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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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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사랑은 한민족의 유전인자...야문 손끝 우리 민예품, 어제와 오늘

김형국의 미학산책 〈5〉

⊙ 김용준·김환기·최순우 등이 근대화의 물결 속에 외면당하던 옛 생활용품의 가치 재발견
⊙ 박경리, “한국인의 공예솜씨는 ‘생명력 있는 기상’이 자랑”
⊙ “(조선의 막사발은) 심상(尋常), 곧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김형국
1942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미국 캘리포니아대 도시계획학 박사 /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녹색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역임 /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 저술

글 |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 〈천상열차분야지도〉, 영조 연간. 종이에 탁본, 139 x 86cm, 국립민속박물관.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천상(天象)’ 곧 천체의 현상을 ‘차(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그려 놓은 그림이다. ‘차’란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대의 열두 구역을 말하고, ‘분야’란 하늘의 별자리 구역을 열둘로 나눠 지상의 해당 지역과 대응시켰다.
스위스 시계 명가(名家) 바쉐론 콘스탄틴이 작년 11월 , ‘2016년 대한민국 무형문화재대전’에서 오직 한국인만을 위해 제작한 시계 한 점을 공개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명품(名品)이라 했다. 1755년 창업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 제조사이니 그 명성은 묻지 않아도 알겠다.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시계를 하필 한국에서 공개했단 말인가. 그건 한민족의 빼어났던 문화 축적을 근거로 시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제 시계의 문자판에다 1395년 조선 밤하늘의 별 분포를 그려 담았던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옮겨 새겼는데 거기에 1467개의 별이 금으로 빛났다(도판 1 참조).
 
  이 회사는 그동안 세계 극상(極上)의 전통공예를 자사 제품에 적용하는 헤리티지(전승)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단다. 이번엔 한국 차례였다. 문자판에다 별 분포의 이미지를 원용했음에 더해 그 천문의 대표 이미지를 조선 왕실이 임금 말씀 등을 옥(玉)에다 새겨 담던 전통방식에 따라 어책(御冊)으로도 만들었고, 시계와 어책을 담을 상자 어함(御函)도 호화찬란하게 만들었다. 거기엔 옥장(玉匠)·칠장(漆匠)·금속공예장 등 우리 전통 장인들이 참여했다.
 
  어쩌다 이런 현대화 작업이 실현되긴 했지만, 우리 전승공예는 한마디로 지금 빈사상태다. 한국문화재재단이 무형문화재대전을 여는 것도, 외국 시계 명가와 손잡는 방식으로 멸종 위기 전통공예의 현대화 시도도 응급수혈책의 하나다. 여기에 우리 쪽 ‘포스코 1%나눔재단’도 참여했다. 포스코가 전남 광양에도 공장을 갖고 있는 지연을 살려 광양 등지에서 옛적 손칼을 만들어 온 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粧刀匠)들을 지원해서 그 장식기법을 고급 만년필의 쥘손 부분에 적용한 성과물도 선보였다.
 
 
  명품 사랑은 한민족의 유전인자
 
  명품은 자못 사람을 홀린다. 복모음(複母音) 발음이 까다로운 프랑스 말 상표의 핸드백이 한국만큼 잘 팔리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명품가방, 명품시계 등이 혼수감으로 또는 뇌물로 ‘사랑’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명품 선호의 자가 변호도 일리는 있다. 명품은 그만한 값을 한다는 것. 이것저것 갖기보다 명품이 과시의 멋에다 내구성이 좋기 때문이란다.
 
  한국인의 명품 사랑은 전통적으로 명품의 생산과 소비가 적잖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걸 물증하려는 듯,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서울의 한 문화재단이 개최한, 무려 600여 점이 출품된 〈조선공예의 아름다움〉 전시(가나화랑, 2016.12.15.-2017.2.5)는 보는 이마다 찬탄 일색이었다.
 
