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칼럼 | 문화
  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100년 전 모던 뉘우스 - 근대의 역사학

“조선인은 도처에 강용(强勇)한 자취 남겨”

⊙ 관념적·철학적·시적(詩的) → 이지적·사무적·기술적으로 나아가야
⊙ 문자 보급 운동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로 집약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문화재청은 2011년 10월 24일 《조선일보》 사료관에 소장 중인 《조선일보》 문자 보급 교재 3종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세기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는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출발한다. 서구의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역사서술 방식, 역사인식 태도 등)을 적극 받아들여 민족적 저항과 식민지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식민교육을 받은 역사학도가 배출되는 상황이었으나 근대 역사학계는 민족적 현실에 주목, 강렬한 민족정신의 흐름을 새로운 역사학에 담았다.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신채호(申采浩)의 뒤를 이은 근대 역사학자로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문일평(文一平)이 대표적이다.
 
  위당(爲堂) 정인보(1893~1950)는 일제 관학자(官學者)들의 한국 역사 왜곡(한국의 역사가 중국이나 일본의 식민지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날조)에 분노, 1930년대 이후 역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역사의 본질을 ‘얼’이라는 민족정신에서 찾으려 했던 인물이다.
 
  민세(民世) 안재홍(1891~1965)은 3·1운동, 신간회, 조선어학회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된 애국지사다. 1930~40년대에 걸쳐 쓴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은 단군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 우리 역사의 대계를 고조선 사회의 발전 과정이란 논리로 정리했다. 우리나라가 중국인 기자(箕子)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기자조선’의 문제를 ‘단군조선’의 계승관계로 파악했다.(김용섭, 〈1930~40년대의 민족사학〉 참고)
 
  그는 《조선일보》에 재직할 당시 단재(丹齋·신채호)의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신문 학예란에 연재하기도 했다. 민세는 단재사학의 계승자였다.
 
  민세가 쓴 〈1400만 문맹과 대중 문화 운동〉은 당시 《조선일보》가 추진했던 문자 보급 운동을 소개하는 글이다. ‘역사학은 민족 전체의 성장이나 발전 과정에 관한 학문이 아니면 안 된다’는 민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잡지 《삼천리(三千里)》(1931년 9월호)에 실렸다. 글을 쓸 당시 민세는 《조선일보》 사장(1931.7~1932)이었다. 그는 사장을 맡으면서 “1400만 문맹을 깨우치는 대중 문화 운동인 문자 보급 운동을 한 7년 잡고 매년 대대적으로 진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해 《실생활》 9월호에 실린 〈조선인 생활화의 3표준〉도 민세의 글이다. ‘조선인은 강용(强勇)하며 유약하지 않지만, 사고를 관념적·철학적·시적(詩的)에서 이지적·사무적·기술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세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평택·무소속)됐지만 6·25 당시 납북됐다. 북한 평양방송은 1965년 3월 1일 그가 평양 시내 한 병원에서 75세 일기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1989년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했다.
 
 
  1400만 문맹과 대중 문화 운동
  안재홍(安在鴻)
 
안재홍이 《조선일보》 문자 보급 운동에 대해 《삼천리》에 쓴 〈1400만 문맹과 대중 문화 운동〉.
  상식 보급과 민중 보건의 선양 운동을 골자로 삼아서 《조선일보》는 그 대중과의 접촉을 면밀히 하려고 합니다. 언론기관이 대중을 떠나서 아니 될 것은 누구나 여기는 바로 두말할 것 없으며 민중 보건에 관한 선양은 아직 그 초보도 잘못 걷는 터이니 지레 말을 말기로 하고 조선일보사에서 벌써 3년째나 계속 사업으로 하는 이 문자 보급 운동 이야기를 조금 하려 합니다. 문자 보급은 대중 문화 계발(啓發)의 첫걸음으로 이 운동이겠고 또 그것을 일사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온당하려니와 그는 대단치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자 보급 운동을 나는 불언실행으로 하는 《조선일보》의 사시에 관한 일대사업이라고 봅니다. 무어 그 사업을 실행할 적마다 사고(社告)를 크게 내고 기사를 부품하게 선전하고 사설로 고취하고 또 반원에게는 일정한 현상(懸賞) 형식으로 하야 성대한 위안과 수상식까지 하니 온통으로 대대적 선전거리가 되는 것이라, 어떻게 불언실행이냐고 당장 변박(辨駁)이 있을 줄 아나, 그러나 그런 것은 다만 그 사업 진행의 사무적 순서요, 그 본질을 논핵하고 선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 아는 것이 힘
  ○ 배워야 산다!
 
