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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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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31)]
고종의 사라진 10년과 흥선 대원군(4)- 흥선 대원군은 서원 철폐의 실무 책임자였을 뿐이다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글 |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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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화양동에 있는 만동묘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흥선 대원군은 의정부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합법적 지위에 있지 않았다. 만약 흥선 대원군이 조정 대신들에게 공식적인 명령을 내렸다면 그러한 통치 행위는 『승정원일기』나 『고종실록』에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존재할 수도 없다. 흥선 대원군은 그런 명령을 내릴 지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 역사 교과서는 고종 초기 10년 동안의 통치 행위가 모두 흥선 대원군의 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서원 철폐도 그 중의 하나다. 이러한 서술 기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한국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도 서원을 정리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집권 직후에는 과다하게 설립된 서원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고종 원년 7월에 대원군은 전국 서원과 향현사를 엄밀히 조사시키는 한편 그 존폐문제를 검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신편한국사』>
 
1863년 고종 즉위를 흥선 대원군의 집권으로 설정하고 이전부터 서원 정리에 대한 복안을 가지고 있던 흥선 대원군이 집권 직후인 고종 1년(1864) 7월에 전국의 서원과 향현사(鄕賢祠)를 조사하여 존폐 문제를 검토하도록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흥선 대원군에게 ‘집권(執權)’이나 ‘명령을 내렸다’와 같은 표현은 부합하지 않는다. 흥선 대원군은 불법・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합법적 권력 행사로 인식되는 집권이라는 용어와 의정부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서술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서원이나 향현사를 설립한 것은 혹은 도학(道學)이나 절의(節義), 혹은 공훈이 있거나 업적이 있어서 세운 것으로 후세 사람들의 존경과 사모에서 나온 것이다. 법대로 시행하였거나 훈로(勳勞)가 정해졌거나, 부지런히 일하여 변란을 막은 사람에 대해서는 실로 제사를 지내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첩설(疊設)이나 사설(私設)을 금지시키는 제도가 있는 것은 외람되게 함부로 세우는 폐단을 염려해서이다. 이런 금령을 무시하고 사당이나 서원을 세우는 것이 근래에 들어와서 더욱 심해졌는데, 한정(閒丁)들이 투탁해 들어가고 잡류가 그곳을 빙자하여 백성들과 고을에 폐해를 끼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철저히 바로잡기 위하여 성책(成冊)하여 올려 보내라고 여러 차례 명령하였다. 지금 비록 여러 도에서 일제히 올라왔지만 자세함과 소략함이 일정치 않다. 대체로 중첩된 것은 줄이고 사사로이 설치한 것은 없애야 할 것을 지금 잘 헤아려서 조처해야 하는데, 너무 허술하게 만든 성책은 상고할 자료로 이용하기가 어렵다. 묘당(廟堂)에서 예조(禮曹)에 있는 문건을 참고하거나 혹은 다시 해도(該道)에 관문을 보내 상세하게 보고하도록 해서 충분히 상의하고, 이어서 예제(禮制)를 가지고 존속시킬 것인지 훼철할 것인지를 구획하여 정하는 것을 한결같이 법도에 부합시켜서 속히 품정(稟定)하여 시행함으로써 번잡하거나 어지러운 폐단이 없게 하라."<『승정원일기』, 1864. 7. 27>
 
