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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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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들의 영원한 이상(理想), 정통칼리파 시대

⊙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 사망 이후 ‘사도의 대리자’ 칼리파 시대 열려… 초기 4명을 ‘라시둔(하나님이 올바르게 인도한 대리자들)’으로 존경
⊙ 4명의 라시둔(아부 바크르, 아부 우마르, 우스만, 알리)는 협의회에서 선출… 혈연보다 신앙 중시
⊙ 마지막 정통칼리파 알리 피살 후 우마야 왕조 수립… 이후 현대까지 세습과 독재 악순환 계속돼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 천사들과 네 명의 라시둔에 둘러싸여 있는 무함마드. 14세기 초의 그림이다.
이슬람교 신자, 즉 무슬림들은 창조주 하나님(알라)이 만든 최초의 인간 아담을 인류 최초의 예언자로 간주한다. 아담부터 시작한 예언자 계보는 유대·그리스도교 성서에 등장하는 유수한 인물들로 이어져,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성(神性)을 지닌 인간으로 여기는 예수 역시 예언자라고 한다. 물론 무슬림들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인성(人性)만을 지닌 인간이라고 본다.
 
  이처럼 아담에서 예수까지 이어진 예언자 전승의 마지막에 무함마드가 자리한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보낸 마지막 예언자가 바로 무함마드라고 믿는다. 무함마드 이후 더 이상 예언자는 나오지 않는다.
 
  벽돌집에 비유하자면 예언자라는 집을 완성하는 마지막 벽돌이 무함마드다. 시간적으로는 가장 늦게 출현했지만, 그가 없으면 예언자 전통이 완성되지 않는 것이니, 무함마드는 예언전승을 집대성한 위대한 인물이다. 아랍어로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카탐 알안비야’, 즉 ‘예언자의 봉인(封印)’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란의 혁명수비대에서 즐겨 쓰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슬람에서 이단으로 여기는 자는 바로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에도 예언자 전통이 이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632년 무함마드가 병으로 죽은 후 무슬림 공동체는 큰 충격에 빠졌다. 예언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다.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듯, 오랜 동료이자 2년 후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 우마르는 하나님의 사도(무함마드)가 죽지 않았고, 이슬람이 모든 다른 종교를 지배할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며 무함마드의 죽음을 부인했다. 이에 아부 바크르는 충격에 빠진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자들이여, 무함마드는 죽었다. 하나님을 숭배하는 자들이여, 하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신의 무한성(無限性)에 비추어 예언자의 유한성(有限性)을 강조하며 공동체의 동요를 수습했다.
 
 
  ‘사도의 대리자’
 
무함마드의 죽음. 그가 죽은 후 무슬림 공동체는 협의에 의해 칼리파를 선출했다.
  그렇다면 최후의 예언자가 남기고 간 무슬림 공동체는 예언자 없이 어떻게 신앙을 수호하며 존속할 수 있었을까? 더 이상 예언자가 나오지도 않는 상황에서 예언자를 대리하는 지도자가 무슬림들을 이끌었다. 이러한 지도자를 ‘칼리파’라고 불렀는데, ‘하나님의 사도의 대리자’라는 뜻을 지닌 ‘칼리파 라술 알라’의 줄임말이다. 특별히 처음 4명의 칼리파를 후대의 칼리파와 구분하여 라시둔(하나님이 올바르게 인도한 대리자들)이라고 부르고 존경을 표한다. 우리말로는 라시둔을 정통(正統)칼리파라고 한다. 이슬람을 정치적 원리로 삼는 근본주의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무슬림들은 예언자와 이 4명의 칼리파들이 다스린 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시기로 여겨 오늘날에도 재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면 라시둔 시대는 후대와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오늘날 무슬림 세계는 거의 예외 없이 절대왕정 내지 독재공화정의 정체를 유지하고 있다. 절대왕정은 말 그대로 왕의 권한을 헌법이 제한하지 못하니 왕의 말이 곧 법이다. 후계자 역시 왕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공화정에는 왕이 없지만, 사실상 공화정 수반이 왕처럼 군림하기에 현대 무슬림 세계에서 왕정과 공화정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화정을 채택한 이집트나 시리아에서 보듯, 한번 권좌에 오른 대통령은 죽어서야 물러난다. 이집트의 무바라크가 아랍의 봄 시위에 물러난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후계자 선정도 왕정과 다를 바 없어 시리아의 경우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에 이어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좌를 이어 가고 있다. 공화정 부자세습이다. 북한처럼 말이다.
 

  이렇듯 권력을 세습하는 전통은 사실 정통칼리파 시대의 것이 아니다. 정통칼리파들은 모두 무함마드와 같은 꾸라이시 부족 출신이긴 했지만 형제나 부자(父子) 관계도, 같은 집안 출신도 아니었다. 사실 무함마드가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혈연 중심의 아랍사회를 신앙 중심의 이슬람사회로 변환한 것이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무함마드 사후(死後)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는 비록 꾸라이시 부족에서 나오긴 했지만, 칼리파 4명 모두가 친족으로 엮이지는 않았다.
 
