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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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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빠삐용, 김영철의 끝 모를 탈출

유광수
1969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현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글 | 유광수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 1586년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가 여진족 고유의 모자를 쓰고 호랑이 가죽 의자에 앉아 지시를 하는 모습.
《김영철전(金英哲傳)》은 17세기 동아시아 격변기를 민중의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담아 내고 있기에 종종 소설(小說)이 아닌 실기(實記)처럼 이해하지만, 소설이 맞다. 굳이 소설이라 강조하는 것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피도 눈물도 없이 비정한 이야기가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김영철(金英哲)은 평안도 사람으로 대대로 무과(武科)에 급제한 무인 집안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도 어려서부터 말타기, 활쏘기를 잘했다. 좋은 시절이라면 그는 가문의 후광이나 내력, 거기에 자신의 능력이 보태져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7세기 동아시아의 정황은 그를 편안하게 놔두지 않았다.
 
  당시는 여진족의 한 부류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고, 만주를 제패하여 청(淸)으로 이름을 고친 후 중원의 명(明)과 대결하여 중국을 패권에 넣는 시기였다. 조선은 광해군에서 인조에 이르는 그야말로 전란의 격변기였다. 누르하치는 영원성(寧遠城)에서 원숭환(袁崇煥)에게 패하기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당하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장수이자 군주였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 역시 빼어나게 유연한 사고를 지닌 희대의 명군이었다. 이들이 불러일으킨 전란의 피바람은 명나라뿐 아니라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쳐, 병자호란과 국토유린, 삼전도의 굴욕, 소현세자의 포로생활 등이 이어졌다.
 
  《김영철전》은 이런 복잡한 국제정세의 한복판에 끌려 들어가 동아시아 3국을 전전하며 세 곳에서 세 명의 여인과 결혼해서 8명의 아들을 두고 결국 평생을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청나라 장수 아라나의 간청
 
1973년 개봉된 스티브 맥퀸,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영화 〈빠삐용〉.
빠삐용(스티브 맥퀸)이 마지막 탈옥을 시도하기 전 악마의 섬 절벽 위에서 드가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는 장면(상),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중), 바다에 미리 던져 놓은 부대 자루에 무사히 오른 빠삐용이 절벽 위의 드가를 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하).
  김영철이 19세가 되던 광해군 10년(1618)에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만주에서 흥기했다. 위험을 느낀 명에서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자, 조선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2만명을 파병했는데, 이때 평안도 무인 집안의 김영철이 징병되어 종군했다.
 
  전투는 싱거웠다. 광해군의 밀지(密旨)를 받은 강홍립은 명과 청의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관망하다가 국제정세를 판단하여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조선군 내부에서는 “굴욕이다”, “배신이다”는 식의 원성이 일었지만, 청 입장에서 항복한 조선군을 박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랑캐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열혈 장수들의 모반이 적발되고 청 군사의 잘린 머리통을 숨기고 있던 것이 발각되자, 항복한 조선군 숙청 작업이 일어났다.
 
  “조선군 귀족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모두 죽여라.” 김영철 집안은 대대로 무인 집안이라 기품이 있었다. 같이 출정했던 종조부(從祖父) 김영화가 죽음을 당하고 김영철도 목이 달아날 상황이었다. 그때 청나라 장수 아라나(阿羅那)가 누르하치에게 간청했다.
 
  “제 아우가 싸움에서 죽었는데 이자가 꼭 제 아우와 닮았습니다. 죽이지 마시고 제게 주십시오.”
 
  누르하치에겐 그깟 한 명의 조선인보다 자신의 충복 장수의 말과 그의 기분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김영철이 가까스로 살아난다. 청의 장수 아라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 영철을 데리고 건주(建州) 자기 집으로 가자 집안 사람들 모두가 죽은 자가 다시 살아 왔다며 크게 놀랐다.
 
