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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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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50)]
신라 선종(禪宗)의 도입과 유행에 대한 참으로 다양한 교과서 서술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글 |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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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종의 상징적인 조형물 중의 하나인 승탑 - 여주 고달사지 소재

우리나라 불교에서 선종(禪宗)은 경전에 의존하던 교종(敎宗)과 달리 참선(參禪)이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한 것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함), 교외별전(敎外別傳:교법 외에 따로 전하는 것), 직지인심(直指人心: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킴), 견성성불(見性成佛:깨달음이 열리고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것)을 4대 종지(宗旨)라 한다. 이러한 선종의 도입과 유행에 대한 교과서의 서술이 다양하다.
 
동아출판
9세기 전반에는 경전보다는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선종이 들어왔다.(44)
지학사
신라 말에는 중국에서 선종이 들어와 교종과 다른 유파를 형성하였다. 중략헌덕왕 때 도의가 당에서 돌아오면서 통일 신라에 선종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67)
교학사
신라 중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9세기 초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다.(47)
미래엔
선종은 교리와 계율을 중시하는 교종과 달리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불교이다. 통일 무렵에 전래되었으나 화엄종 등 교종의 위세에 눌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신라 말부터 크게 유행하였다.(50)
금성출판사
신라 말에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다.(75)
비상교육
신라 말기에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여 교종인 화엄종과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였다.(58)
천재교육
통일 신라 말기가 되면 선종이 널리 확산되었으며, 화엄종도 선종과 함께 발전하였다.(55)
리베르스쿨
신라 하대에는 경전의 이해를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과 달리 실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선종이 널리 퍼졌다.(66)

이를 다시 『삼국사기』에서 무열왕(재위 654~661)부터 혜공왕(재위 765~780)까지를 중대, 선덕왕(재위 780~785)부터 경순왕(재위 927~935)까지를 하대라고 한 시대 구분에 따라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676년이니 중대로, 신라 말은 하대로 통일하였다.

동아
지학사
교학사
미래엔
금성
비상
천재
리베르
도입
하대
하대
중대
중대
 
 
 
유행
 
하대
하대
하대
하대
하대
하대
하대


한편, 선종 도입과 관련하여 『신편한국사』에는 신라에 ‘선종이 도입된 것은 도의(道義)에 의해서였다.’고 하였으며,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아래와 같이 도의의 재제자(再弟子)인 염거(廉居)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3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무르다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선법(禪法)을 펴고자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제자 염거(廉居)에게 남종선을 전하고 죽었다. 염거의 제자 체징(體澄)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세워 크게 선풍을 떨쳤다. 그런데 이 때 도의를 제1세, 염거를 제2세, 자신을 제3세라고 하여 도의를 가지산파의 개산조로 삼았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의(道義)>

이 둘을 종합하면 신라 하대 당에 머무르던 도의가 9세기 초인 821년에 귀국하면서 선종을 도입하였으며, 그의 재제자인 염거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 가지산파를 세우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는 것이다. 신라 하대에 도입되고 또 하대에 유행했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지학사의 서술이 가장 근사(近似)한 것처럼 보이나 다소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다. 교과서 서술대로라면 본래 선종이 있었는데 도의의 귀국을 계기로 성행하기 시작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라 중대에 도입되었다고 한 교학사와 미래엔의 서술이 오류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해당 분야를 서술할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다양한 서술의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서로 다른 내용을 배운다는 점에 있다. 이것을 가지고 과연 역사 인식의 다양성이라 할 수 있을까? 획일적 역사교육을 지양하는 이상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
 
가령, 여덟 종류의 신발을 갖다놓고 한 아이더러 모두 신어보게 한다면 각각의 신발에 대한 서로 경험을 하고 또, 그 느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덟 종류의 신발을 여덟 명의 아이들에게 각각 한 켤레씩 나누어 준다면 아이들은 각자가 신어본 신발에 대해서만 느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나 역사학자들이 주창(主唱)하고 있는 역사 인식의 다양성이란 구호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교과서가 다양해도 학교에서 정해준 하나의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서 역사 인식의 다양성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전문가조차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다양한 역사 인식’이라는 허황된 주장을 하고 있으니 우리의 역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01-05 15:07   |  수정일 : 2018-01-0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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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

국사교과서연구소장
전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학사/석사/박사수료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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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꽃  ( 2018-01-07 )  답글보이기 찬성 : 2 반대 : 4
참 안타까운 현실이네요
김경영  ( 2018-01-06 )  답글보이기 찬성 : 4 반대 : 1
참 답답하고 한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정말 좋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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