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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로 보는 항우(項羽)의 패망 이유

이한우의 知人之鑑 〈13〉

⊙ 유방, 임금다움[德]에서 항우를 압도
⊙ 공자, “용맹[勇]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亂]”
⊙ 한신, “항우의 용맹은 필부(匹夫)의 용맹, 항우의 어짊은 아녀자의 어짊”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 항우는 용맹했으나 ‘학이시습(學而時習)’을 게을리해 패망했다.
육가(陸賈·기원전 240~170)는 한(漢)나라 초기의 변론가이자 외교가로 초나라 사람이었는데 뒤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나라 고조(高祖·劉邦) 황제가 천하를 평정했을 초기에 태중대부(太中大夫·궁중고문관)로 있던 육가가 새나라의 황제에게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강술하려 하자 한고조는 “내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 어찌 《시경》과 《서경》이 도움을 주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육가가 말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해서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문무(文武)를 함께 쓰는 것이야말로 장구한 계책입니다. 만일 진(秦)나라 시황제가 천하를 얻고 나서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닦으며 옛 성인(聖人)이나 성군(聖君)들을 본받았다면(진나라는 망하지 않았을 터이니) 폐하께서는 어찌 천하를 얻어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고조는 부끄러워하며 육가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위해 진나라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 내가 그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 그리고 옛날 왕조들의 성공과 실패 등에 관해 책을 짓도록 하라.”
 
  육가는 곧바로 나라 존망의 근본이치에 관한 저술에 착수해 모두 12편을 썼다. 매번 한 편씩 올릴 때마다 고조는 “처음 듣는 말[新語]”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책의 이름도 《신어(新語)》라고 지어 주었다.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이 책은 도기(道基) 술사(術事) 보정(補政) 무위(無爲) 변혹(辨惑) 신미(愼微) 자질(資質) 지덕(至德) 회려(懷慮) 본행(本行) 명성(明誠) 사무(思務) 12편으로 이뤄져 있다.
 
 
  “성품이 관대하고 의젓”
 
한 고조 유방.
  그런데 훗날 송나라 유학자 호굉(胡宏·1106~1161)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육가가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며 가상의 글을 지었다.
 
  〈폐하께서 천하를 얻은 것은 말 위에서의 무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관대하고 의젓하시기 때문에 회왕(懷王·초나라가 세운 허수아비 황제 의제)이 내린 입관(入關·관중〔關中〕으로 들어가는 것)의 명을 받으셔서 천하를 위해 남은 도적무리들을 제거하셨습니다. 지난날에 노략질하는 자들을 물리치셨고 진(秦)나라에서 투항한 왕자 영(嬰)을 용서해 주셨으며 재물을 빼앗지 않았고 부녀자들에게 빠지지 않았으며 법삼장(法三章·‘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상해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죗값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그 밖의 진나라의 무자비한 법은 모두 없앴다)을 제정하셨습니다. 이에 (진나라의) 부로(父老)들은 폐하만을 두려워하고 더 이상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니 불과 3대(代) 만에 천하의 어짊을 얻었습니다.
 
  반면 초나라 항왕(項王·項羽)은 회왕과의 약속을 어기고 폐하를 촉한(蜀漢) 땅으로 내쫓았지만 폐하께서는 인내를 갖고서 봉국(封國)으로 나아가셔서 소하(蕭何·?~기원전 193·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개국공신)를 등용해 재상으로 삼아 현명한 인재들을 모여들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잘 다스렸고 파촉(巴蜀) 땅의 임금으로 봉해지자 이를 받아들여 삼진(三秦·장안)으로 돌아와 근거지를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항우가 참람되게도 의제(義帝)를 살해하자 폐하께서는 군대를 일으켜 흰색 비단에 새겨 제후들에게 고하고서 그를 정벌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불과 삼대(三代) 만에 천하의 의리를 취하셨고 매사를 악착같이 자신이 직접 다 하려 하지 않았고 큰 윤곽만 잡아 주면서 영웅의 마음가짐으로 장량(張良·?~기원전 186·소하〔蕭何〕와 함께 책략에 뛰어나 한나라 창업에 힘썼다. 장자방으로 더 알려져 있다)을 스승 삼고 진평(陳平·?~기원전 186)에게 중임을 맡기고 한신(韓信·?~기원전 196)을 장수로 삼아 거의 요임금, 순임금, 우왕, 탕왕, 문왕, 무왕에 버금가는 사람 알아보는 밝은 지혜[知人之明]로 백성들을 진무하고 군사를 지휘했으며 전쟁터에서 불행하게 죽은 사람들의 옷을 새로 갈아 입힌 다음 관에 넣어 그 집으로 다시 보내주셨습니다.
 