  그렇게 아라나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김영철은 기회를 틈타 도망친다. 하지만 탈출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허허벌판 만주는 먹을 것도,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아 걸어서 도주한다는 것은 빠삐용의 탈출보다 더 암담한 곳이었다. 결국 잡혀 왼쪽 발꿈치가 잘려 나가는 형벌을 당한다. 하지만 영철은 또 도망친다. 그리고 다시 잡힌다. 이번엔 오른쪽 발꿈치가 베어진다. 발꿈치를 베는 형벌은 몸을 빨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로, 그렇게 차례로 두 발 다음은 목이 잘리는 거였다.
 
  주인 아라나는 김영철의 마음을 알았다. 그가 멈추지 않을 것이고 결국 세 번째는 죽음을 당할 것을 말이다. 결국 아라나는 영철의 마음을 잡기 위해 파격적인 카드를 꺼내 든다. 전사한 제 아우의 처를 그와 결혼하게 한 거였다. 이는 단순히 가정을 꾸리게 하는 것 이상으로, 노예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였다. 그렇게 영철은 아라나의 일족이 되었고, 차례로 아들 득북(得北)과 득건(得建)을 낳았다. 하지만 영철은 세 번째 탈출을 감행하고 결국 성공한다.
 
 
  ‘효부’ 명나라 아내를 버리고 탈출
 
조선시대 명나라의 사행길은 육로와 해로 두가지가 있었다. 명나라의 수도가 남경이었던 시기는 해로로, 1409년 영락제의 명으로 남경까지 육로로 이동했다. 1421년 명이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후 북경으로의 육로사행이 200년간 진행됐다. 1621년 심양 동북쪽의 만주족 등장으로 육로사행길이 막히고 잠시 바다 사행길을 이용하다 청이 들어선 1637년부터 정국이 안정되면서 다시 육로 사행이 재개됐다.
  김영철의 세 번째 탈출 시도는 전에 비해 체계적이었다.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선으로 탈출한다는 이념적인 최종 목표가 아니라, 청을 벗어난다는 실질적 목표를 정했다. 같이 종살이하는 자 중에 전유년(田有年)이라는 명나라 등주(登州) 사람과 모의하여 당시 명의 최전선인 영원성(寧遠城)으로 도망쳤던 거다.
 
  이때 정세는 누르하치가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함락해서 만주를 복속하고 심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라, 장수인 아라나가 심양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라나는 영철을 한가족으로 여겨 자신의 건주(建州) 본가와 터전을 맡겼다.
 
  “너는 이제 나와 한집안 식구가 되었으니 진실로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철의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잘 관리하라는 아라나의 신의를 저버린다. 물론 전유년이 그를 먼저 부추겼다. 전유년은 한가위 밝은 달밤에 “아하, 저 달을 어디서든 부모님들도 보고 계시겠지 …”라며 그의 마음을 은근히 찌른다. 이렇게 시작한 통곡과 흐느낌의 감상적 분위기는 그를 더욱 자극했다. 그러자 전유년은 자신의 집이 있는 명나라 등주로 가면 조선으로 갈 수 있다고 구체적 전략을 말한다.
 
  등주는 조선 사신들이 명으로 들어가는 해로사행(海路使行)의 요충지로, 정말 등주로만 간다면 조선 사신단을 따라 조선에 갈 수도 있을 거였다. 눈앞에 조선의 산천과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해서 다른 명나라 사람들과 식량을 비축하고 자신이 관리하던 말까지 풀어서 함께 영원성으로 도주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렇게 명으로 탈출한 김영철은 자연스레 그리고 쉽게 조선으로 돌아올 것 같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김영철에게 명나라 역시 타국이었고, 그는 여전히 외지인일 따름이었다. 비록 종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조선으로의 귀환은 물론 당장 먹고살 길도 막막했다.
 