  의 짤막한 표어로서 표시됨과 같이 알고저 배우기를 고조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부품한 선전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선에 1700만 인의 문맹이 있으니 학령에 달(達)치 아니 한 어린이를 약 200만으로 치고 노쇠한 이와 중년 이상의 부녀로서 좀체로 교양을 새로 받기 어려운 이를 100만이라고 하더라도 1400만가량의 문맹이 광명인 교양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계 숫자상으로 따지어 보건대 그 초등교육기관에서
 
  조선 인구수 20,437,219인
  보통학교 수 1,710교
  매 1교당 인구수 11,952인강(人强)
  보교(普校) 생도 수(公私合) 487,878인
  매 생도당 구수(口數) 42인
  전 조선 학령 아동 2,450,000인
  100인 중 취학 비율 19.9%
 
삼천리 1931년 9월호 표지.
  즉 전(全) 학령 아동에 견주어 2할 미만의 취학률도 200만에 가까운 아동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요, 최근에 발표된 조선의 서당 총수 11,469개소, 그의 생도 162,247인이매 그를 보통학교 생도 수에 가산하더라도 74만630인에 불과하고 하물며 서당 교육의 생도는 ‘한글’을 못 배우는 자 많으니 진정한 현대적 대중교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보통학교가 늘어간다 할지라도 매년 학령 아동이 과잉하여 감이 퍽은 많으니까 이러한 강습교육이 매우 필요할 것입니다.
 
  이 문자 보급 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기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1929년 7월부터입니다. 그때 석판 인쇄로 한, 한 장의 ‘한글원본’과 반원증과 한글 깨친 자의 자필증명용지를 준비하고 겨우 10일 남짓 선전하였던바,
 
  반원 지원자 409인
  한글원본 4만 교
 
  를 배부하게 되었었고 추기(秋期)에 가서 보고자만의 성적으로
 
  반원 91인
  1. 한글 해득자 약 300인
 
  이었습니다. 1930년인 작년에는 미리부터 약간의 준비가 있었고 ‘한글원본’은 약 20과(課)의 비교적 정밀한 교재로 출판허가에 의한 단행본 교과서로 하고 반원을 모집한바,
 
  반원 지원 900여 인
  1. 반원 참가학교 대중소 46개교
  1. 한글원본 약 9만 부
 
  추기에 가서 보고된 성적은
 
  반원 161인
  1. 한글 해득자 1만567인
 
민세 안재홍.
  이니 이로써 보면 막대한 성적도 아닌 것 같으나 그러나 시내에 있어 조선일보사와 가장 인접지에 있는 모 여자고보 같은 데는 생도가 다수 출동하야 각각 우량한 성적을 내었으면서도 ‘무어 나도 민족봉사의 자동적 열성으로 한글을 가르친 것인데 상을 받으려는 것처럼 보고를 길드란히 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일절 보고가 아니 왔습니다. 이런 것은 아름다운 일이면서 한편으로는 큰 유감인 것은 모처럼 문맹을 타파하고서도 그 통계조사가 잘 안 되는 것은 자못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시의 통신과 기타 상황으로 보아 다수 미보고 반원의 성적을 아울러 양년(兩年) 동안 3만의 문맹이 타파되었다고 추단(推斷)합니다. 그는 어찌 되었던지 연령에는 경향 각지에서 향응(響應)한 정도가 전보다도 훨씬 나았으니 이것은 미리 말을 앞세우지 않는 바이오, 방금 《조선일보》에 그 문자 보급 반원의 동원은 매일 보도(保導)되는 터입니다. 금년에는 줄잡아서 보고된 해득자 수가 3만 수천 인에 달하리라고 예상되는 터이며 이로써 이 운동은 보고되는 성적보담도 청년 각계에 매우 깊은 이해를 가지는 것으로서 지금부터는 소사반공배(小事半功倍·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둔다)로 발전될 것입니다.
 
  금후에는 다시 한 7년 잡고 매년 대대적으로 진행하겠는데 거기에는 다만 한글의 읽고 쓰는 단순한 교양에 한하지 않고 계단적으로 그 방향 내용을 아울러 상향시키겠습니다. 다만 불언실행이란 취의에 의하야 미리 허풍을 떨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선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침만으로 만족하라’는 뜻의 말을 반원에게 읽어주기로 하며 진행하는 것입니다. 전후 10년 동안이면 꽤 좋은 성적이 나타날 줄 확신합니다.
 
