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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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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16)]
1920~30년대 쌀 수출인가? 수탈인가?(1) - 갈 길 잃은 조선의 쌀, 누가 먹어주나!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글 |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일제는 증산량보다 훨씬 많은 쌀을 일본으로 수탈해 갔다. 쌀 반출로 지주의 경제력은 더욱 커졌으나, 농민들의 처지는 어려워졌다.(교학사, 244)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 쌀의 생산을 늘려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양이 계속 늘어났으며 조선의 인구도 날로 증가하여,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산미 증식계획은 추진 과정에서 토지 회사나 지주들은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여 더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천재교육, 253)
 
또 “쌀 수탈을 ‘수출’로 표시하는 표현도 있는데 국권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대등하게 수출을 할 수 있겠느냐.”며 “사진자료도 호화로운 거리를 삽입하고, 우리 민중들의 어려웠던 삶에 대해서는 조금만 조명하는 등 그 당시가 상당히 살기 괜찮았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 교육감은 “이런 것들을 볼 때 국정교과서가 나올 수 있는 방향은 훤히 들여다보인다.”면서 “집필진도 안 나온다고 했기 때문에 아마 교학사 교과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라고 예상했다.(민병희 강원도교육감, 연합뉴스 2015. 10. 19)
 
특히 친일문제가 너무 지나칩니다. 일제 때 쌀을 수출했다고 가르친 교과서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고, 국민 소득이 향상됐었다고 말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다 빼앗기고 수탈당해서 굶어죽고 쓰러졌던 사람들이 지금 생존해 있습니다. 그분들께 ‘쌀도 수출할 정도로 좋았죠?’, ‘소득도 보장되고 참 좋았죠?’라고 물으면 ‘좋았지!’라고 몇 분이나 답하겠어요? 이걸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하는데, 대국민담화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분했습니다. 국민들 앞에서 버젓이 거짓말을 해도 되는가?(도종환 의원, 월간 지방자치 인터뷰 2016. 1. 7)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을 거론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야기가 ‘對日 쌀 수출인가 수탈인가’이다. 언제부터 이런 논쟁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나 위에 예시한 네 건의 글을 보더라도 해석이 분명하게 엇갈린다. 특히 역사 비전문가인 정치인들이나 국정 교과서 반대 세력들은 국권 상실기에 대일본 쌀 수출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무슨 논리적 근거도 없이 그냥, ‘일제에 핍박받던 시대에 온전한 수출은 있을 수 없으며, 설령 값을 받았다 하더라도 제값을 받을 수 있었겠느냐? 그것이 바로 수탈이라는 증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살지 않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데 신문만큼 좋은 자료는 없을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 중에 1920년대를 증언해 줄 사람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에 보도된 신문 기사야말로 당시의 생활상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20년에 시작해서 1930년대 중반에서 끝난 ‘산미 증식 계획 기간’ 동안의 동아일보 기사를 토대로 대일 쌀 수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20년 4월 17일자 신문에는 물가 폭락을 다루는 기사와 함께 ‘미곡 수출 두절’이라는 제목의 최만섭씨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쌀값이 4~5일 이래로 백미 중등미 한 섬에 오십이삼 원 하는 것이 별안간 폭락이 되어 사십칠팔 원이 되고 이에 따라서 적은 상점의 소매가격도 그와 같이 떨어졌습니다. 쌀값이 그같이 떨어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무슨 이유인지 일본으로 해마다 수십만 섬씩 수출되던 미곡이 금년에는 수출되지 아니하는 것이 중대한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쌀값이 떨어졌다고 일반 월급 생활하는 사람은 좋아할지 모르나 쌀값이 떨어지는 데에서 다른 물가가 떨어지지 아니하면 일반의 생활은 더욱 곤란할 줄로 믿습니다. 조선 사람의 의지하는 것은 오직 쌀 뿐이라 이 쌀 한 가지를 팔아가지고 모든 것을 사는 터이니까 매우 곤란할 줄로 아옵니다. -중략- 조선 사람의 바라는 것은 미곡뿐인데, 미곡이 이렇게 떨어지면 조선 사람의 생활이 어찌 될는지 매우 위험하겠습니다. 물론 금후라도 다시 일본으로 수출만 하게 되면 다시 오를 줄 아옵니다. 연전에 한 번에 별안간 삼원씩 사원씩 폭등하던 것도 전혀 일본 수술이 폭증한 까닭이었습니다.’(1920. 4. 17)
  