  그런 그에게 전유년이 손을 내밀었다. 약속대로 자신의 누이동생과 결혼을 시킨 것이다. 김영철의 탈출 스토리는 명나라 입장에선 환호할 만한 이벤트였다. ‘저토록 청나라 오랑캐가 악독해서 놈들 손에서 목숨을 걸고 도망친 열혈 군자’ 정도의 홍보로 딱이었다. 이런저런 기부의 손길도 이어져 김영철이 먹고살 수 있을 정도를 넘어 넉넉한 살림살이가 되었다. 게다가 새로 얻은 명나라 신부는 효성도 지극했다.
 
  “남들은 모두 시부모님을 배알(拜謁)하는데, 저만 유독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며 화공(畫工)에게 시부모의 화상을 그리게 해 놓고는 밤낮으로 문안 인사를 했다. 그녀에게서 영철은 득달(得達), 득길(得吉) 두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영철은 또 다시 탈출 아닌 탈출을 꿈꿨다.
 
  등주는 조선의 사신들이 지나는 길목이었다. 인조8년(1630) 10월에 진하사(進賀使)가 등주에 왔는데, 그때 진하사를 태우고 온 배의 사공 이연생(李連生)은 김영철과 아는 자였다. 이연생이 죽은 줄 알고 있던 김영철을 보고 놀랐고, 영철은 이연생에게서 자기 집안이 풍비박산 나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다.
 
  이듬해 봄에 사신 일행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자의 날카로운 육감이 없지 않은 영철의 부인은 밤을 새워 가며 영철과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때를 놓치면 돌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한 김영철은 부인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해서 잠재우고는 부둣가의 이연생에게로 달려간다. 이연생은 배의 갑판 널을 뜯고서 그 안에 그를 숨긴다. 날이 밝자 부인이 하인들과 배에 들이닥쳐 샅샅이 수색하지만 배의 장판(障板)에 숨은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풍비박산 난 김영철의 가족
 
1624년 사행을 그린 항해조천도(항해조천도). 1623년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책봉승인을 명나라 조정에 주청하기 위해 험한 풍랑을 무릅쓰고 절박하게 파견한 사행단의 모습을 그렸다.
  그렇게 영철은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의 집은 그가 떠날 때의 그 집이 아니었다. 그도 고생을 했지만 조선도, 그의 집안도, 식구들도 모진 고생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의 집에 얹혀살던 할아버지 김영가(金永可)가 지팡이를 짚고 나서서 그를 보고 한동안 말을 못 이룬다.
 
  “영철이냐?”
 
  그러고는 서로 붙잡고 대성통곡을 한다.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돌아온 것은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가족은 흩어지고 가업은 탕진하여 당장 먹고살 것이 막막했다. 같은 고을 재물이 풍족한 이군수(李群秀)라는 자가 그를 효자라고 여겨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다. 그렇게 숨통이 트이고 살길이 열린 영철은 이 세 번째 부인에게서 아들 넷, 의상(宜尙)·득상(得尙)·득발(得發)·기발(起發)을 두었다.
 
  영철이 조선으로 도망친 것을 아는 등주의 부인과 자식들은 남편과 아버지 생각으로 밤낮을 애달프게 산다. 조선에서 사신들이 올 때마다 뱃사공 이연생에게 남편 소식을 묻지만, 이연생은 딱 잡아뗀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조선이 청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애가 마른 부인은 마지막으로 뱃사공 이연생에게 간청한다.
 
  “들으니 조선이 이미 오랑캐에게 항복했답니다. 그러면 이제 사신이 이곳으로 오는 일도 끊어질 겁니다. 제발 남편 소식을 말씀해 주세요. 이젠 정말 마지막입니다.”
 
  다시는 소식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을 아는 부인은 눈물을 흘렸다. 결국 뱃사공이 탈출의 정황과 조선으로 돌아간 김영철의 근황을 말해 주었다. 그것이 등주의 부인과 자식들이 들은 마지막이었다.
 