  (출처=《삼천리》 1931년 9월호)
 
 
  조선인 생활화의 3표준
  - 과학 기술 관리의 간능

  幹能·재간과 능력, 편집자 註
  안재홍

 
안재홍은 〈조선인 생활화의 3표준〉에서 ‘한 사람 몫의 일꾼 노릇을 할 만한 지식·기량·기술 및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조선 청년들은 퍽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려운 시대, 어수선한 사회에서 온갖 복잡한 문제에 머리를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주의(主義)상 문제로도 온갖 미숙한 사상과 주의로써 매우 복잡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여기에 논할 경우는 못 되지만 한 가지 조선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 결점을 깨닫고 일상생활에서부터 전진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범연하게 보아서 인간으로서 생활화하도록 하자는 것이겠습니다. 누가 생활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리오마는 역사적, 사회적 제(諸)조건의 아래에 가장 그 처지에서 생활해 가고 생활의 승리자·성공자 될 만한 도덕적 제조건을 갖추도록 자기를 인간으로서 완성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한 사람으로서 훌륭한 덕성의 소위자(所謂者)가 되고 상식도 상당히 풍부하고 또 사교상으로 보아서도 나무랄 점 없을 만큼 좋은 사람일지라도 그저 다 ‘좋은 사람’으로 되어가지고서는 사회생활의 1차 더욱 똑똑히 말하자면, 사회적 협동 책임자의 일원으로서는 매우 쓸모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정치가로서 군인으로서 재정가로, 상업가로, 기타 목사, 기수(技手), 사무원, 직공 등으로서 무엇이고 한 사람 몫의 ‘일꾼’ 노릇을 할 만한 지식·기량·기술 및 경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두 정치가, 군인, 재정가, 기타 통솔 지배의 지위에만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니까, 결국은 대다수의 인민은 모두 일반적인 과학적 지식·기술 및 관리의 간능으로서 사무가, 기술가, 직공 등의 직능을 할 만큼 스스로를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많이 정치가나 군인이나 기타 통솔자의 지위에 갈지라도 한편으로는 무어시고 자기의 전문하는 ‘한 가지 재주’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독일인은 이전에 황제나 황후나 총리대신까지라도 모두 기술(技術)상으로 한 가지 재주씩은 다 배워서 순연한 일개인으로 직업인으로 살려 하면 살아갈 만큼 또 한 사람 몫은 할 만큼 하는 일종의 불문(不文)의 법이 있는 것이요, 노국(露國·러시아, 편집자 註)인은 어떤 한 사람이고 혹 만부득이 외국에 망명이라도 하는 경우에는 어데 가든지 곧 생활비는 나오도록 할 만큼 지식·기술을 배웠던 것입니다. 이만큼 되자면 물론 일개인의 의사나 노력으로만 될 것이 아니오, 전 사회의 모든 조건이 서로 맞아야 할 것이니까, 그리 쉽게 말할 수도 없지마는, 현대 청년은 우선 그 마음부터 그렇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실생활》 1931년 9월호 표지.
  조선사람은 강용(强勇)한 인민입니다. 전설시대로부터 전 유사시대를 통하여서 조선인은 도처에 모두 강용한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용담이나 전쟁사를 들춰낼 것도 없이 명백합니다. 지금은 모든 역사적 원인이 문약(文弱)·유약(儒弱)·유약(柔弱)한 것 같은 상태에 빠져 있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만일의 때에 발현되는 조선인의 본성은 결코 유약한 것이 아닙니다. 또 조선인이 개인으로서 퍽 총명한 소질을 가진 것도 자타가 모두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이 민족적으로 사회적으로 그 천재를 잘 발휘하느냐 그는 실로 그렇지 못합니다. ‘어려서 신동, 자라서 바보’라는 말이 있지마는 조선인은 이러한 경우에 있습니다.
 
  이는 첫째, 시대 경우 등 사회적 원인이 그러한 것이니 이 점은 따로이 크게 논할 바어니와 순연한 인위적 견지에서 본다 하더라도 조선인은 대체로 관념적·철학적·시적(詩的) 또 공상적으로 흘러가서 확고, 또 정세(精細)하게 이지적·사무적·기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편이 많습니다. 이는 요컨대 그 천품의 관계도 많겠지만 자◦(판독불가·편집자 註)로 유교편중·도학편중·문학편중인 유생(儒生) 중심의 그릇된 치자(治者)도덕의 발호하던 유폐(流弊)가 그 고질을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현대의 청년은 인간으로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마는 이외에 어떻게 현실사회의 각 방면에 나아가서 일개의 일꾼으로 쓸모있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오, 그를 위하여서는 모든 정밀한 실제 지식을 주는 과학—더욱이 자연과학—과 기술 및 관리의 간능에 통효(通曉·환하게 깨달아서 앎)하도록 평상(平常)에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맡았으되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는지 모르는 관리의 간능이 서투른 사람은 조선인 사이에 퍽 많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더라도 기술과 관리의 간능이 없어서 실패하는 일은 매우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평이한 뜻이지마는 각각 여념(餘念)할 표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실생활》 1931년 9월호)
 
[월간조선 2017년 3월호 / 글=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3-13 08:34   |  수정일 : 2017-03-13 09:28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맨위로

하단메뉴

개인정보 취급방침독자센터취재제보광고문의조선뉴스프레스인스타그램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