 
  고물에서 민예품으로
 
  생활용품이란 세월이 흐르면 쓰레기 신세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 가운데 용품의 용도 재발견과 함께 은근한 아름다움도 새로 확인되면서 ‘민속예술’, 줄여서 ‘민예’란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거기엔 그만한 선지(先知)적 안목이 있어야 했는데, 동양문화권에선 20세기 초반 일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혜안(慧眼)이 있었다.
 
  견주어, 우리는 현대사의 굴곡 탓에 전래 생활용품의 아름다움이 간과·천시된 세월이 오래였다. 일제 강점기는 망국의 유산처럼 치부되어 모든 것이 ‘엽전’이란 이름의 하치로 하대받았다. 독립국가가 되어 선진의 박차를 가할 때도 사정은 어려웠다. 공업화 물결에 홀린 나머지 수공 제품보다 기계 제품이 오히려 대접받는 사이에 옛 생활용품, 이를테면 호마이카장에 밀려 느티나무 반닫이가 구닥다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 시대물결 속에서도 청류(淸流)가 흘렀다. 일본인에게서 배운 ‘민예’란 말이 깨우침의 잣대가 되어 예정된 순서처럼 옛 공예품에 담긴 미적 감각을 깨달은 한국 식자들이 나타났다. 《근원수필》의 천하 명문장 김용준(金瑢俊) 미술사학자, 그와 호형호제했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림의 김환기(金煥基) 화백 등이 주역이었다. 전자(前者)는 우리 목기(木器)를 높이 쳤고, 후자(後者)는 백자 항아리 중독이었다. 두 김씨의 비범한 감각을 눈여겨보고 이를 더욱 진경으로 이끈 이가 최순우(崔淳雨)였다.
 
  아름다움의 세계에선 “한 천재의 눈이 만인의 눈을 대신한다”했다. 최순우와 함께 1970년 전후로 우리 사회에 그런 선제(先制) 안목이 여럿 나타났다. 산업화를 이끈 창의적 기업 역군들의 발신(發身)처럼, 전통문화 아름다움의 재발견에도 발군의 안목들이 등장했던 것. 그럴 만한 환경이었던 것이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묵은 세간이 쏟아져 나와 쓰레기 신세로 전락하기 직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가운데 실용 또는 미감(美感)으로 재활용 가치가 있다며, 서울로 치면 인사동, 황학동, 아현동, 장한평 등지로 뽑혀 왔다. 그냥 묵은 것이라며 일단 ‘고물’로 분류되었다가 볼 만한 것은 ‘고미술’로 뽑혔다. 그때 민화를 재발견한 건축가 조자용(趙子庸)과 언론인 김철순(金哲淳), 목기를 사랑한 화가 김종학(金宗學), 각가지 고물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고 ‘발에 땀이 났던’ 잡지 발행인 한창기(韓彰琪), 언론인 예용해(芮庸海) 그리고 화가 권옥연(權玉淵)·이대원(李大源)·변종하(卞鍾夏) 제씨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문화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민예품이 드디어 문화재로
 
〈쇠 인두〉, 20세기 초, 무쇠, 길이 46·43(위·아래)cm.
버선코를 쏙 빼닮아 ‘코인두’라고도 했다. 코인두에 달린 쇠 손잡이는 정절(貞節) 상징 대나무의 마디를 장식했다.
  이들 문화운동의 기운을 받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가 드디어 1975년 ‘한국민예미술대전’을 개최했다. 이전만 해도 고미술이라 하면 서화·골동을 말함이었다. 옛 도자기도 모두가 골동은 아니었다. 20세기 전반만 해도 청자는 일본말에서 따와 상수물(上手物) 또는 ‘예술’이라 높이 쳤고,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다며 백자는 하수물(下手物) 또는 ‘공예’라고 낮추어 보았다.
 