포로가 된 족장의 딸을 풀어주는 무함마드(오른쪽 불꽃 형상). 가운데가 그의 아내 아이샤다.
  먼저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가 예언자 소명을 받았을 때부터 함께한 오랜 동료로, 무함마드가 메카 사람들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할 때에 유일하게 동행한 사람이었다. 무함마드보다 세 살 어린 것으로 알려진 아부 바크르는 메디나로 이주하기 전 상처한 무함마드가 여섯 살 된 자신의 어린 딸 아이샤를 아내로 맞는 것을 허락했다. 둘의 혼인은 623년 또는 624년에 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때 아이샤의 나이는 약 10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부 바크르는 이로써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 됐다.
 
 
  ‘이슬람의 바울로’ 아부 우마르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장인으로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파가 됐다.
  무함마드 사후 아부 바크르가 첫 번째 칼리파가 된 것은 그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칼리파가 된 우마르의 힘이 컸다. 무함마드가 살아 있을 때 무함마드를 대신하여 예배를 이끌 정도로 그의 위상은 높았지만, 무함마드가 죽자 메카에서 이주한 무슬림들을 도왔던 메디나의 무슬림 조력자들은 자신들 중에서 지도자를 옹립하려고 했다. 이에 우마르가 설득하여 아부 바크르가 첫 번째 칼리파가 됐다. 공동체 지도층이 합의한 결과다. 아부 바크르는 부유함을 마음에 두지 않고 소박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후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아부 바크르가 2년간 칼리파로 공동체를 이끌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우마르를 후계자로 옹립하라는 유언을 훗날 세 번째 칼리파가 된 우스만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부 바크르의 뜻에 따라 두 번째 칼리파가 된 우마르는 원래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메카 사회에 분열을 조장한다고 싫어하며 이슬람 운동을 막았던 사람이다. 그의 여동생과 매제가 무슬림이 됐다는 것을 알고 불같이 화를 냈던 우마르는 여동생 집에서 흘러나오는 코란 낭송에 매료되어 무슬림이 됐고, 이후 이슬람 보호와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스도교의 사도 바울로처럼 박해하는 자에서 선교하는 자로 극적인 전환을 했기에 우마르를 ‘이슬람의 바울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부 바크르와 마찬가지로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다. 무함마드는 과부가 된 우마르의 딸 하프사를 네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우마르 또한 수수하고 검소한 삶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게다가 화도 벌컥 잘 냈다. 무슬림 장수들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던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전승에 따르면 637년 무슬림군이 점령한 예루살렘에 우마르는 낙타를 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서 들어가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복자라면 압도적인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웅장한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입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소박한 우마르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우마르, 이슬람 분열의 단초 마련
 
  무슬림들은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지도자의 권위가 무력(武力)이 아니라 질박한 삶의 양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은 무함마드 사후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 주역들이었다. 사실 학자들은 무함마드 생전에도 이들이 공동체 운영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조금 과장된 용어로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가 삼두(三頭)정치를 했다고 보는 시각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아부 바크르보다 우마르의 역할이 더 컸던 것 같다. 아마도 무함마드가 “하나님께서 나 다음으로 예언자를 내신다면 그건 우마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무슬림 전승 기록은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그러나 순니와 달리 시아 무슬림들은 우마르가 알리와 예언자 집안 사람들을 제대로 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우마르에 대한 적의(敵意)를 숨기지 않는다.
 
  우마르는 모스크에서 바스라 총독의 그리스도교인 노예의 칼에 찔려 죽었다. 그는 죽기 전 침상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뽑을 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가 차기 지도자로 특정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협의회는 우스만을 세 번째 칼리파로 낙점했다.
 
  우스만은 이슬람을 반대한 우마야 가문 출신이지만, 이슬람 운동에 참가했고, 무함마드의 둘째 딸 루까야를 아내로 맞았으며, 루까야가 죽은 후에는 셋째 딸 움 쿨숨과 부부의 연을 맺어 무함마드의 겹사위가 됐다. 우리의 가족 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아 전승은 우스만의 두 아내가 모두 예언자의 딸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부유한 상인 출신이었지만 소박했던 우스만의 칼리파 즉위와 함께 초기 무슬림 공동체에 분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스만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자신이 속한 우마야 가문 사람들을 요직에 중용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나치게 독립적인 총독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친족에 의존하는 인사는 환영받지 못했다. 무슬림 전승은 우스만 집권 12년을 선정(善政) 6년, 실정(失政) 6년으로 나누어 본다. 전승에 따르면 7년째 되던 해 우스만이 에언자의 인장을 잃어버렸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이라크에서 경제난과 반란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집트의 경우 경제적 어려움이 더해지면서 우스만이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부(富)를 제대로 분배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었다. 우스만의 친족등용으로 권력에서 소외된 인사들이 반란의 불씨를 키우면서 결국 이집트 반란군이 메디나로 몰려왔다. 우스만은 이들을 잘 달래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우스만이 이집트 총독에게 보낸 서신을 지닌 전령이 귀환하던 반란군에 잡혔다. 편지에는 반란군이 이집트에 도착하면 처리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격노한 군인들이 다시 메디나로 발길을 되돌렸고, 서한이 위조됐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스만을 살해했다. 12년에 걸친 우스만의 칼리파직은 656년에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낙타의 전투’와 시핀전투
 
