도 명군(明君) 혹은 영군(英君)으로 불리기에 손색없는 한 무제(漢 武帝)도 나이가 많아 병이 들자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것이 빌미가 돼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흔히 중국사에서는 ‘무고(巫蠱)의 화(禍)’라 부른다. 무고란 무축(巫祝)의 주법(呪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 화의 희생자가 다름 아닌 다음 황위를 이을 태자였기에 이 사건은 두고두고 조명을 받았다.
 
  기원전 92년 병으로 눕게 된 말년의 무제는 당시 강충(江充)이라는 인물을 절대 신임하고 있었다. 유가(儒家)의 덕치(德治)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엄격한 법 집행을 강조했던 무제는 강충의 고지식할 정도로 엄격한 일처리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런데 태자 유거(劉據)는 강충과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예전에 강충이 황제의 명을 직접 받드는 직지사자(直指使者)였을 때 태자의 집안 수레가 황제만이 다니는 치도(馳道) 위를 올라간 적이 있었다. 태자가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강충은 들어주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오히려 무제는 강충을 곧은 자[直]라고 여겼다.
 
  강충은 무제가 병석에 눕자 걱정에 휩싸였다. 무제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태자에게 주살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무고(巫蠱)의 일이 일어나자 강충은 이를 이용해 간사한 짓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사전에 준비를 해 둔 함정에 태자를 빠트리려고 한 것이다.
 
 
  태자의 亂
 
이때 강충은 무고의 일을 재판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이미 무제의 뜻을 알아차리고서 궁중에 무고의 기운이 있다고 건의한 다음에 궁궐에 들어가 어좌가 있는 곳을 무너트려 땅을 팠다. 무제는 안도후(按道侯) 한열(韓說), 어사 장당(章贛), 황문(黃門·환관) 소문(蘇文) 등으로 하여금 강충을 돕게 했다. 강충은 드디어 태자궁에 이르러 고(蠱)를 파내어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을 찾아냈다. 이때 무제는 병에 걸려 감천궁(甘泉宮)으로 더위를 피해 가 있었기 때문에 황후와 태자만이 경사(京師·수도)에 있었다. 태자가 소부(少傅) 석덕(石德)을 부르니 석덕은 사부로서 함께 주살(誅殺)될 것을 두려워해 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승상 부자와 두 공주 그리고 위씨(衛氏)가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됐는데 지금 무당과 사자(使者)가 땅을 파 증거물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무고를 갖다 둔 간사스러운 짓이 혹시 실제로 있었는지를 모르겠지만 스스로 밝힐 방법이 없으니 부절(符節)을 칭탁해 강충 등을 체포해 옥에 가두고서 그의 간사함을 끝까지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태자는 위급한 상황이라 석덕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년) 7월 임오일(壬午日)에 마침내 (태자는) 빈객으로 하여금 사자인 척하고 가서 강충 등을 잡아들였다. 안도후 한열 등은 사자에게 속임수가 있다고 의심해 기꺼이 조서를 받으려 하지 않자 빈객은 한열을 쳐 죽였다. 어사 장당은 부상을 입고 겨우 탈출해 직접 감천궁으로 달려갔다. 태자는 사인(舍人) 무차(無且)를 시켜 미앙궁 궁전의 장추문(長秋門)으로 들어가게 해 장어(長御·여자 시위대장) 의화(倚華)를 통해 황후에게 전말을 갖추어 고백하게 하고 황실의 마구간에 있는 수레를 내어 활 쏘는 병사들을 싣고 가서 무기고의 병기를 꺼내고 장락궁(長樂宮)의 위졸들을 출동시켰으며 백관들로 하여금 강충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게 했다. 그리고 강충의 목을 벴다.
 
  여기에 태자의 잘못도 있었다. 먼저 아버지 무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황후에게만 통고하고 일을 일으킨 것은 분명 무제의 의심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한편 강충을 따랐던 무리들은 감천궁으로 달려가 “태자가 난(亂)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父子相爭
 
  무제는 조카이기도 한 승상(丞相) 유굴리(劉屈氂)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보고하도록 했다. 그런데 유굴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에 무제는 크게 화가 나서 이렇게 전했다.
 
