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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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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수집한 사람들, 귀환하는 유물들

19세기 개항의 물결과 함께 조선에 온 사람들
은둔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조선에서
놀라운 문명수준과 문화, 신기한 유물에 수집 열중
문화의 진보와 함께 귀환을 꿈꾸다

글 | 이상근 재단법인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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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동양문명대학교 도서관에서 한국고문서 조사. 2018.10.25.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한국 정신의 명석함은 아름다운 도서 인쇄에서, 현존하는 가장 단순한 자모(字母)의 완성도에서, 그리고 세게 최초의 인쇄 활자 구상에서 드러나는데, 나는 굳이 여기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갖가지 지식과 기술을 발전시켜 일본으로 전수시킨 점을 말하지 않겠다. 극동 문화에 있어 한국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어서, 만일 그 입지가 유럽과 흡사한 것이었다면 한국의 사상과 발명은 인접 국가들을 모두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모리스 꾸랑 《조선서지(朝鮮書誌 권 1서문(1895년판)》 
 
1901년,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소개한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저술한 「조선서지」의 서문의 내용입니다. 그는 ”서울의 거의 모든 책방을 뒤지며 장서를 살폈으며,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책들을 사들였다“고 하였습니다.  
 
■ 무엇이 서양인에게 ‘조선’은 흥미로웠을까요?  
 
18세기 후반, 조선에는 눈 푸른 낯선 이들의 방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조선이 사대의 이름으로 문단속을 하지 않고, 고려나 삼국 때처럼 아라비아 권까지 교역을 하였다면 이들과의 만남은 휠씬 이전에 이뤄졌겠지만, 18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오직 중국을 통해서만 문물을 나눴으니 방문한 이들이나 방문객을 맞이하는 이들이나 서로 낯설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입니다. 
 
천주교 선교를 시작으로 방문한 이들은 ‘조선’은 그야말로 동방의 별에서 ‘엘리스’를 만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15세기 이후 유럽은 근대혁명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이루고 이젠 제국의 시대로 전진하면서 식민지 영토쟁탈전이 일삼아 벌어졌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일본의 청년들은 영국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 머리에서 발끝까지 ‘근대’와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조선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평화로운 나라였습니다. 조선조 500년 동안 타국을 침범한 적은 1419년, 조선 개국 초 대마도 정벌이 유일했을 정도입니다. 급변하던 국제정세와 달리 조선왕조 400여 년 동안 근심은 북방의 오랑캐와 왜군의 침략, 그리고 천재지변이 전부였으니 ‘산업 혁명’이나 ‘민권 운동’ 같은 시대적 변화는 먼 나라에서 들리는 풍문일 뿐입니다. 
 
조선을 방문한 이들의 입장에서 조선은 국제정세의 급변에도 놀라울 정도로 평온을 유지하는 사상적 영향력과 높은 수준의 문명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도 그들은 쉽게 구하지 못하던 책들이 지천에 있으며, 중국에만 있을 줄 알았던 고급 도자기가 시중에 흔히 널려 있는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 충격을 받았을 듯도 합니다. 마치 최근 영화 ‘어벤저스의 와탕카국’과 같다고 할까요. 
 
최고 수준의 문물이 그들에게 있다고 여겼는데 ‘조선’은 차원이 다른 수준의 문물을 지니고 있으니 수집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였습니다. 이들은 선교사, 정치가, 외교관, 사업가, 여행가, 의료인, 고고인류학자들입니다.  
 
묄렌도르프((P.G. von Mὃllendorff), 메릴(Merrill), 빅토르 콜랭 드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샤를바라(Charles Varat),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애스톤(W.G.Aston), 앙투아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언더우드(H.G. Underwood), 아펜젤러(H.G. Appenzeller), 스크랜튼(W.B. Scranton),에드워드 마이어(Eduard Meyer), 루셔스 H 푸트(Lucius Harwood Foote), 브라운(McLeavy Brown),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알렌(H,N.Allen), 피에르 주이(Pierre Louis Jouy), 존 버나도(John Bernadou),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카를로 로세티(Carlo Rossetti), 스테낙케르(Steenackers), 존 개스비(John Gadsby),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등등  
 
우리는 이들을 기억하고 조사 연구해야 합니다. 조선은 일본과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합니다. 조약 체결과 함께 방문한 이들은 조선을 ‘연구’하고, 조선을 ‘이해’하고, 조선을 ‘이용’하고,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유물을 수집합니다. 이를 통해 조선의 문화와 풍습, 사상을 연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은 행적을 조사하여 이들이 본 ‘조선’을 이용하고 이들이 수집한 유물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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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천문대에 있는 포백자.‘壽富多男子오래 살고 부유하며 사내아이를 많이 두게 해주십시오'라는 문귀는 궁궐의 옷이나 기와 등에 자주 쓴 글귀이다. 조선시대 포백자는 450 mm인데, 고종 21년(1884) 또는 광무 9년(1905)에 520 mm로 변경한 것으로 고종시기의 포백자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 귀환하는 유물들, 개인 소장품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
 
100년이 지나 유물들이 귀환하고 있습니다. 귀환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한국의 발전입니다. 유물을 보관하고 가치를 전승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인의 의지입니다. 해방이후 한국인들의 끊임없이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물의 환수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수집가들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국제사회가 소장품에 대해 엄격한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세웠습니다. 과거 내력(Provenance) 공포 의무로 수집품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짐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 시대, 당시 알고 싶어 했던 유산의 정보는 충분히 축적하였고 이제 한국은 개방국가로 언제든지 필요한 정보를 구할 수 있습니다. 소장자들의 세대교체도 큰 이유입니다.  
 
수집가들은 사후 기증을 대부분은 공공기관을 선택하였습니다. 플랑시가 수집한 조선의 유물은 프랑스 곳곳으로 나뉘어 보관되어 있습니다. 알렌이 수집한 유물은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있고 샤를 바라의 수집품은 국립기메박물관에 있으며 아사미 린타로가 수집한 고서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 있습니다. 
 
최근 해외로 나간 유물 중에 일부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알렌이 수집한 명성황후의 ”화조도접선“이 돌아왔고, 칼 안드레아스 볼터 수집한 ”해상군선도10폭 병풍“이 돌아왔습니다. 베버 신부가 수집한 ”겸재 정선의 화첩“의 귀환이 큰 계기였음은 두고두고 평가할 일입니다.  
 
이제는 더욱 적극적으로 개인 소장자들의 수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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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천문대 방문 조사를 마치고,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12-05 09:00   |  수정일 : 2018-12-0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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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이상근 재단법인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대한불교조계종중앙신도회 사무총장
사단법인 날마다좋은날 상임이사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실행위원장
서울시문화재찾기시민위원 등 역임

(현)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
(현)명원문화재단 이사
(현)재단법인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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