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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신립의 패전은 일본의 군사동향에 무지했던 정보전의 패배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18〉 뎃포(鐵砲)가 운명을 바꾼 두 개의 전투

⊙ 신립의 8000 기병, 탄금대에서 일본의 조총 부대에 전멸
⊙ 오다 노부나가, 나가시노에서 3000명의 뎃포부대로 일본 최강 다케다군 기병부대 제압
⊙ 신립의 패전은 동시대 일본의 군사동향에 무지했던 정보전의 패배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글 | 신상목 (주)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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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왼쪽)는 기병대를 막기 위한 마방책을 치고 뎃포부대를 앞세워 다케다군의 기병대(오른쪽)를 완패시켰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으로 조선 침략의 선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은 상륙과 함께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일거에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한다.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지나 불과 2주 만에 충주에 도달한 일본군은 삼도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이끄는 조선의 주력군과 맞닥뜨린다. 양측은 이곳에서 전쟁 초기의 향방이 달린 물러설 수 없는 결전을 벌인다. 소위 탄금대 전투이다.
 
  조선 조정은 북방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신립에게 왜적 격퇴의 기대를 걸었다. 선조가 직접 나서 군주의 상징인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고 군무(軍務)에 관한 전권을 신립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4월 28일의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8000 병사(《징비록》 기록)는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패했고 신립도 군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졌다.
 
  신립이 배수(背水)의 진(陣)을 치며 주력 부대를 남김없이 투입한 결전의 패배는 뼈아팠다. 한양 사수의 관문인 충주가 함락되자 도성까지의 길이 무방비 상태로 뚫리는 지경에 처했고, 임금과 중신들은 허둥지둥 도성을 빠져나와 피신을 가야 했다. 분노한 백성들은 궁성에 불을 지르고 백성을 저버린 지배층을 원망했다.
 
 
  조총으로 기병 무력화(無力化)
 
  탄금대 전투의 패인(敗因)은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신립이 방어에 유리한 산악지형의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 일대의 평지를 전장으로 삼은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지적한다. 신립은 기병전의 권위자였다. 자신의 장기인 기병 전법을 이용해 적을 패퇴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을 제압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전법이 일본군에게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신병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주위의 만류와 권고에도 불구하고 신립은 완고했다. 신립은 조총의 위력에 대해 “쏘는 대로 그것이 다 맞는다더냐?”고 반문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신립은 조선의 궁기병(弓騎兵)이 보병 중심의 일본군보다 전력(戰力)상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군과의 결전에 나선 신립의 조선군은 정예 기병을 주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병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지를 전장으로 택한 것은 어찌 보면 합리적 선택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일본군이 이미 조선의 기병을 무력화(無力化)할 수 있는 전술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마병의 최대 강점은 기동력과 돌파력이다. 적이 보유한 무기의 최대 사거리 언저리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마상(馬上) 활쏘기로 적의 예봉을 꺾은 후, 단숨에 전선을 돌파하여 적진을 교란시키고 진영을 붕괴시키는 것이 조선 기병의 전법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전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한 솔루션을 예비하고 있었다. 약체로 위장한 중앙군을 전면에 내세우고 좌우에 주력군을 매복시킨 다음, 조선의 기병을 방심시켜 깊숙이 끌어들이고는 3각 화망(火網)을 형성하여 집중 사격함으로써 조선 기병을 제압하였다. 정예병인 기병이 제압되자 급조된 나머지 보조군은 그저 살육전의 사냥감 신세에 불과했다.
 
  조선 기록에 의하면 탄금대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4명이라고 한다. 일본 문헌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15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조선군의 완패였다.
 
  세상 모든 일은 지나고 나서 보면 쉬워 보이는 법이다. 조령이 아닌 탄금대를 택한 신립의 판단 또한 그 당시 그 현장에 서 보지 않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후세 역시 조상의 실책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쉬우나, 교훈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그 교훈의 피상이 아니라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같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말란 법이 없다. 신립의 판단을 한 개인의 자만심 또는 무모함으로 환원하여 교훈을 찾으려 한다면 별다른 쓸 만한 교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개인의 능력은 통제할 수 있는 변인(變因)이 아니다.
 
  탄금대 전투의 교훈은 ‘국가로서의 조선의 안보 태세’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본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이다. 승리의 첫 번째 요건인 ‘지피’는 현대전으로 말하면 ‘정보전’이다. 정보력이 열세인 전장에서 승리를 바라는 것은 전쟁을 운에 맡기는 것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이 가장 취약한 것은 정보전이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전황(戰況)에 반영되었다. 탄금대 전투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다 노부나가 vs. 다케다
 
오다 노부나가는 뎃포부대를 앞세우는 군사상의 혁신을 단행했다.
  탄금대 전투 이전에 일본에서는 탄금대 전투와 매우 유사한 전투가 벌어진 적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의 고삐를 바짝 당기는 계기가 된 ‘나가시노 전투(長篠の合戰)’이다.
 