  또 거의 요임금, 순임금, 우왕, 탕왕, 문왕, 무왕과 마찬가지로 홀아비나 과부가 된 사람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고아나 혼자 된 늙은이를 구휼해 주는 정사(政事)를 펼쳤으니 이 같은 지략과 다스림[數]이 있었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항우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싫어했다
 
공자의 제자 자로의 행태는 항우와 비슷했다.
  한마디로 단순히 무력(武力)에서만 항우를 이긴 것이 아니라 장차 임금이 될 수 있는 임금다움[德]이라는 면에서 이미 항우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제 항우는 어떤 면에서 유방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 점에서 제왕학의 교과서인 《논어》는 생생한 나침반을 제공한다. 반고의 《한서(漢書)》 항적전(項籍傳)이다. 항우(項羽)로 더 알려져 있는데 우(羽)는 항적의 자(字)다.
 
  〈적(籍)은 어릴 적에 글을 배웠으나 다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접었고 검술을 배웠으나 역시 다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접었다. (작은아버지) 항량이 그에게 화를 내니 적이 말했다. “글은 성과 이름만 적을 줄 알면 충분합니다. 검술은 한 사람만 상대하는 것이라 배울 필요가 없으니 만인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고자 할 뿐입니다.”
 
  이에 량은 그의 뜻이 기이하다[奇]고 여겨 마침내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적은 크게 기뻐했으나 그 (병법의) 취지만 대략 알고서는 이 역시 끝까지 배우지는 않았다.〉
 
  항우의 이 같은 모습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용맹하다는 평을 들었으나 동시에 공자로부터 배우기를 싫어한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던 자로(子路)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 《논어》 양화(陽貨)편에서 공자는 자로에게 여섯 가지 좋은 말과 그에 따른 여섯 가지 폐단을 들어 보았느냐고 묻고서 이렇게 말했다.
 
  “어짊[仁]을 좋아하기만 하고 (그에 필요한)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어리석게 된다[愚]는 것이다. 사람을 평하고 논하기[知=知人]를 좋아하기만 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쓸데없는 데 시간과 노력을 탕진하는 것[蕩]이 된다. 신의[信]를 좋아하기만 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남을 해친다[賊]는 것이다. 곧은 것[直]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너무 강퍅해진다[絞]는 것이다. 용맹[勇]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지러워진다[亂]는 것이다. 굳센 것[剛]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뭐든 제 마음대로 하게 된다[狂]는 것이다.”
 
  그러나 항량의 수하에서 군사의 일을 익힌 항우는 얼마 안 가자 특출한 용맹과 무략으로 진나라 군사를 꺾으면서 일순간에 초나라를 제후들의 패자(覇者) 자리에 올린다. 절정에 이른 초나라 군대의 모습을 항적전(項籍傳)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초나라 군대는 제후들 중에 으뜸이었다. 초나라 병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대적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고 함성 소리는 하늘과 땅을 움직일 정도였다. 제후들의 군대는 사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초가 진나라 군대를 이미 깨트리고 나자 우는 제후군의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군대가 행군할 때에는 수레로 군진을 만들었는데 수레의 끌채[轅]를 서로 향하게 하여 문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원문[轅門]이라 했다)으로 들어오게 했는데 무릎걸음으로 나아오면서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못했다. 우는 이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니 병사들은 모두 그에게 속하게 됐다.〉
 
 
  항우의 최후
 
  마침내 진나라 도성 함양을 도륙하고 진나라의 항복한 왕자 영(嬰)을 죽였으며 그 궁실들을 불태웠는데 불은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다. 또 보물과 재화들을 거둬들였고 부녀자들을 약취한 다음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항우는 자신을 따랐던 장수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해 주었다. 그런데 함곡관에 가장 먼저 들어간 자를 그곳의 왕으로 삼겠다고 했던 약속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항우는 유방을 세워 한왕(漢王)으로 삼고 파(巴)와 촉(蜀) 그리고 한중(漢中)의 왕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유방을 의심하여 먼 외곽 지역의 왕으로 내쫓은 것이다.
 