  “승상에게는 주공(周公)의 풍모가 없도다. 주공은 관채(管蔡)를 토벌하지 않았던가!”
 
  관채란 관숙과 채숙으로 주나라 주공과는 형제인데 주공이 보필하던 조카 성왕(成王)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형제임에도 토벌을 한 일이 있다. 사실상 태자를 토벌하라는 명이었다. 이에 유굴리는 군대를 출동시켰다. 부자 간의 일전(一戰)이 벌어진 것이다. 닷새의 혈전 끝에 수만 명이 사망했다. 태자의 군대가 패하자 태자는 달아났다.
 
  그에 앞서 장안에서 태자의 반란이 막 전해졌을 때 무제는 크게 화가 났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은 두려워만 할 뿐 어떤 계책을 내야 할지 몰랐다. 이 때 (상당군) 호관현(壺關縣)의 삼로(三老·교육 담당관) 무(茂)라는 사람이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순(舜)임금은 효심이 지극했는데도 (아버지인) 고수(瞽叟)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또 (은나라 고종의 아들인) 효기(孝己)는 (계모에게) 비방과 모략을 당했고 백기(伯寄)도 (계모에게) 추방을 당했으니 골육을 함께한 지친이면서도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의심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비방[毁]이 오래 쌓이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자식은 결코 불효를 하지 않는데도 아버지는 그것을 미처 다 살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서둘러 태자를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한서(漢書)》는 “천자는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지만, 적극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실상의 진압을 명한 것이다.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태자는 도망쳐 동쪽으로 호현(湖縣)에 이르러 그곳의 천구리(泉鳩里)에 숨었다. 주인집은 가난해서 늘 짚신을 만들어 팔아 태자의 먹을거리를 댔다. 태자와 옛날부터 알던 사람이 호현에 있었다. 태자는 그가 부유해 넉넉하다는 말을 듣고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부르려다가 발각됐다. 관리들이 태자를 둘러싸 잡으려 하자 태자는 더 이상 벗어날 곳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서 곧바로 방에 들어가 문틀에서 자살했다. 무제는 태자를 잃었다. 강충의 말을 믿은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다.
 
 
  뒤늦은 후회
 
  1년이 지난 정화3년(기원전 90년) 9월 경 무고의 사건이 대부분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무제는 태자가 두려워서 그랬던 것이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당시 한고조 유방의 사당을 관리하던 고침랑(高寢郞) 거천추〔車千秋·원래 그의 이름은 전천추(田千秋)인데 그의 나이가 많아 천자는 그가 작은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거(車)를 붙여 거천추 혹은 차천추라고 하는 것이다〕가 다시 태자의 원통함에 대해 말했다. 무제는 드디어 거천추를 발탁해 승상으로 삼고 강충의 집안은 족멸시켰으며 태자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었음을 가련하게 여겨 마침내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호현(湖縣)에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이는 ‘태자의 혼령이라도 돌아오기를 바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사건은 흔히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일과 비교된다)를 세우니 천하 사람들이 이를 듣고서 다 슬퍼했다.
 
  여기서 《논어(論語)》 옹야(雍也)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재아(宰我)가 물었다. “어진 사람은 비록 (누가) 사람이 함정에 빠져 있다고 와서 말해 주더라도 따라 들어가야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를 (함정까지) 가게 할 수는 있으나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속일[欺] 수는 있으나 옭아넣을[罔]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 뛰어난 무제도 강충의 말에 속았을 뿐만 아니라 옭아매였다고 할 수 있다. “태자가 두려워서 그랬던 것이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태자가 죽고 나서야 깨달은 무제는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사리에 밝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강충의 이간질
 
  사실 강충의 부자 이간질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한서(漢書)》 ‘강충전(江充傳)’에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강충(江充)은 자(字)가 차천(次)으로 조(趙)나라 한단(邯鄲) 사람이다. 충(充)의 본래 이름은 제(齊)였는데 북과 비파를 잘 연주하고 가무에 능한 여동생이 있어 조(趙)나라 태자 단(丹)에게 시집을 갔다. 제(齊)는 경숙왕(敬肅王)에게 총애를 얻어 상객(上客)이 됐다.
 