  그게 우리의 가까운 역사였다. 그런데 한국민예미술대전을 통해 혼례용 나무기러기, 옛 복식은 물론 옹기조차 문화유산으로 확인했으니 그건 역사 새로 쓰기에 다름 아니었다. 바야흐로 민예품이 문화재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그 착상과 연출의 총책이 바로 최순우였다. 그런 점에서 공공기관에서 개최했어야 마땅한 2016년 말의 ‘조선공예의 아름다움’은 바로 1975년 한국민예미술대전의 확대 재현임과 동시에, 탄생 백년을 맞았던 희대의 박물관 사람 최순우에 바친 헌사였다.
 
  민예 곧 민구(民具)의 아름다움을 흔히들 일본사람 조어로 ‘용즉미(用則美)’라 했다. 쓰임새의 완벽을 기하는 사이에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배어 들었다는 말이다. 전라도 순천의 선암사 앞 무지개 돌다리를 보면 쓸모와 아름다움의 겸비를 눈물겹게 실감한다.
 
  우리 민예품의 특성을 동북아 삼국과 대비하는 시각도 항상 주목을 끈다. “중국인은 유연하나 강인하고, 일본인은 치밀하고 절제적인 데 견주어, 한국인은 약간 경쾌하다”는 것(이종석, 《한국의 전통공예》, 1994). 우리 공예의 경쾌함에 대해선 생활미감에 대해 비상한 감각을 지녔던 통영 출신 박경리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
 
  소설가의 말인즉 한국인의 공예 솜씨는 “‘생명력 있는 기상’이 자랑”이라면서 특히 여성들의 버선, 거기에 자리한 버선코를 들먹였다. 버선 끝선이 발등 끝에서 끝나지 않고 끝자락에서 하늘을 향해 슬쩍 치켜든 기세가 볼 만하다는 것. 이를테면 일본 버선이 수직사회에 길들여진 그곳 백성들의 생활상을 말해 주듯 ‘부지(俯地)’ 곧 ‘땅으로 꾸부린’ 형상이라면, 전통시대에도 뒤에선 임금도 욕했을 정도로 수평사회적 갈망을 숨기지 못했던 한민족은 버선코에서 보듯 ‘하늘을 우러러 넘보는 앙천(仰天)’의 활발한 품세(品勢)라 했다(도판 2 참조).
 
 
  민예품 조품에도 흥겨움이
 
〈화각장생문함〉, 18세기. 높이 32.8 x 너비 65.5 x 깊이 35.0cm.
화각판이 122개가 사용된, 초대형 화각함이다. 1975년 한국민예미술대전에도 출품되었던 서양화가 권옥연 구장이다. 목기 등의 민예품도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되는 날 제일 앞자리에 놓일 만한 명품이다.
  민예품이라 하지만 왕실이나 그 주변의 소용이던 상품(上品)이 있었고, 한편 백성들이 무상으로 쓰는 품질이 낮은 용품(庸品) 또는 조품(粗品)이 있었다. 신분사회에서 생활용품도 귀천(貴賤)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랑이다리소반인 호족반(虎足盤)은 양반들 소용임에 견주어, 천민들은 구족반(狗足盤) 곧 개다리소반이 고작이었다는 일설도 전해졌다. 벼루함 등 양반 용품에 개다리받침이 많을 걸 유추한다면 소반다리 모양으로 반상(班常)을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아무튼 세상은 돌고 돈다더니 소반이 민예품이 되고부터는 사태가 역전되어 개다리가 호랑이다리보다 훨씬 더 값비싸졌다.
 
  왕후장상이 사용한 용품에는 극상의 기예가 동원된, 그 ‘손끝 야문’ 솜씨는 현대인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준다. 나라 조직에 딸린 관장(官匠)이 만들었으니 돈과 시간에 제약이 없었던 용품이 태어났다(도판 3 참조).
 
〈웅천 차사발〉, 15-16세기. 높이 7.5 x 입지름 12.5cm. 권대현 소장.
조선에서 건너간 분청 계통의 이른바 〈이도차완(井戶茶碗)〉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사진의 차사발은 이도 계통의 ‘웅천(熊川)’. 막부(幕府) 쪽 마쓰다이라(松平) 가계의 가문(家紋)이 보이는 도자기 상자가 말해 주듯 거기서 다시 이 땅으로 흘러온 것이다.
  민예의 아름다움은 그런 극상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우리 선조들이 일상으로 사용했던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어디 한 군데 꾸민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보다 더 심상(尋常), 곧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울 수 없다. 한마디로 하치의 물건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라던 야나기의 찬탄대로, 천하제일의 찻그릇으로 대접받고 있다(도판 4 참조).
 