 
  끝나지 않는 괴로움
 
평양 안학궁 옆에 위치한 대성산성 성곽. 김영철은 청의 장수 아라나를 배신한 벌로 84세까지 평양 자모산성 수축에 동원돼 죽도록 고생하다 죽었다.
  조선으로 귀환한 후에도 김영철의 신산한 삶은 끝날 줄 몰랐다. 청과 명을 거쳐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은 당시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귀한 인재였다. 가도(椵島) 공략과 개주(盖州)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귀환한 김영철이 다시 끌려 나간다. 만주어와 중국어에 능하고 주변 지리 정세에 능했기 때문이다.
 
  임경업(林慶業) 휘하에 있다가 등주 부인의 오빠이자 예전에 같이 탈출을 감행했던 전유년을 만나게 된다. 비로소 소식을 전해 들은 영철은 그에게 청포 20필을 주며 “내 처자에게 전해 주게나”라고 한다. 그것이 그가 한 유일한 온정이었다.
 
  만주의 부인과 자식들의 소식은 조금 다르게 듣게 된다. 인조 19년(1941)에 유임(柳琳)을 청의 금주(錦州)로 보낼 때 김영철이 수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하필이면 청의 장수 아라나와 만나게 되었다. 아라나가 그를 크게 꾸짖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네게 세 번의 은혜를 베풀었다. 목이 잘리게 되었을 때 살려 주었고, 두 번이나 도망쳤지만 죽이지 않고 풀어 주었으며, 내 제수씨를 아내로 삼게 하여 건주의 집안 살림을 맡겼다. 그런데도 넌 목숨을 살린 은혜를 배반하고, 천리마를 훔쳐 달아났으며, 진심으로 너를 믿은 내 신의를 저버렸다. 내가 반드시 너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
 
  그러자 유임이 나서서 아라나를 달랬다.
 
  “공께서 은덕을 베풀어 살리셨는데 이제 죽이시면 처음의 공덕이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무겁게 죗값을 치르라고 하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며 유임이 영철의 죗값으로 담배 200근을 바쳤다. 그렇게 가까스로 살아난 영철은 군중에서 자신의 첫 아들 득북(得北)을 만나게 되었고, 금주 전투에서 승리한 홍타이지가 김영철의 사정을 듣고는 호탕하게 비단 10필에 말 1필을 내려 포상했다.
 
  사해가 모두 자신의 백성이니 용서하라는 취지였다. 영철은 받은 말을 아라나에게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바치자, 이를 안 홍타이지가 다시 노새 한 마리를 내렸다. 영철은 자신이 타던 말은 아들 득북에게 주고 그 노새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돌아와서였다. 자신이 풀려나려고 바친 담배 200근에 대해 갚으라며 은(銀) 200냥을 내란 독촉이 호조(戶曹)에서 이어졌다. 홍타이지가 준 노새를 팔고 집안의 기물을 팔아도 부족했다. 친지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수량을 채웠다. 이후에도 무서운 것은 군역(軍役)이었다.
 
  효종 9년(1658)에 조정에서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수축하고는 군졸을 모집해서 그곳을 지키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한다고 했다. 영철은 네 아들과 같이 성 안에 들어가 살며 군역을 했다. 이미 나이 60세가 넘을 때였다. 그는 성 위에 올라가서 북쪽으로는 건주(建州)를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등주(登州)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처자는 나를 저버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난 매번 저버렸다. 그렇게 두 곳의 처자들이 죽을 때까지 슬픈 한을 품게 했으니, 지금 내가 이렇게 곤궁하고 궁핍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영철은 성을 지킨 지 20여 년 만인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제야 군역에서 놓여났다.
 