  1573년 천하통일을 놓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자웅을 겨루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급서한다. 신겐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反)노부나가 동맹의 견제로 천하통일 행보에 제동이 걸렸던 노부나가는 차례차례 반대세력을 제압하면서 승기를 확고히 할 기회를 모색한다. 다케다군을 꺾는다면 천하통일의 8부 능선을 넘을 수 있다.
 
  노부나가는 다케다군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신겐의 뒤를 이은 가쓰요리(勝頼)는 다혈질의 젊은 무장이었다. 다케다군은 당시 막강한 기마군단의 최강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부친이 물려준 군사적 유산의 강성함에 큰 자긍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가쓰요리는 신겐 사후(死後) 동맹세력의 동요를 막고 신겐의 후계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부나가와의 한판 승부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양측의 결전을 향한 의지가 맞부딪친 곳이 미카와(三河の國 ; 지금의 아이치·愛知현)의 나가시노이다.
 
  나가시노는 본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소령(所領)이었으나, 1571년 신겐이 탈취했다가 1573년 이에야스가 다시 차지하면서 양측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섬광 지역(flash point)’이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연합세력의 일원이 되어 다케다가에 대한 협공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가쓰요리는 눈엣가시 같은 이에야스를 선공(先攻)의 타깃으로 선택한다. 1575년 가쓰요리는 1만5000의 정예군을 이끌고 미카와 침공에 나선다. 다케다군의 나가시노성(城) 포위 소식을 접한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도 각각 3만 및 8000의 군사를 동원해 나가시노로 출정한다. 나가시노성 인근에 위치한 시타라가바라(設楽原)에서 대치하게 된 두 진영은 운명을 건 결전에 돌입하는데, 그 결과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뎃포부대를 주(主)전력화
 
다케다 가쓰요리.
  노부나가는 다케다군과의 결전에 대비해 두 가지의 비책을 궁리해 두었다. 첫째는 뎃포(鐵砲·조총)부대의 주(主)전력화이고, 둘째는 마방책(馬防柵)의 도입이었다.
 
  전투 초기 중장기병이 적진을 돌파하여 기선을 제압하면 후방의 보병이 백병전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다케다군의 전법이었다. 이에 따라 다케다군은 기병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지를 전장으로 선호하였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적의 승리 공식을 역으로 이용하였다. 노부나가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인 3000정의 뎃포를 확보한 후, 사수병을 5개 부대로 편제하여 주력부대로 삼았다. 뎃포 사거리 내로 적 기병을 깊숙이 유인한 후 마방책으로 군마의 기동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마방책 배후에 배치된 뎃포 사수들이 집중 사격을 가해 기병을 제압하는 전술이 고안되었다. 후자(後者)의 집중사격법은 세계 최초의 ‘3단쏘기’(三段撃ち·volley fire ; 사수를 3열로 배치하여 사격과 장전을 교대로 행함으로써 사격 간 인터벌을 최소화하는 방식)로 알려졌으나, 이는 후세의 추측일 뿐 정확한 방식에 대해서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대량의 뎃포를 동원하여 부대를 편제하고 마방책과 연동된(현대로 치면 화망 형성 사격술에 해당하는) 집중 사격 방식을 고안한 것만으로도 뎃포 전력화에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발전으로 평가된다.
 
  전투가 개시되자 다케다군의 기마병이 바람같이 내달려 적진 앞에 도달하지만, 방책에 막혀 놀란 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방책 뒤에 늘어선 뎃포가 불을 뿜었다. 당대 최강 기마군단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총탄 세례 속에서 속절없이 스러져 갔다. 중앙 선봉대의 돌파가 좌절되자 우측 2번대, 좌측 3번대가 차례차례 돌격해 나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불과 8시간의 전투 끝에 다케다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퇴한다.
 
  다케다 진영에는 역전의 명장들이 많았다. 이들은 개전 전부터 노부나가의 유인계(誘引計)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군에게 재삼 숙고와 자제를 요청하였으나, 젊은 혈기의 가쓰요리가 이를 뿌리치고 원정을 감행했던 터였다. 다케다가는 나가시노 전투로 인해 주력 전투부대를 완전히 상실하는 회복불가의 타격을 입고 패잔(敗殘)의 길을 걷게 된다.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강함만을 믿고 행동에 나선 가쓰요리는 그 대가를 멸문(滅門)으로 치렀다.
 