최씨는 매 섬당 3~4원씩 떨어지는 쌀값 폭락의 원인은 대일본 수출 부진에 있으며, 수출이 재개되기만 하면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씨의 진단은 1921년도 ‘쌀 생산액과 수이출 누년 대조표’와 ‘쌀 수출국별 대조표’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쌀 생산액과 수이출 누년 대조(단위:) - 1921. 4. 16 기사
연도
수확량
수이출
가격
大正2(1913)
14,019,986
1,367,449
17,098,583
同 四年(1915)
12,741,092
2,559,263
24,516,622
同 五年(1916)
13,812,448
1,706,900
19,356,778
同 六年(1917)
13,562,888
1,750,033
27,416,508
同 七年(1918)
15,166,474
2,328,406
61,542,652
同 八年(1919)
12,626,750
2,899,351
110,030,878
同 九年(1920)
14,969,413
2,095,357
77,460,516
비고 : 본 표 수이출 수량은 각종 쌀을 현미로 간주하야 타산한 것이다.
 
輸移出(수이출)은 수출과 같은 뜻의 용어다. 이 당시에는 수출이라는 용어보다 수이출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그 다음이 移出(이출)과 수출이다. 국내에서 타 道로 보낼 경우에는 대부분 搬出(반출)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위 표에서 1919년과 1920년도의 수출량을 비교해보더라도 대략 80만 섬이 줄어들어 약 30% 정도의 감소임을 알 수 있다.
 
쌀 수출국별 대조(단위:石) - 1921. 4. 21 기사
연도
일본
중국
노령아시아
러시아
칠레
1917
1,067,130
225,344
182,612
133,685
1918
1,962,965
162,849
5,019
3,066
1919
2,675,471
65,772
9,108
 
이 표를 보면 한 때 러시아와 칠레에도 쌀을 수출한 적이 있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조선미의 수출은 일본이 단연 으뜸이다.
 
하지만, 1920년에는 일본의 쌀값 폭락으로 경기 미곡의 수출이 완전히 정지되는가 하면 당분간 수출조차 전혀 없을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의 기사가 실렸다.(1920. 7. 10.) 이와 함께 1919년 서쪽 지방의 대 旱害(한해)로 농작물의 수확이 대폭 줄어들자 조선은 그 해결책으로 만주로부터 약 20만 톤의 조를 수입하게 된다. 이는 전년도 수입량인 6만 4천 톤에 비하면 약 3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1920. 6. 12 기사)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당시 우리 농민의 대다수는 소작인이며, 이들의 常食(상식)은 쌀이 아닌 조였다는 것이다. 조선 농민들에게 쌀은 일상으로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아니라 돈이며 이를 팔아서 조를 비롯한 다른 생필품을 살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만주에서 조를 수입했다고 하나 이것은 잘못이다. 만주 지방의 상식은 수수[高粱]인데도 조를 재배한 것은 조를 상식으로 하는 조선에 수출을 하기 위함이었다. 조와 함께 수입된 쌀이 대만 蓬萊米(봉래미)로 품질이 떨어지고 조선 쌀보다 훨씬 저렴하였다. 조선 농민은 조와 봉래미의 값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든 값이 싼 쪽을 선택해서 먹고 살았다. 지금처럼 쌀이 남아도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나 당시에는 그랬다.
 
旱害(한해)와 쌀값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은 1921년 추수 때가 되면 ‘新米의 神戶(신호:고베) 行, 35원에 환영’이라는 제목의 반가운 기사를 만나게 된다.
 
경기도 여주 이천에서 산출하는 자채쌀은 자고로 일찍 익는 종자로 유명하야 해마다 유월 유두 때가 되면 의레히 진상하는 쌀이 나는 터인바 금년에도 금월 초생에 이천에서 산출한 햅쌀이 인천 시장에서 매매가 되었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동안 미곡검사소에서 검사를 맛치고 지난 17일에는 일본으로 수출이 되어 오사카와 고베 시장에서 한 섬에 35원금으로 매매가 되얏는데 일본 시장에서도 이와 같이 일찍 되는 종자는 매우 드물다고 크게 환영을 받았다더라.(1921. 8. 26.)
 