  일본으로 건너간 사발 말고도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 온 아주 간략한 조품도 가까이 찾을 수 있으니 여인들이 물을 깃던 독개 그릇이 좋은 보기라 하겠다. “그 은은한 동철(銅鐵)색의 유택(釉澤)에 열 손가락을 번개같이 휘둘러서 그려낸 큰 무늬들의 신선한 아름다움은 꽃인가 하고 보면 꽃도 아니고 풀잎인가 하고 보면 풀잎보다도 더 멋진 추상미를 이루어서 이것을 단숨에 그려낸 도공들의 흥겨움이 실감나게 몸에 젖어드는 느낌”이라 했다(최순우, 〈조선조의 민속공예〉, 《공간》, 1968.8; 도판 5 참조).
 
〈옹기동이(독개그릇)〉, 20세기. 높이 27.8 x 입지름 28.2 x 바닥지름 22.5cm.
물동이로 손잡이 둘이 붙어 있다.
  독개 그릇에 그걸 만들던 옹기장의 흥겨움이 느껴진다 했지만, 기실 그들 장인은 하나같이 밑바닥 서민이었다. 모두들 자기 자식들은 ‘그짓’을 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요즘 말로 3D 업종이었다. 백자 접시에다 시문(詩文)으로 남긴 “어느 곳이 좋은 봄 부잣집인가, 눈앞의 고생은 날마다 늙는 것뿐이라네(何處春深好 春深富貴家 眼前何所苦 唯若日西斜)” 했던 조선 도공의 푸념이나, ‘신발장수 아들, 맨발로 다닌다’는 서양 속담이나, ‘염색공, 무염(無染)바지 입는다’는 일본 속담은 바로 예나 지금이나 장인들의 어려운 형편을 말해 줌이었다.
 
  대우와 대접이 형편없었음에도 장인들이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었다. 굳이 역설이 실현될 수 있었음은 장인 일에서 얻는 남모를 보람의 당당함 또는 성취동기의 실현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무를 다듬든, 돌을 쪼든 움직이는 손에 탄력이 붙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기쁨이고 그게 쌓여 원하던 바 ‘작품’을 완성하면 당신의 분신 같다는 뿌듯함에 그간의 시름을 모두 잊고 마는 그런 경지였다.
 
 
  우리 민예의 앞날은?
 
  민예의 전승품이나 현대물은 수작업이기 때문에 고가·사치품이기 쉽다. 사치품에 대한 세계적 수요는 무척 높다. 우리의 민예도 살아남자면 그런 수준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최순우는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수다스럽지 않다, 조용하다, 담담하다, 편안하다, 대범하다, 객기가 없다, 과장이 없다, 거드름이 없다, 아첨이 없다, 욕심이 없다’고 적었다. 민예도 그런 범주, 그런 특성이다.
 
  이런 우리의 민예는 서양미술사에서 한 경지를 이뤘던 ‘일상 생활용품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설계하려 했던’ 20세기 초반의 독일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과도 한통속인 점에서도 그 경지는 새삼 단단히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바우하우스는 물론 경기도 광명에도 둥지를 튼 스웨덴의 세간살이 점포 이케아(IKEA)도 종교개혁이 서구 세속사회로 하여금 간결·수수함을 지향하게 만든 변혁의 한 결실이라 했으니(The Economist, 2017.1.7), 우리 공예미학의 세계성에 대해 더욱 자신감을 갖고 사치산업 육성 등에도 한번 힘을 쏟아볼 만하다.⊙
 
[월간조선 2017년 3월호 / 글=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3-16 09:48   |  수정일 : 2017-03-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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