‘낙타의 전쟁’은 무함마드의 미망인 아이샤(왼쪽)와 제4대 칼리파 알리 간의 싸움이다.
  우스만 살해라는 혼돈의 시기에 알리가 네 번째 칼리파로 선출됐다. 우스만을 죽인 이들이 알리를 지지한 것은 우스만의 죽음을 알리가 사주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알리는 당시 메디나에 있던 무슬림들의 선택을 받았기에 우스만을 죽인 이들만의 지지에 힘입어 칼리파가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우스만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우스만 친족들에게 알리는 공적(公敵)이 됐다. 더욱이 알리는 예언자의 아내 아이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인 알리는 그의 네 번째 딸 파띠마를 아내로 맞아 무함마드의 사위이기도 했다. 나이는 알리가 약 10살 정도 더 연상이지만 아이샤는 알리의 장모다.
 
  알리와 아이샤의 관계가 왜 나빴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따르면 아이샤가 무슬림군과 함께하던 중 뒤처져 일행과 떨어졌고, 다음 날 젊은 병사가 아이샤를 찾아 나타난 사건으로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횡행하자 알리가 무함마드에게 이혼을 권했다고 한다. 물론 둘은 헤어지지 않았다. 아이샤가 부정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코란 계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한 알리를 아이샤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리는 칼리파가 되자마자 아이샤를 중심으로 한 반군의 도전에 직면했다. 656년 바스라에서 아이샤가 탄 낙타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알리의 군대가 승리했다. 알리는 패배한 아이샤를 정중하게 대했다. 이후 아이샤는 정치적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 아이샤가 탄 낙타 주변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고 해서 역사는 이를 ‘낙타의 전투’라고 부른다.
 
제4대 칼리파 알리의 군대와 제3대 칼리파 우스만의 지지자들은 657년 시핀에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우스만의 친족으로 우스만의 죽음을 복수하겠다는 의욕에 불타며 알리에게 책임을 묻고 있던 당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반란의 깃발을 다시 들었다. 657년 양측 군대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지역인 유프라테스 강가 시핀(Siffin)에서 격돌했다.
 
  무아위야는 영리했다. 그의 군대는 창끝에 코란을 꽂아 중재를 요청했다. 무슬림의 피를 흘리기를 꺼렸던 알리는 이를 받아들여 중재가 시작됐다. 그러나 알리의 추종자들 중 일부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판결을 내릴 수 있다. 믿는 자들이 싸울 때는 화해해야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경우에는 끝까지 싸우라”고 한 코란 49장 9절을 근거로 들면서, 반란자 무아위야측의 중재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반대했다. 결국 이들은 알리의 진영에서 이탈했다. 이들을 ‘카와리즈’라고 하는데, ‘떠난 자들’이라는 뜻이다. 알리측은 카와리즈를 응징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카와리즈는 661년에 알리를 살해했다. 이로써 정통칼리파 시대는 막을 내렸다.
 
 
  황금시대를 그리는 무슬림들
 
제4대 칼리파 알리가 암살되면서 정통칼리파 시대는 끝났다.
  우스만의 친족등용 실정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정통칼리파 시대는 우스만 살해 후 알리가 칼리파가 되면서 낙타의 전투, 시핀전투를 거쳐 알리 살해라는 일련의 비극적인 내전의 혼란을 겪었다.
 
  알리 사후 알리 진영은 그의 아들 하산이 잠시 이끌다가 무아위야와 평화협정을 통해 무아위야에게 무슬림 공동체 지도자 자리를 양도했다. 이로써 우마야 칼리파조가 개창됐다. 우마야 칼리파조는 정통칼리파조와 달리 세습으로 칼리파 자리가 이어졌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혈연 중심의 아랍 사회를 신앙 중심의 공동체로 바꾸었고, 정통 칼리파 시대는 이를 이어 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다시 혈연이 신앙을 눌렀다.
 
  우마야 칼리파조 이래 무슬림 세계의 정치 현실은 세습과 독재의 연속이다. 그래서일까. 선출과 협의를 중시했던 정통칼리파 시대를 무슬림들은 이상적인 황금시대를 그리워한다. IS가 내거는 명분도 ‘칼리파 국가’의 재건이다. 극악한 전체주의 신정(神政) 체제를 지향하는 IS는 얘기할 가치도 없지만, 그래도 칼리파 제도는 그 정신만 제대로 살린다면 훌륭한 정체(政體)가 될는지도 모른다. 칼리파 시대에도 물론 질투와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때에는 지도자를 협의하에 뽑을 수 있었고, 그렇게 선출된 지도자는 부귀한 지위에 올랐어도 소박한 삶을 살았다. 세습과 독재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그 와중에 무고한 국민들이 죽어 나가는 지금보다는 그때가 나았다고 말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05-0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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