자채쌀은 경기도 여주 이천에서 생산하는 올벼의 하나로 상품이 우수하기로 유명하다. 한동안 막혀있던 수출길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한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처음 시작한 쌀값이 상당히 높은 것은 더욱 반길 일이었다. 이 당시 기사에 의하면 8월 25일 오사카 期米(기미) 시장의 쌀값이 35원 대였으나 26일에는 34원 대로 1원 정도 하락하였다. 또 8월 29일 인천 일용 물가를 보면 石拔(석발:돌을 골라냄) 백미 한 섬에 33원인 것을 보더라도 35원은 최고가임을 알 수 있다. 1920년도에 200만 섬으로 대폭 감소된 수출량은 1921년도에 350만 섬에 달하면서 무려 150만 섬이나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
 
본문이미지
▲ 1921년 8월 29일자 인천 일용 물가

 하지만 아직은 일본 내지미에 비해 건조나 조제 등에서 결점이 있는 까닭에 제값을 못 받는 실정이었다. 특히 甘味(감미)와 殖飯(식반:밥이 불어남)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조선미가 대접을 받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混石(혼석)이었다. 이에 1922년 백미의 검사 규칙을 정하여 쌀 한 되[升]에 돌이 전혀 없는 경우는 특등으로 하고, 최대 3개까지는 1등, 7개까지는 2등으로 하며 그 이상의 경우 등외로 하여 수출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물론 등급이 전적으로 돌의 유무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나 일본 소비자가 특히 돌에 대한 불만이 많은데다 가격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1920년도에 시작한 산미 증식 계획으로 쌀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산미 개량으로 품질이 날로 좋아지면서 일본 내지에서의 조선미의 가격 경쟁력은 자연 상승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일본 내지미의 가격을 압박하면서 일본 농민들의 불만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일본에서는 일본 미곡법을 조선에 적용하여 조선미 이입을 제한하려는 정책 추진을 시도하게 되는데, 일본 농무성에서는 조선의 실정을 고려할 때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미곡법은 점차 조선미가 일본 내지미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되자 수입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의 미작은 매년 1천 5백만 섬을 평작으로 생각하는바 하천의 범람 때문에 가끔 흉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일본으로 약 4백만 섬이 이입되는 것은 조선의 농가경제를 확립하는 점으로 도저히 피키 어려운 일이다. 풍흉에 따라 변동이 있지 아니하고 일방 조선 농민 중에는 稗(패)를 상식으로 삼음으로 소위 식량 수급 조절의 확립을 위하야 미곡 이외의 식량에도 영향이 있어 미곡법 적용은 아직 고려할 점이 있더라.(1924. 9. 16)
 
이러한 상황에서 ‘농업 전업의 위험’이라는 제하의 동아일보 사설은 눈여겨볼만 하다.
 
이제 우리가 농업만으로는 살 수 없는 이유는 큰 것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쌀의 수출이 점차로 줄어들 경향을 가진 것이니 지금 세계의 인구를 米食 인종과 麥食(맥식) 인종의 양종에 나누어 보면 그 태반이 맥식 인종이오 백미를 상식으로 하는 인종은 중국의 중남부, 조선, 일본, 동남아세아에 있는 사람들뿐인데 이 사람들도 각국이 자급자족의 수단을 취하는 관계로 자국에서 요구되는 식량은 모두 다 자국의 소산으로 충족한 모양이고 그뿐만 아니라 남부아세아의 일대는 米産이 풍족하여 해마다 외국으로 수출되는 것이 많고 또한 근래에는 백미를 주식으로 하지 않는 북미합중국에서도 쌀의 산출이 점차로 증가하는 때문에 조선의 백미는 아무리 풍작이 된다 할지라도 이것을 외국으로 수출케 하기에는 극히 어렵고 다만 2~3백만 섬씩이라도 수출될 여지가 잇는 곳은 오직 일본뿐이니 일본도 근래에는 산미증식의 정책을 취하야 점차로 자급자족의 계획을 실현하랴 하니 일본을 유일의 시장으로 하는 조선미의 수출도 그 장래가 대단히 위태하게 보인다. 그러면 백미 하나를 의지하야 가지고 먹고 입고 쓰며 활동하는 것을 얻으려하는 우리의 생업이 십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1924. 10. 6.)
 