이 기록에서 우리는 서원의 존폐 여부가 흥선 대원군의 명령이 아닌 대왕대비의 전교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 서원을 철폐해야 한다는 논의는 고종 때 처음으로 불거진 문제가 아니다. 인조 때인 1644년 영남 감사 임담의 상소에서 처음 제기된 서원 문제는 효종과 현종 연간을 거치면서 간헐적이나마 서원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가 이어지다가 숙종 때가 되어서야 서원 남설(濫設)에 대한 적극적 제제가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조 때가 되면 서원 건립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립이 금지되자 서원 대신 사우(祠宇)라는 이름으로 건립이 성행하였다. 특히 동일 인물을 제향하는 첩설(疊設)의 경우가 심각하여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은 전국에 44개 소(사우 포함)나 되고, 10개 소 이상의 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1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서원 남설은 차츰 학덕이 뛰어난 유학자를 배향한다는 본래의 건립 취지에서 벗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나 선정을 한 수령을 배향하는가 하면, 심지어 문중에서 추향(追享)하는 사례도 빈번하여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에 영조는 1741년(영조 17)에 19개의 서원을 포함하여 모두 173개 소의 사원(祠院)을 훼철하였다. 이후 서원의 남설은 다소 주춤하였으나 대민 착취와 서원의 부패로 인한 새로운 사회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폐단으로 화양동 서원의 묵패(墨牌)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서원의 폐단을 인식하고 있던 대왕대비 조씨는 고종의 즉위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이의 시정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각 읍에 있는 서원에 대한 실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의정부에서는 예조에 있는 서원 관련 문건을 참고하거나 지방의 보고서를 살펴서 존폐의 기준을 정하여 폐단을 없애도록 하라는 것이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의해 서원 철폐가 단행되었음은 이처럼 『승정원일기』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華陽書院) 철폐에 관한 서술이다.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확고해지자 고종 2년 3월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명령을 내렸다. 서원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배향한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이었으며,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중국 명나라의 신종(神宗), 의종(毅宗)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만동묘였다.<『신편한국사』>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낸 명의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1869년 우암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사당을 세워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낼 것을 유언(遺言)하자 1703년 민정중 등에 의해 건립된 후 1776년 정조가 어필로 사액(賜額)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봄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로 하여금 정식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 만동묘는 유생들의 집합 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 심각해졌다. 이에 1865년(고종 2)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므로 사적으로 제사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의 지방(紙榜)과 편액(扁額)을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기고 만동묘의 향사(享祀)를 정지하도록 하였다. 이와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아! 선정(先正) 송시열은 우리 효종 대왕과 공덕을 같이한 신하이다. 큰 의(義)를 붙잡아 우주에 펼쳤으니 이 나라의 백성들이 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면하게 된 것이 누구의 공로이겠는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사무친 통한이 가슴에 맺힌다는 말을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에 수제자(首弟子)를 향하여 남겼던 것은 모두 부득이한 고심에서 나온 일이었다. 이것이 만동묘(萬東廟)를 설치하게 된 유래이다. 그런데 숙종과 영조의 시대로 내려오면서 천자(天子)에게 제후(諸侯)가 조회를 드리는 예절을 참작하고 하늘에 보답하고 해를 주(主)로 삼는다는 원칙도 내세워 묘(廟) 대신에 제단(祭壇:대보단)을 꾸며놓고 세 황제를 함께 제사지내니 의리가 극히 정밀하고 예절이 극히 엄숙하였으며 음악과 춤 등 모든 것이 격식대로 다 갖추어졌다. -중략- 만동묘의 제사는 이제부터 정철(停撤)하고 지방위(紙榜位)와 편액(扁額)은 대신과 예조판서를 보내 모셔 오게 해서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에 보관하고 편액은 그대로 경봉각에 걸도록 하라.<『승정원일기』, 1865. 3. 29>
 
이에 따르면 만동묘의 향사 정지도 흥선 대원군의 명이 아닌 대왕대비의 전교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해 5월 좨주(祭酒) 송래희의 상소에서 ‘삼가 듣건대, 최근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를 정지하고 편액을 철거하도록 자성(慈聖:대왕대비)께서 전교하셨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한 언급이나, 윤5월 행부호군(行副護軍) 임헌회의 상소에서 ‘삼가 듣건대, 자성전하께서 전교로 대보단과 만동묘가 중첩되어 설치되어 있으니 만동묘의 제향(祭享)을 정지하도록 명하시고 어필로 내린 편액을 옮겨 보관하라고 하셨다 합니다.’라는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하면 만동묘가 흥선 대원군이 명령에 의해 철폐되었다는 서술은 명백한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서원 철폐의 절정은 고종 8년인 1871년에 있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고종 8년(1871)이었다. 이해 3월에 마침내 전국의 거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는 명령이 발령되었다. 즉 1人 1院 이상으로 중복 설립된 서원과 향현사는 설혹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모두 없애고, 사액서원으로서 마땅히 존속시켜야 할 47개 처만 남기도록 하였던 것이다.<『신편한국사』>
 