 
  왜 그토록 탈출을 감행했는가
 
  옛날 전쟁은 지금 전쟁보다 더 참혹했다. 이러니 열아홉에 전쟁에 끌려 들어간 김영철은 비극으로 초대받은 거였다. 김영철의 신산한 삶은 시대적 아픔이다. 김영철은 분명 피해자고 그의 삶은 비극이다. 하지만 영 개운치 않은 한 가지가 있다. 그건 영철이 전투 자체로 괴로운 것도 전쟁의 결과로 괴로운 것도 아닌, 그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괴로움이 더 컸다는 점이다.
 
  물론 영철이 겪은 불행의 근본은 전쟁 때문이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대체 그는 왜 그토록 탈출을 감행했는가?”
 
  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결과적으로 세 곳에 세 명의 부인과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8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방의 처자식을 그리워했다.
 
  그는 왜 그토록 탈출을 꿈꿨던 것일까? 정말 부모님을 뵙고 싶다는 단지 그것 하나만이었을까? 만주에서 탈출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오랑캐의 손에 잡혔다는 굴욕감과 종노릇을 하는 신분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아라나는 그를 노예에서 풀어 주고 파격적으로 자신과 동렬로 받아들였다. 그들 풍습과 관례에 따르면 죽은 동생의 부인은 자신이 차지(?)할 수도 있었는데 그 위치를 영철에게 준 것이다.
 
  그건 단순히 제수씨의 남편감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위치였다. 그래서 아라나가 믿고 그에게 본가의 터전을 모두 맡기고 떠났던 거였고, 전유년이 그를 꼬일 때도 조선과 부모를 들먹이며 강하게 충동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좋다. 아무리 동렬로 대우해 준다 해도 ‘더러운(?) 오랑캐 부인과 그 핏줄인 아들놈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명나라 등주로 탈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에서 도망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명나라는 대대로 떠받드는 종주국이자 문화국이고 거기서 그는 아름다운 처에 아들까지 두고 떵떵거리며 지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탈출을 감행한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영철아, 꼭 살아 돌아오거래이”
 
  그 이유를 찾으면 너무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그의 괴롭고 힘든 삶의 역경을 모두 알기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마음이 든다. 19세에 징발되어 전쟁에 끌려가는 그에게 할아버지 김영가가 손을 잡고 눈물로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영철아 꼭 살아서 돌아오거래이.”
 
  이 말은 당연한 말이다. 인사말로도 이런 말은 누구나 한다. 그러나 조부의 말은 이어진다.
 
  “네가 오지 않으면 우리 집 대가 끊긴다. 꼭 살아 돌아오거래이.”
 
  이 늙은 양반의 마음은 복잡했다. 귀한 손자가 사지(死地)로 끌려가서도 그렇지만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증손자라도 낳고, 아니 임신이라도 시켜 놓고 갔다면 모를까 ….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이대로 나가 죽어 버린다면 ….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조부의 애끊는 말에 김영철은 굳게 대답한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김영철 전 생애를 꿰뚫는 신념이요 삶의 이유가 된다. 그는 신념의 사나이였다. 집으로 돌아오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를 이어야 하는 불굴의 집념을 삼킨 사나이였다. 두 발뒤꿈치가 잘려 나가고 애끊는 정분을 곳곳에 둘 수밖에 없지만 그는 돌아왔다. 꺾이지 않는 의지로 모든 역경을 헤치고 돌아왔다. 신념이기 때문이었다.
 
  신념을 따르는 삶을 나무랄 수는 없다. 누구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산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다. 하지만 영철이 품은 신념은 옳은지 그른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신념이었다. 군대에 징발되는 극한 상황에 파토스적 감정에 기반한 호소였을 뿐이다. 그것이 그의 평생을 이끌었다.
 
  그 한 방향적 신념은 아라나의 신의도, 건주의 부인과 자식들의 사랑도, 등주의 현모양처 부인과 애끊는 자식들의 눈길도 모두 잠재워 버리고 무시해 버렸다. 그는 그렇게 비극을 완성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6-16 08:08   |  수정일 : 2017-06-1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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