  얼마 후에 태자는 제(강충)가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을 왕에게 아뢰었다고 의심해 제와 틈이 생겨 관리를 보내 제를 쫓아가 체포하려 했는데 (이미 달아나) 붙잡지를 못하자 그의 아버지와 형을 감옥에 넣고 조사해 모두 기시(棄市)했다. 제는 드디어 종적을 감추고 도망쳐 서쪽으로 함곡관에 들어가 이름을 충(充)이라고 고쳤다. 대궐에 나아가 태자 단(丹)이 자신의 친여동생 및 왕의 후궁과 간통하고 군국(郡國)의 간활한 토호들과 교통하며 백성들을 겁주면서 온갖 못된 짓을 하고 있는데도 관리들이 제대로 통제를 못하고 있다고 고했다. 글이 올라가자 천자(무제·武帝)는 화가 나서 사자를 보내 군(郡)에 조서를 내려 관리와 병사들을 발동해 조나라 왕궁을 포위하게 하고 태자 단을 붙잡아 위군(魏郡)의 조옥(詔獄)에 옮겨서 집어넣고 정위(廷尉)와 함께 다스리도록 하니 법적으로는 사형에 해당됐다.〉

 
  무제는 이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오히려 강충의 이 같은 굽은 마음씨[枉]를 오히려 곧다[直]고 보아 절대 신임을 보였던 것이다.
 
 
  목인해의 음모
 
  1차 선위(禪位)파동이 있는 다음해인 1408년(태종8년)이 끝나가던 12월 5일 밤 태종은 조준(趙浚)의 아들이자 자신의 둘째 사위인 조대림(趙大臨)을 반역 혐의로 순금사(巡禁司)에 가두도록 명했다. 이때 조대림의 나이 21살이었다. 얼마 후 밝혀지지만 그가 순금사에 갇히게 된 것은 목인해(睦仁海)의 모함 때문이었다.
 
  목인해는 김해 관노(官奴) 출신으로 애꾸눈에 활을 잘 쏘았고 원래는 태종의 처남 이제(李濟)의 가신이었다가 이제가 1차 왕자의 난 때 죽자 정안공(태종 이방원)의 사람이 돼 호군(護軍·장군)에 올랐다.
 
  그의 부인은 조대림 집의 종이었다. 그래서 목인해는 늘 조대림의 집을 드나들었고 조대림도 목인해를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그런데 목인해는 ‘대림이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으니 모함하면 부귀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해 나름의 시나리오를 꾸민다.
 
  목인해는 자신이 부마(駙馬)로서 군권(軍權)을 갖고 있던 이제의 휘하에 있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뜻밖의 변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없지만 공은 군사에 익숙하지 못하니 미리 대처하는 방법을 익혀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목인해는 “설사 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더라도 내가 힘을 다해 공(公)을 돕겠소”라고 다짐했다.
 
  다른 한편으로 목인해는 은밀하게 이숙번을 찾아가 “평양군(平壤君·조대림이 아버지 조준의 작호를 1406년 이어받았다)이 두 마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공(公)과 권규(권근의 아들이자 태종의 셋째 사위), 마천목을 죽이고 역모를 꾀하려고 하오”라며 거짓 밀고를 했다.
 
 
  태종, “내 이미 알고 있었다”
 
  이숙번은 즉각 태종에게 아뢰었고 태종은 직접 목인해를 불러 믿을 수 없다며 “대림이 나이 어린데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느냐? 만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주모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인해는 이 말을 듣고는 즉각 조대림에게 달려가서 “곧 무장한 군사 수십 명이 경복궁 북쪽 으슥한 곳에 모여 공을 해하려고 하니, 공은 마땅히 거느리고 있는 병마로 이를 잡으소서”라며 덫을 놓았다. 병사를 몰고 경복궁쪽으로 간다는 것은 곧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쿠데타이기 때문이다.
 
  조대림은 처음에는 이숙번과 이야기해야겠다, 태종에게 알려야겠다고 하자 목인해는 상황이 급하니 먼저 군사를 출동시키고 나서 알려도 늦지 않다고 유인했다. 조대림도 이를 옳다고 여겨 우선 목인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태종은 조대림에게 사람을 보내 소격전(昭格殿)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다. 그런데 조대림은 자신이 범염(犯染·초상집에 갔다옴)을 했기에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 바람에 태종도 조대림을 의심하게 된다.
 