사설은 장래의 국제적 쌀 생산의 흐름으로 볼 때 농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조선의 산업 구조는 극히 위험하다는 취지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조선 쌀 수출의 대부분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본이 쌀의 자급자족을 이루는 날에는 조선 쌀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위태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담고 있다. 이는 실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 시장에서 조선미 가격의 차별에 대한 불만을 호소한 기사도 있어 눈길을 끈다. ‘모 실업가의 이야기’로 게재된 아래 글은 일본 取引所(취인소:期米 거래소)에서 일어나는 내지미와의 가격 차이에 대한 불만과 함께 그 대책을 강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일본 취인소의 조선미 격차와 別建(별건:일본미와 따로 거래함) 등은 당 업자 사이에 매우 머리 아픈 문제로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는 바 그 대책으로 차제에 일시적 姑息(고식) 수단을 취함은 도리어 화근을 맨들 염려가 있으니 곧 실제상 효과가 있는 대책은 오직 조선 내의 미곡상이 일치단결함에 있을 뿐이다. 현재에 취인소 각 시장이 임의로 取引上 사정에 의치 않고 공정시세를 정하야 이를 표준으로 일본의 쌀 상인과도 거래하기로 하고 혹은 堂島[どうじま] 취인소는 受渡米(수도미:거래하는 쌀)의 7할까지는 조선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별건을 주장하여 부당한 격차를 생기게 하는데 대한 대책으로 품질을 개량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향상 개선을 도모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지금 일본식량은 실로 조선미의 풍흉과 출회 여하에 좌우되는 상태이나 조선내의 시세는 항상 시세가 변동됨을 고려할 바이니 사탕, 인도의 고무 등은 항상 상인의 단결력에 좌우됨을 생각하면 조선미가 일본 시장에서 너무 냉대를 받는 것은 조선내 당 업자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조선미 한 섬에 2원의 시세 차는 곳 수출고 4백만 섬이라 할진대 8백만 원의 이해가 생기므로 충분히 단결하여 차 대책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1925. 1. 27)
 
조선미가 일본 취인소에서 가격 차별을 받는 이유로 우선 쌀의 품질 면에서 뒤진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차츰 개선하면 될 문제였다. 하지만 일본 취인소에서 일본 내지미와 함께 거래되지 못하고 別建(별건), 즉 별도 거래로 인한 가격 차이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전 미곡상인이 일치단결하여 확고한 대책을 세워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조선미가 차츰 일본 시장을 압박하면서 일본 미곡상들의 경계와 농민들의 불만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별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업가가 ‘頭痛(두통)’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은 1925년 2월에 쌀 수입을 제한할 수 있는 ‘미곡법 제2조’를 개정하여 4월 1일에 시행하게 되는데 당장은 대만에만 적용한다. 조선에 미곡법을 적용하지 못한 데는 일본이 산미 증식 사업을 추진하여 쌀을 증산해놓고 이를 통제하고자 하는데 따른 조선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만에만 적용하던 미곡법은 1928년에 접어들면서 조선에도 적용하게 된다. 이어, 1930년도가 되면 조선미의 일본 이입 통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현재 일본의 미곡 조사회에서 문제가 되어 있는 소위 “조선미 이입 통제안”에 대하여 간단히 그 내용의 개략을 말해보자. 일본을 주체로 보니까 移入통제안이지 조선을 주체로 보면 移出통제안이다. 고로 이입통제안이라 하나 이출통제안이라 하나 결국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일본서 현재 조선미에 대한 문제가 중대시 되는 이유는 전회의 본란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1) 조선미의 이입 수량이 年年이 격증할 뿐만 아니라 2) 거액의 조선미가 新穀期(신곡기)로부터 3~4개월간에 일시에 일본으로 유입하는 관계로 일본 내 미곡시장에서의 미가를 폭락시키어서 그러지 않아도 10여 년간을 두고 계속 불경기로 크게 곤궁한 처지에 빠져 헤매는 일본 농민에게 이중의 타격을 준다는데 있다. 최근에 일본에서 유행하는 “조선미가 일본미 시장을 교란한다.” 또는 “조선미의 일시 유입이 일본미를 압박한다.”는 등의 말은 다 이 뜻을 간단한 문구로 표한 말이다.(1930. 1. 21. 기획/연재)
 
