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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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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눈에 비친 일본, 일본인

<구경꾼들은 길 양쪽으로 갈라서 앉아 있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앞줄에, 큰 사람은 뒷줄에 앉는다. 차례대로 대열을 이루고 누구 하나 소란을 피우고 이탈하는 이가 없이 엄숙했다. 한 사람도 길을 넘는 자가 없었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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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행렬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 조선은 열두 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를 에토(지금의 도쿄)에 있던 막부(幕府)로 보냈다. 외교사절일 뿐 아니라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에 끼였던 기록관이 남긴 일본에 대한 관찰기를 지금 읽어보면 흥미롭다. 1719년 德川吉宗(도쿠가와요시무네)이 막부의 최고 실력자인 장군직에 오른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 일행에 제술관(製述官: 기록자)으로 동행했던 신유한(申維翰)이 [해유록(海游錄)]을 남겼다. 이 책을 읽으면 요사이 일본사회와 비교하게 되어 더욱 재미 있다.
 
  신유한(申維翰)은 조선 선비 특유의 화이적(華夷的) 관점에서 일본을 관찰했다. 조선을 중국과 같은 문명의 중심이 華로 보고 일본을 夷나 倭, 즉 오랑캐 같은 야만족으로 본 것이다. 그는 군중(群衆)이라고 써야 할 때도 군왜(群倭)라고 썼다. 그런 경멸을 깔고 관찰했으나 사실관계는 상당히 정확하다. 申維翰은 일본사회가 무사들에 의해 잘 통제되어 보통사람들이 매사에 아주 절도 있고 성실하게 임한다고 썼다. 그는, 조선 통신사가 탄 배를 마중나온 일본 배가 날렵하게 바다를 헤쳐가면서 인도하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느려터진 조선 선원들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일본사회가 병농공상(兵農工商)의 계급사회라고 보았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조선조 사회와 다른 점은 일본이 무사, 즉 兵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회인 데 반해 조선조는 글을 아는 선비나 양반에 의해 통치된다는 점이다. 申씨는 특히 일본사회에서 유학자의 신분이 극히 낮은 데 유의하고 있다. 
 
  <兵(무사)은 안일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商은 부유하지만 세법(稅法)이 무겁다. 工은 기술이 뛰어나지만 제품값이 너무 싸다. 농민들은 고생하지만 조세(租稅) 이외엔 다른 부역이 없다>
 
  申維翰은, 비록 칼을 찬 무사가 지배하는 일본사회이지만 형식적인 계급차별은 조선조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명분이 정해지면 상하가 단결하여 일을 정연하게 처리하는 것에 감탄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태수(太守: 藩主. 大名)는 평범하고 다소 못나 보였지만 그 부하들은 태수의 명령을 받아 행하는 데 조금도 빈틈과 소홀함이 없었다. 부하를 불렀을 때 그에 응대하는 것이 메아리와 같고 일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하며 보초 서고 차를 끓여오는 데 조금도 헛점이 없다>
 
  申제술관은 보통 일본인이 보여준 질서정연함에 놀란다. 특히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거리로 몰려나와 구경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구경꾼들은 길 양쪽으로 갈라서 앉아 있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앞줄에, 큰 사람은 뒷줄에 앉는다. 차례대로 대열을 이루고 누구 하나 소란을 피우고 이탈하는 이가 없이 엄숙했다. 한 사람도 길을 넘는 자가 없었다>
 
  申제술관은 서민들의 이런 질서가 兵이 군법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본사람들이 총명하고 문자를 많이 알며 특히 출판이 왕성한 데 놀란다. 요사이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일본인의 독서열에 감탄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대체로 총명하고 말을 잘 하는데 필담(筆談)을 해보면 기언미담(奇言美談)을 인용한 표현이 많다. 이 나라의 서적은 조선에서 가져온 것이 100이라면 중국의 남경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천을 헤아린다. 고금의 이서(異書)나 백가(百家)의 문집이 출판된 양을 본다면 조선의 10배 이상이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서물(書物)을 먹는 지어(紙魚)처럼, 사람이 글자를 먹은 것처럼 보고 생각하는 안목이 밝다. 고사(古事)를 논하고 평하는 소견도 적확(的確)하기 짝이 없다>
 