1871년 3월 흥선 대원군은 47개 소(사우 포함)의 사액 서원을 제외한 한 사람 당 한 원(院) 이상으로 첩설된 경우와 향현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종실록』에 따르면 이때의 명령은 흥선 대원군이 아닌 고종이 직접 내린 것이다. 1871년이면 대왕대비 조씨가 철렴(撤簾:수렴청정을 거둬들임)을 하고 고종이 친정을 수행하고 있던 시기로 당연히 고종의 하교로 이루어진 것이다. 『고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교(下敎)하기를,
연전에 만동묘에 지내던 제사를 그만두게 한 것은 우리나라에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대보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때 도학(道學)에 관한 학문이 있고 충성과 절개를 지킨 사람에 대해 서원(書院)을 세워 중첩하여 제향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서원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것은 삼대(三代)의 법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에 대해 사모하는 뜻을 보인 이후 점점 늘어나서 지금은 한 사람을 중첩해서 제향하여 많게는 4, 5, 6개소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향현(鄕賢)이라 해서 서원을 내고, 마침내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선액(宣額)하게 되는데, 여러 가지 말하기 어려운 폐단도 이 가운데 있다. 비록 사액(賜額)한 서원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에 한 서원 외에 중첩하여 설치된 것은 예조 판서가 대원군(大院君)에게 품정(稟定)하여 신주를 모신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하라. <『고종실록』, 1871. 3. 9.>
 
1865년 만동묘의 제사를 정지하고 이어서 1868년과 1870년에는 사액하지 않은 서원과 사액서원이면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철폐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1871년, 전국의 서원을 대상으로 한 사람에 하나의 서원만을 존속하고 나머지 첩설된 서원은 모두 철폐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고종은 서원의 존폐(存廢) 여부를 예조에서 흥선 대원군에게 품정(稟定)하여 시행하도록 명령하였다. 품정이 ‘임금이나 윗사람에게 아뢰어서 의논하여 결정함’이란 뜻이니, 예조에서 흥선 대원군에게 아뢰어 결정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흥선 대원군은 국왕의 명에 따라 서원철폐의 실무를 총괄 지휘한 실무책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순리고 상식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동묘의 향사 정지나 서원 철폐는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왕대비와 고종의 명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원 철폐와 관련한 흥선 대원군의 역할은 1871년 서원 철폐 때, 예조의 품의(稟議)를 받아 존폐 여부를 논의하고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흥선 대원군이 의정부에 명을 내려 서원을 철폐했다는 『신편한국사』의 서술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교학사
이에 흥선 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폐하고 각 지방에 산재한 서원을 정리하여 47개소만 남겼다.(165)
<사료> 박제형 근세조선정감
금성출판사
또한 흥선대원군은 주요 서원 47개소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 버렸다. 당시 서원에는 면세와 면역의 특권이 주어졌는데, 너무 많이 세워져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20)
<사료> 정교 대한계년사
동아출판
또한, 부패한 정치 세력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토지와 노비는 몰수하였다. 이러한 개혁 조치에 일부 양반이 크게 반발하였지만 흥선 대원군은 흔들림 없이 밀어붙여 백성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155)
리베르스쿨
서원 철폐는 호포제의 시행, 원납전 징수 등과 함께 양반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결국,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사료> 박제형 근세조선정감
미래엔
흥선 대원군은 전국 600여 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사료> 박제형 근세조선정감
비상교육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196)
<사료> 박제형 근세조선정감
지학사
흥선 대원군은 영조의 서원 개혁 정책을 참조하여 서원을 과감하게 정리하였다. 원래 서원은 선현에 대한 봉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면세면역의 혜택을 누려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제사 비용 등의 명목으로 백성을 수탈하였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세워졌던 만동묘를 시작으로 6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여 1871년에는 사액 서원 중 47개소만 남겼다.(206)
천재교육
흥선 대원군은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물리치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또한, 철폐된 서원 소유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였다.(177)
<사료> 박제형 근세조선정감
 