여기서 ‘조선미의 이입 수량이 年年이 격증’이라 한 것은 산미 증식 계획의 성과로 조선에서 미곡 생산이 급증한 것과 더불어 산미 개량으로 쌀의 품질이 발전하면서 일본 내 시장으로 이입 수량이 급속도로 증가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거액의 조선미가 신곡기로부터 3~4개월간에 일시에 일본으로 유입’이란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하나는 조선 농민의 거의 대부분이 소작인으로 이들은 추수 후에 소작료, 납세, 빚 청산, 동절기 준비 등의 급박한 사정에 몰려서 있는 대로 내다 팔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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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을 위해 군산항에 적재된 조선 쌀
또 하나는 이를 사들인 미곡상과 자산 농가는 이를 저장할 만한 창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미곡 자금도 없는 상황에서 사는 대로 일본으로 이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미의 순차적 이입을 유도하기 위해 대단위 미곡 창고 설립을 계획하고 일부 실행기도 한다. 또, 미곡 상인들의 자금 부족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저리의 융자정책도 병행하게 되지만, 급격히 증산된 쌀을 처리할 수 있는 길은 일본으로의 수출밖에 없었다.
 
급기야, 1931년 6월에는 ‘조선미 이입 제한엔 절대 반대, 산미 증식을 중지하라!’라는 내용의 사설을 싣는다.
 
조선의 입장으로 앉아서는, 그 방법의 여하를 물론하고 어떠한 종류의 이입제한이든지 그것이 터럭만큼이라도 조선미의 일본 유출을 방해하는 성질의 것이면, 이를 절대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물론 현행 미곡법을 처음으로 실시하던 1921년 경과는 아주 달라서 그 후 10년을 경과한 금일에 와서는 일본 내의 쌀값을 압박하는 최대 원인이 조선미의 일본 유입에 있다는 사정쯤은 조선농민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사정은 조선이 자진하야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그 인구문제와 식량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자급자족책을 목표도 조선에다가 조선자체가 필요로 하는 정도 이상의 방대한 산미증식 계획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금일에 와서 조선미의 이입을 제한하야 해당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의 결과로부터 오는 손해 전부를 다만 조선 농민에게만 전가하여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쯤은 일본 농민도 차를 이해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근 2~3년간에 일본 농민을 대표한 제국농회가 수차에 걸쳐서 아모 기탄없이 이러한 결의를 하는 것을 본 우리는 그 실현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그 너무나 甘食苦吐, 我利爲主의 태도에 다만 놀랄 따름이다. 여하간 조선농민의 입장으로 앉아서는 법률의 제정 실시에 의한 이입 제한을 절대로 반대함은 물론이오, 그 소위 경제적 시설에 의한 이입 제한일지라도 창고설치, 저리 융통의 주요 목적이 조선농민의 편의를 도모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조선미의 유출 자유를 속박하는데 있는 이상 이에는 절대로 반대를 표명할 수밖에 없다.(1931. 6. 16. 사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의 조선미 통제책은 점점 그 강도가 더해져 조선미에 대한 移出(이출) 특허제를 확립하고 영구화를 준비하는가 하면, 외지미의 과세론이 고개를 들게 된다. 이는 시설이나 융자를 통한 통제만으로는 일본 내지미의 가격 유지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조선미의 수출 장벽은 점점 높아만 가는 상황에서 9월 28일자에는 ‘東攻西征(동공서정) 받는 조선미는 누가 먹어주나’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東攻은 일본의 통제책을 이르고, 西征은 값싼 대만미의 수입을 이르는 것으로, 하나는 수출 길을 막고 하나는 쌀값 하락을 초래하여 오도 가도 못하는 진퇴유곡의 입장이 된 것이다.
 
이러한 하소연의 연장선에서 10월 1일 기사에는 당면 문제가 적나라하게 제시되어 있다. 조선에서 남는 쌀에 대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아도는 2백만 섬의 쌀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쌀값 변동의 震源(진원)인 공급방면의 이상은 조선 쌀값의 장래에 큰 영향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쌀값 변동의 결과 다소 招致(초치)할 수 있는 소비 증진을 예상한다 할지라도 조선인 경제력으로서 감당하지 못할 처지이며 그렇다고 하면 이 남아도는 쌀 2백만 섬은 나갈 곳을 발견하여야 할 터인데, 조선미의 최대 수요지인 일본 내에서는 방금 1천 만 섬 이상의 남아도는 쌀과 풍작 예상으로 조선미 이입 방지를 도모하고 있는 이때이니 그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수난기에 있는 조선미에 이제 또 다시 먹어낼 수 없고 팔아낼 수 없는 쌀이 불었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다.(1933. 10. 1.)
 