 
  ‘등자 명제’
 
방책 뒤에서 뎃포를 쏘는 병사들. 뎃포의 등장은 일본의 전술을 전면적으로 변화시켰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의 전쟁 양상을 일거에 바꿔 놓았다고 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는 널리 알려진 전투였다. 뎃포의 등장으로 기존에 필승 전력으로 인식되던 기마병의 중요성과 유용성이 재(再)정의되고, 전쟁의 승리 공식 자체가 뎃포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역사학계에는 ‘등자 명제(Stirrup Thesis)’라는 것이 있다. 일찍부터 등자가 발달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달리 유럽에는 8세기가 되어서야 등자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타운센드 화이트는 등자의 등장이 8세기 이후 유럽 역사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등자 명제’라고 한다. 화이트는 등자의 사용으로 인해 장창(長槍)과 충격법을 주무기로 하는 중장기병(重裝騎兵)이 등장하였으며, 전장에서 활약이 큰 이들이 왕과 봉신 계약을 맺은 기사(knight)계급으로 성장하여 유럽이 봉건체제로 이행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이에 대해서는 기술결정론이라는 비판과 반론이 제기되고 있고, 화이트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의 주장을 계기로 등자에 관심이 모아지면서 등자가 유럽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가설(假說)은 8세기가 아닌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훈족의 대침략 시 유럽이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던 것은 그들의 궁기병이 등자를 사용함으로써 유럽인들에 비해 안정된 마상 전투를 할 수 있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으로) 등자의 존재로 인해 기마병을 양성하는 시간이 단축되어 훈족이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설의 핵심이다. 즉 등자가 없던 시절에는 숙련된 기마병을 양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기마병 손실은 단기간 내에 메울 수가 없어 기마병을 주력으로 하는 전력 구성이 어려웠으나, 등자의 등장으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기마병의 명실상부한 주전력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무뎃포’
 
  등자 가설이 얼마나 적확(的確)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꿰뚫어 본 뎃포의 가능성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당시 주전력인 기마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수년의 집중적 훈련과 기술 연마가 필요하였지만, 뎃포의 경우는 불과 몇 달의 훈련으로도 기마병을 제압할 수 있는 전력으로서의 활용이 가능하였다. 나아가 군비(軍費)의 면에서도 당시 뎃포가 매우 비싼 무기이기는 했지만, 군마를 사육·조련하여 전장에 동원하는 것에 비하면 비경제적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노부나가는 사카이(堺)와 구니토모(國友) 등 뎃포 주생산지를 우선적으로 손에 넣고 자원을 투입하여 뎃포 대량생산에 나서는 한편, 일자리가 없어 빈둥거리는 젊은 청년들을 대거 모집하여 뎃포 사수로 양성하였다. 그 결과 불과 3개월 훈련받은 아시가루(足輕·최말단 병사 계급)가 발사한 총탄에 10년을 전장에서 누빈 베테랑 기마 무장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핵심 전력의 개념 전환을 맞아 전쟁의 양상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뎃포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 되었다. ‘무뎃포(無鐵砲)’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앞선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나가시노 전투와 탄금대 전투는 교전자 간의 전력과 전술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만약 조선이 일본의 동향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알고자 했다면 나가시노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문헌 어디에도 그러한 정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립의 언행을 보아도 나가시노 전투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추측하기 어렵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신립이 뎃포와 방책(防柵)을 활용한 기병 무력화 전법이 일본에서 개발되었고, 일본군이 그러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판단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000년 전 중국의 전쟁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는 조선의 지배층이었지만, 스스로 한 수 아래의 야만국으로 규정한 일본에 대해서는 동(同)시대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터럭만큼도 알려 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탄금대 전투의 패인이 달리 있을까 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03-26 08:54   |  수정일 : 2018-03-2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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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 전 외교관/일식당 운영

1996년 제 30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무부에 근무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핵안보정상회의 의전과장 등 주요보직을 역임했다. 2012년 일식 우동에 반해 외무부를 퇴직하고 현재 기리야마 우동집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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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필  ( 2018-03-26 )  답글보이기 찬성 : 10 반대 : 1
선조는 임진왜란 전에 대마도주가 선물한 조총과 신립의 화살쏘기 기술 시연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조총은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신립이 세발을 과녁에 마치는 동안 재장전도 하지 못하는 걸 보고 시덥잖은 조총이라고 여기며 자신만만해했다. 재장전없이 1파가 쏘고 2파가 쏘고 3파가 쏘아대는 전술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결과 선조는 망명하려했고 신립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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