모든 교과서가 동일하게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것으로 서술한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신편한국사』나 교과서 어디에도 대왕대비와 고종의 명령은 보이지 않고,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의 기록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의 교과서가 사료로 제시한 『근세조선정감』과 『대한계년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근세조선정감』에 대해 ‘1886년(고종 23) 박제경(朴齊絅)이 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정 전후의 야사서(野史書)’라 하였으며, 『대한계년사』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정교(鄭喬)가 저술한 편년체 사서(史書)’라 정의하였다. 비록 사료적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모두 사찬(私撰) 야사(野史)임은 분명하다. 그렇다. 우리 역사는 『승정원일기』나 『고종실록』과 같은 정사(正史)는 뒷전으로 팽개치고 사찬 야사를 토대로 서술하고 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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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은 1864년(고종 1)에 이미 민폐문제를 구실로 사원에 대한 조사와 그 존폐여부의 처리를 묘당에 맡겼으며, 1868년과 1870년에 미사액서원과 사액서원으로 제향자의 후손에 의하여 주도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하였다.
 
이어 1871년에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1인 1월(一人一院) 이외의 모든 첩설서원을 일시에 훼철하여 전국에 47개 소의 서원만 남겨놓게 된 것이다. 이때 존치된 47개 소는 서원명칭을 가진 것이 27개 소, 사(祠)가 20개 소이다.
 
1864년, 민폐 문제를 구실로 사원(祠院)에 대한 조사와 존폐 여부를 묘당(廟堂:의정부)에 맡긴 인물도 흥선 대원군이고, 1868년과 1870년의 서원 훼철을 명령한 인물도 흥선 대원군이고, 1871년 47개 소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도록 명령한 인물도 흥선 대원군이다. 수렴청정 중인 대왕대비나 국정 최고 책임자인 고종은 어디 가고 오로지 흥선 대원군만이 보인다. 하지만, 흥선 대원군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으며 다만 국왕의 명에 따라 서원 철폐의 존폐 여부를 결정할 실무를 맡았을 뿐이다. 정사의 기록이 이토록 분명함에도 교과서와 백과사전에는 어찌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흥선 대원군을 국정 최고 책임자의 지위에 올려놓았는지 그 이유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9-08 14:12   |  수정일 : 2017-09-0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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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학사/석사/박사수료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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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  ( 2017-09-19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1
역덕 입장에서 댓글이나 달고 있지만. 이 글 역시 좀 억지스럽다. 역사학자가 무슨 고증학자인가? 프랑스의 역사학자 르 루아 라뒤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느 미녀의 눈 깜빡임을 숫자로 기록한 사료가 있었다고 치자. 미녀의 눈 깜빡임을 일일이 숫자로 기록하는 것은 단순 팩트이다. 하지만 그 눈 깜박거림을 여러 정황 증거를 통해 유혹의 제스쳐인지, 아니면 단순히 눈에 티끌이 들어가서 깜박거리는 지를 판단하는 것, 바로 그것이 역사가의 몫이라고. 김병헌이라는 사람은 미녀의 눈 깜박거림을 곧이 곧대로 세어서 그것만이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대원군이 살던 시대에 주변 사람들이 다 저 눈초리는 유혹이라고 쓰고 있는데 김병헌씨만 홀로 그게 아니라고 그러네. 그렇다면 그게 아닌 이유를 대야 하지 않겠나? 그것도 안 하고 애먼 사람들더러 엉터리라 쉽게 얘기하니 그 수준이 좀 의심스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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