  申維翰은 '오사카에서 서적 출판이 왕성한 것은 일대 장관이다'고 평하면서 특히 [퇴계집(退溪集)]을 읽고 공부하고 또 궁금해하는 일본사람들이 많다고 소개한다.
  <그들이 묻는 항목을 보면 退溪集과 관련한 것이 가장 많다. '도산서원은 무슨 군에 속합니까' '선생의 후손은 몇명이며 무슨 직책을 맡고 있습니까' '선생은 생전에 무엇을 좋아했습니까'라고 묻는 것을 다 적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申維翰은 조선통신사 일행이 에토로 가는 여로(旅路)에서 목격했던 주점의 청결성도 기록하였다.
  <주점의 여자종업원들은 반드시 화장을 하고 깨끗한 복장을 하며 그릇도 청결하다. 倭의 풍습은 그릇이 불결해도 먹지 않고, 주인을 보고 누추하다고 생각하면 먹지 않는다>
  그는 또 일본인들이 상당히 개방적이고 남녀간에 서스럼이 없다고 썼다.
  <여자들은 외국인한테도 손을 흔들고, 웃고 말하는 소리가 낭랑하며, 넓은 노상에서 남녀가 머리와 뺨을 만져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申제술관의 기록을 정리하면 18세기 초 일본인과 일본인사회는 이러하다.
 
  1. 사람들이 책을 많이 내고 많이 읽는다.
  2. 외국문물을 배우고 외국인에게 묻는다.
  3. 군사문화의 지배로 해서 사람들의 행동이 절도가 있으며 능률적이다.
  4. 깨끗하고 서비스 정신에 투철하다.
  5. 남녀간 차별이 심하지 않다.
 
  이상의 일본인 특징은 요사이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인의 눈에 비치는 일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인과 일본사회가 선진적인 면이 있었고 이런 바탕에서 명치유신이 가능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족성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생기고 바뀌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요사이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약300년에 걸친 평화가 오늘의 번영을 만든 기초가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申維翰의 관찰에 대하여 일본의 국민작가로 일컬어지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이렇게 평했다.
  <막부 시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국민의 비율은 70%나 되었다. 국민의 약10%는 士族, 즉 사무라이였는데 이들은 識者계급이었다. 農商工에 종사한 사람도 문자를 알았다. 維翰 선생이 보았다는 오사카가 그러했다. 이 도시의 私塾(사숙: 민간인이 운영하던 글방)에서 사용하던 초등교과서만도 1만 종류가 간행되었다. 그들은 聖賢의 道를 아는 데서는 모자람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글자와 주판을 모르고서는 상점에서 일해도 간부가 될 수 없고, 상선을 타도 선장이 될 수 없었다>
 
  막부 시대 무사들이 칼부림이나 하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을 잘못 보는 수도 없을 것이다. 무사가 다스리던 明治維新期의 일본 국민들은 양반이 다스리던 조선조의 백성들보다도 문맹률이 훨씬 낮았다. 지방 영주(大名. 다이묘) 등 무사들이 남긴 글과 그들의 취향을 보여주는 愛藏(애장) 예술품들이 일본의 지방 박물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수준이 높아 이들이 全人的인 교양인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사계급의 사람들은 또 상공업에 대한 지식도 높았다. 당시 조선조에서도 실학파 유학자들은 실용적인 지식에 밝았지만 권력을 잡지는 못했었다.
 