드디어 1934년 산미 증식 계획은 중단되었다. 문제는 산미 증식 계획으로 생산된 쌀의 중요한 수출국인 일본이 이 쌀의 수입을 통제하면서 조선 쌀이 갈 길을 잃어버리자 이에 대한 조선 내 불만이 비등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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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4월 13일 주식 및 期米 시세표

1920~30년대 조선 농촌 경제, 특히 쌀과 관련한 문제는 복잡다단하다. 생산자인 소작인, 소작인의 삶을 틀어쥐고 있는 지주, 생산된 쌀을 매개로 이익을 챙기는 미곡상인, 미곡상인의 활동 무대인 미곡시장과 미곡취인소 등 모든 것을 제한된 지면에 한꺼번에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농산물의 생산부터 수출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는 복잡하며 단계마다 이익을 좇아 뛰어든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주식 시세와 함께 기미 시세도 거의 매일 신문에 게재되어 서울이나 인천뿐만 아니라 오사카와 도쿄의 시세도 한 눈에 알 수 있는 시기였다. 철저하게 시장 원리에 의해 움직였다는 뜻이다.
 
수탈이나 착취는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농민의 대다수는 소작인으로 이들은 피땀 흘려 한 해 농사를 짓지만, 추수가 끝나면 80% 내외를 지주에게 뜯긴다. 이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혹독한 보릿고개다. 소수의 부농이나 자산가들은 소작인을 착취하여 얻은 이익으로 농지를 늘리고 쌀을 수출하여 또다시 부를 축적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産地(산지) 농민들과 수입 국가의 무역상이 직접 접촉하여 거래하는 일은 없다. 일본이 조선 농민을 수탈했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관련 사료 한 줄 읽지 않고 너무나 쉽게 일본이 조선 농민을 수탈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용기가 정말 대단하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6-12 13:55   |  수정일 : 2017-06-1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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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학사/석사/박사수료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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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빈  ( 2017-06-13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0
도종환이 시인이어서 감성에 맞는 말을 하더니만, 정상배가 되어서도 감성에 맞는 말을 하니 더러운 이름으로 남기지 말고 차라리 시인으로 감성에 젖는 말을 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시인의 언어와 정치꾼의 언어가 틀린것을 아시는지.
민들레차  ( 2017-06-13 )  답글보이기 찬성 : 7 반대 : 0
김병헌님, 허무맹랑한 역사서술을 바로잡으시려는 학자적 열정과 용기에 감명받았습니다. 아래 댓글과 같이 '토지수탈론'으로 '쌀수탈론'을 입증하는, 즉 성경내용을 또다른 성경내용으로 입증하는, '순환논리의 오류'를 범하시는 분들이 안타깝게도 한국 국민의 대다수라고 생각되지만, 김병헌님의 이런 문제제기가 하나하나씩 쌓여간다면, 언젠가는 허무맹랑한 국수주의사관에 세뇌된 우리나라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전부 바로잡힐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건투를 기원합니다.
      답글보이기  김병헌  ( 2017-06-13 )  찬성 : 5 반대 : 0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역사 교과서의 오류와 왜곡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이런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혐오와 자학심만 심어줄 뿐입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강인성  ( 2017-06-13 )  답글보이기 찬성 : 2 반대 : 11
이런 사람이 역사학자입네하고 있네요. 수탈이나 착취가 지주와 소작농사이에만 있었다는 애매모호한 말로 숨기는 바는 지주의 대부분이 일본인라는 사실에 있겠지요. 토지 조사 사업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이 우리나라 토지 소유권의 확립을 구실로 하여 펼친 대대적인 조사 사업으로서 식민지 정책 수행을 위하여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개편한 사업이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들은 당연히 그들의 소유가 되어야 할 농토를 빼앗겼고, 門中 소유 또는 촌락 공유의 토지는 총독부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여러 가지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결과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논밭과 임야가 총독부의 소유로 나타났다.
      답글보이기  김병헌  ( 2017-06-13 )  찬성 : 8 반대 : 0
강인성님∼ 글을 쓸 때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시기 바랍니다. 질문드리지요. 지주의 대부분이 일본인이라는 근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40%의 논밭과 임야가 총독부 소유라고 하셨는데 밭과 임야에서도 쌀이 생산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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