  물론 그의 의심은 정확한 것이었으나 그 후 항우의 조치는 적절치 못했다. 한왕(漢王·유방)은 다섯 제후의 병력을 비롯해 모두 56만명을 동원해 동쪽으로 초나라 정벌에 나섰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초한(楚漢)전쟁의 시작이었다. 5년여에 걸친 양쪽의 공방전은 결국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전투에서 유방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날의 장면이다.
 
  항우는 해하에서 방벽을 구축했으나 군사는 적고 식량은 다 떨어졌다. 한나라는 제후의 군사들을 이끌고 항우를 여러 겹으로 둘러쌌다. 항우는 밤에 한군이 사방에서 모두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는 것[四面楚歌]을 듣고서 마침내 놀라서 말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 땅을 모두 차지했다는 것인가? 어찌 이리도 초나라 사람들이 많다는 말인가!”
 
  한밤중에 일어나 장막 안에서 술을 마셨다. 우(虞)라는 성씨의 미인이 있어 늘 총애를 받으며 따라다녔고 또 추(騅)라는 이름의 준마가 있어 늘 그것을 타고 다녔다. 마침내 항우는 강개한 심정으로 비통함을 노래하며 스스로 시를 지어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兮 氣蓋世]
  때가 불리하니 추(騅)가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까?
  우(虞)야! 우야! 너는 어떻게 하느냐?”
 
  노래를 여러 차례 부르니 미인이 창화(唱和)했다. 항우가 몇 줄기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 있던 자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고 아무도 우러러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후 항우는 1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동성(東城)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를 따르고 있던 이는 28명뿐이었다. 그들을 향해 항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켜 지금까지 8년이 됐다. 몸소 70여 차례 전투를 벌여 마주친 적들을 깨트렸고 공격한 적들을 굴복시켜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어 마침내 천하를 제패하여 차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결국 이런 지경에 빠졌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진정 결사적으로 통쾌하게 싸워서 반드시 세 번 승리하고 적장을 참살해 적의 깃발을 꺾어 마침내 내가 죽은 후에라도 제군(諸君)들에게 내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임을 알게 하고 싶노라.”
 
 
  필부의 용맹, 아녀자의 어짊
 
한신은 항우의 용맹을 ‘필부의 용맹’이라고 평했다.
  어쩌면 항우는 끝까지 자신이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한 이유를 알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군자는 (잘못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요인이야 수없이 많겠지만 항우를 섬기다가 뒤에 유방으로 돌아선 한신(韓信)이 유방을 처음 찾아갔을 때 했던 이 말만큼 항우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은 없을 것이다.
 
  “신은 일찍이 항왕(항우)을 섬긴 적이 있으니 항왕의 사람됨[爲人]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항왕이 작심하고 소리를 내지르면 1000명이 모두 꼼짝 못합니다만 그러나 뛰어난 장수에게 능히 일을 믿고 맡기지 못하니 이는 다만 필부의 용맹[匹夫之勇]일 뿐입니다. 항왕은 사람을 만나볼 때 공손하고 조심하며 말투도 아주 친근하여 누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나눠 줍니다만 그러나 자기가 부리는 사람이 공로가 있어 봉작을 내려야 할 때가 되면 인장이 닳아서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차마 내주지를 못하니 이것이 이른바 아녀자의 어짊[婦人之仁]입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문인지 항우 자신의 배움을 싫어하는 게으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항우는 진정한 용기나 용맹에 관한 공자의 통찰을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논어》 술이(述而)편에서 자로가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만일 스승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공자의 대답이다.
 
  “맨 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 몸으로 강을 건너려 하여 죽어도 후회할 줄 모르는 사람과 나는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일에 임하여서는 두려워하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세우기를 즐겨 하여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과 함께할 것이다.”
 
  자로를 향한 것임과 동시에 항우를 향한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5-15 08:09   |  수정일 : 2017-05-1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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