  목인해의 구상은 의외로 치밀했다. 목인해는 조대림의 집에 와서 “위아래 친분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조대림은 “조용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용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덕망이 있는 학자였다.
 
  조대림이 조용을 불러 침실에서 은밀하게 자기가 아는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조용은 당장 “주상께 아뢰었소?”라고 물었다. 조대림이 “아직 아뢰지 못하였소”라고 답하자 조용은 얼굴빛이 변하며 “신하가 되어서 이런 말을 들으면, 곧 주상께 달려가 고하는 것이 직분인데, 하물며 부마는 더 말할 게 뭐가 있겠소?”라며 야단치듯 말하고 자신이 직접 고하겠다고 대궐을 향해 나섰다. 이에 당황한 목인해는 조용을 길에서 잡아 억류한 다음 이숙번에게 달려갔다.
 
  “조용이 지금 평양군의 집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모주(謀主)입니다. 평양군이 만일 거사하면, 내가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를 것이니, 만약 대인의 군사와 만나거든, 군사를 경계하여 나를 알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칼을 뽑아 평양군을 베겠습니다.”
 
  그런데 이 틈에 조용이 탈출에 성공해 태종에게 진상을 낱낱이 보고했다. 태종은 조용의 말을 듣자 “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답한다. 이제 남은 것은 목인해를 잡아들이는 일이었다.
 
 
  황희의 사람 보는 눈
 
  한편 전후 사정을 모르는 조대림은 해가 저물자 대궐로 태종을 찾아뵈었다.
 
  “듣자오니 경복궁 북쪽에 도적이 있다 하니, 신이 이를 잡고자 합니다. 원하옵건대, 신에게 마병(馬兵)을 주소서.”
 
  “네가 어떻게 잡겠느냐?”
 
  “신이 능히 잡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태종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는지 모른다. 그러고는 모른 척하고서 좋다고 말한다. 조대림은 그래서 당직을 서고 있던 총제(總制) 연사종(延嗣宗)에게 병사를 빌려달라고 하니 미리 태종의 밀지(密旨)를 받았던 연사종은 23명을 내주었다.
 
  한편 태종은 이숙번에게는 “조대림이 만약 군사를 발하면 향하는 곳이 있을 것이니, 경의 집에서 조천화(照天火·일종의 조명탄)를 터뜨려라. 내가 나발을 불어서 응하겠다”고 일러두었다. 그러면서도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황희(黃喜)에게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들으니 평양군이 모반하고자 한다니, 궐내를 요란하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황희가 주동자가 누구냐고 묻자 태종은 “조용이다”고 답했다. 그러자 황희는 “조용은 사람됨이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며 의아해했다. 황희의 이 말은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말로 크게 뛰어나지는 않아도 기본적인 도리는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둠이 깔리고 목인해는 조대림을 재촉했다. 조대림은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면서 “도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목인해는 남산의 마천목 총제 집 옆에 있다고 답했다. 조대림이 남산을 향해 집을 막 나서는 순간 이숙번이 조천화를 쏘았고 태종은 궐내에서 직접 나발을 불었다. 궐에서 나발소리가 난다는 것은 뭔가 변고가 생겼다는 신호였다. 조대림은 “군사들에게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고 군사들은 하나같이 “나발 소리를 들으면 궐문에 모이는 것이 군령(軍令)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맞서 목인해는 “곧장 남산으로 가야 한다”고 우겼다.
 
 
  태종의 조대림 살리기
 
  만일 여기서 조대림이 목인해의 말을 따랐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조대림은 대궐을 향했다. 목인해는 당황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신이 먼저 대궐로 들어가 “평양군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발하여 대궐로 향하였다”고 소리쳤다. 이에 태종은 총제 권희달을 시켜 조대림을 체포케 하여 순금사에 가둔 것이다.
 
  태종은 찬성사 윤저, 대사헌 맹사성, 형조참의 김자지, 좌사간 유백순, 승전색 박영문, 동순금사 겸판사 이직 등에게 명하여, 대림이 군사를 발한 까닭과 주모자를 국문(鞠問)토록 하였다. 세 번이나 물어도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실제로 조대림으로서는 할 말도 없었다. 오히려 조대림은 자신을 문초하던 부사직 최규를 통해 목인해와 대질케 해 달라고 태종에게 간청을 했다. 이에 대해 태종은 이렇게 지시한다.
 