  시바료타로는 또 이렇게 申維翰을 비판한다.
  <무사가 지배하던 막부 봉건사회에서는 동시대의 유럽보다도 정밀하고 왕성한 상품경제가 발달했다. 이는 前期(전기)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는 270개 정도의 藩(번. 일종의 지방 領地)이 있어 산업과 학문을 경쟁적으로 발전시켰다. 藩(번)에는 儒官(유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과 같은 이데올로그가 아니었다. 이들은 사물을 볼 때 宋學的 관념론을 따르지 않았다. 일종의 인문과학적 思考法으로써 있는 그대로 관찰하려고 했다. 이는 상품경제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상업은 인간에게 意外의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사물을 바라볼 때 質과 量, 그리고 유통의 측면에서 보는 습성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습성이 돌고 돌아 학자나 사상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시바료타로가 말한 商業의 중요성은 핵심적인 의미를 띤다. 조선조 사회의 신분질서는 다 아는대로 士農工商이었다. 글을 아는 선비가 돈을 아는 상인을 경멸하면서 끌어간 사회였다. 이런 나라에선 國富가 쌓이지 않는다. 국부가 약하면 强兵도 예술도 불가능하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0년대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주변 참모들에게 '우리는 商工農士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工商農士가 맞지 않느냐고 반론했지만 朴대통령은 商을 우선시켰다. 물건을 사고팔아 이문을 남긴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主題일 뿐 아니라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장사하는 사람은 관념론이나 위선적 도덕주의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사물을 계산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위선적이고 경직된 도덕론에서 해방되면 인간이 유연해진다. 상업은 그 핵심이 이동이다. 물건과 돈뿐 아니라 인간도 이동해야 한다. 이동은 모험이고 교류이며 여행이고 배움이다. 상인들이 종합적 인간능력에서 가장 뛰어나게 되는 이유도 이동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商人的인 민족이나 국가는 대체로 일류국가를 만들었다. 유럽에서 보면 10~11세기의 바이킹, 베니스, 15~17세기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미국이 상인적 기질의 나라였다. 동양에선 징기스칸 제국과 일본과 통일신라가 상업적이었다. 이들 나라는 國益의 핵심을 돈벌이와 무역에 두었다. 이 國益을 지키기 위해서는 强兵이 필요하다. 즉, 富國强兵이란 불멸의 국가목표가 등장하는 것이다.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國富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내정치와 외교를 잘해야 한다. 상업적인 민족과 국가는 대체로 정치와 외교에 능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상업적이었던 나라 신라가 외교와 정치에서 특히 우수했다. 정치의 핵심은 권력승계의 제도화에 의한 국내안정이고 외교의 핵심은 동맹국 관리이다. 상인적 국가는 외교 군사(특히 해군) 무역에 능하다. 이들 나라는 대체로 商武국가이다(베니스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바이킹을 예로 들면 이들은 척박한 스칸디나비아에 살면서 장사에 종사하다가 여차하면 戰士로 돌변하여 약탈자 정복자가 되었다. 바이킹이 점령했던 시실리, 영국, 노르만디, 키에프 등은 상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했다. 바이킹은 정복지를 다스리는 재주가 비상했다. 바이킹의 후예국가들은 전부 일류국가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이런 통계도 있다. 일본의 일간신문 구독수는 총5300만부로서 인구가 두 배인 미국의 5520만부와 거의 같다. 요미우리 신문은 발행부수가 1010만부이다. 미국의 USA TODAY는 230만부이다. USA TODAY 발행인인 알 뉴하스는 일본신문이 뉴스를 공정하게 보도하고 교양있는 표현을 쓰며 독자들을 예우하는 면에서 미국신문보다 낫고 이것이 일본신문의 성공비결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신문이 일본신문의 공정하고 겸손한 자세를 배우라고 충고했다. 申제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이미 에토시대에도 출판과 독서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이런 독서의 전통 위에 일본의 신문이 서 있다. 일본신문들은 1면 광고는 반드시 책광고로 메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출처 | 조갑제닷컴
등록일 : 2017-05-11 09:42   |  수정일 : 2017-05-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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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 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月刊朝鮮>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 傳記》(全13권)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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