  “조정승(조준)은 개국원훈이므로, 내가 그 아비를 중하게 여겨 그 아들을 부마로 삼은 것이다. 어찌 일찍이 매 한 대 맞고 자랐겠느냐? 대림이 만일 꾀한 바가 있다면, 비록 형벌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을 고하지 않겠느냐? 만일 고하지 않거든, 억지로 형벌하여 공초(供招)를 받는 것이 어찌 마음에 쾌하겠느냐? 목인해와 적당히 대질하여 묻고, 곤장을 가할 것은 없다. 그러나 잠시 형장(刑杖)을 가하여 반드시 그 사실을 토로하게 하라.”
 
  적당한 시늉만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태종은 최규가 오해하기 좋을 만한 이야기를 조대림에게 전하라고 시켰다.
 
  “네가 이미 내게 불효하였으니, 내가 어찌 너를 아끼겠느냐? 네가 비록 죽더라도 명예는 나쁘지 않게 하여야 하겠으니, 주모자를 스스로 밝히라.”
 
  최규로서는 조대림이 정말로 역모를 꾀했다고 생각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대림을 조사하던 문사관(問事官)은 장(杖) 64대나 때렸다. 그런데도 조대림은 결백을 주장했다. 반면 지신사 황희를 직접 보내 목인해를 심문한 결과 장 10여 대를 맞고서 자신이 조대림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때서야 조대림은 “어제 나발을 분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함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종의 회고
 
  조대림과 조용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파란의 시작이었다. 태종은 중국의 고사까지 인용하며 자신의 사위가 무참한 지경으로 곤장을 맞는데도 전후사정을 제대로 알아보려 한 신하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분격했다. 이 일로 대사헌 맹사성은 거의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가 이숙번 등의 구명으로 겨우 살아났다.
 
  태종 11년 11월 22일 태종은 편전에서 신하들과 정사를 이야기하던 중에 3년 전의 그 사건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평양군 조대림을 하옥(下獄)했을 때에 순금사에서 조대림은 굳게 추문(推問)하고 목인해는 가볍게 핵실(覈實·일의 진상을 조사함)한다는 것을 듣고 내 마음이 아프고 상해 한(漢)나라 병길(丙吉)이 옥(獄)의 원통한 것을 잘 살핀 말을 생각하고 순금사가 반드시 틀린 것이리라 여겨, 내관(內官) 박유(朴輶)를 보내 감문(監問·죄인을 심문할 때 임금이 따로 사람을 보내어 문초하던 일)하게 했는데 박유도 역시 대림을 장차 중형(重刑)에 처하려고 했다. 내가 박유를 꾸짖기를 ‘감문하는 때에 밝지 못한 것이 이와 같으니 너와 같은 자는 비록 열 사람이 죽어도 가하다’라고 하고 마침내 박유를 가두고 다시 지신사 황희를 보내 감문해 그 사실을 알아내 목인해가 주형(誅刑)을 당했다. 만일 조대림이 (사위가) 아니었다면 반드시 죄를 잘못 당했을 것이다. 내가 이 일을 겪고 나서 더욱 더 옥송(獄訟)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은 곧 조대림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실로 뒷사람들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사리를 잘 알아내는 법
 
  태종이 이처럼 한 번은 속았으나[欺] 두 번은 옭아매이지[罔] 않았기에 사위 조대림은 태자 유거와 달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을 귀 밝고 눈 밝다[聰明]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리분별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똘똘한 제자 자장(子張)이 출세하는 법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출세하는 법이자 사리를 잘 알아내는[知禮] 방법이기도 하다.
 
  “많이 듣고서(듣되) 의심나는 것은 제쳐놓고[多聞闕疑] 그 나머지 것[其餘]들에 대해서만 신중하게 이야기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요, 많이 보고서 위태로운 것은 제쳐놓고[多見闕殆]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행한다면 후회가 적을 것이니,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벼슬 자리는 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19년 1월호
등록일 : 2019-01-09 09:35   |  수정일 : 2019-01-0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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