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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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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지인지람(知人之鑑)...명군(明君) 성군(聖君)도 아첨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 한 문제, 꿈에서 자기를 도와준 등통을 총애
⊙ 세종도 아들 임영대군의 사통(私通) 문제를 우승지 조서강이 가볍게 처리하자 좋아해
⊙ 당 태종, “임금이 조금이라도 해이하면 곧 위태로움과 멸망이 뒤따르게 되는 것”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 성군 세종조차도 자식의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 가라는 신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영행열전(佞幸列傳)〉에서 이렇게 말한다.
 
  “힘써 농사짓는 것이 풍년을 만나는 것만 못하고 정성껏 임금을 섬기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추는 것만 못하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다.”
 
  아첨꾼이 충신보다 임금의 눈에 잘 들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통찰이다. 〈영행열전〉에서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한나라 문제(文帝)가 지극히 총애한 등통(鄧通)을 들고 있다. 사실 문제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명군(明君) 혹은 성군(聖君)이라는 평을 받는 임금이다. 조선 역사에서 세종에 해당하는 선정(善政)을 베푼 인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임금이 영행 혹은 폐행(嬖幸)에 빠져든 것일까?
 
 
  등통과 이연년
 
  등통은 재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촉군(蜀郡) 남안(南安) 사람이었는데 노를 잘 저어 황두랑(黃頭郞)이 됐다. 일종의 선장이다. 어느 날 문제가 꿈에서 하늘에 오르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다. 그런데 마침 한 황두랑이 뒤에서 밀어 주어 하늘에 오를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 황두랑의 옷에 등 뒤로 띠를 맨 곳의 솔기가 터져 있었다. 잠에서 깬 문제는 물가로 가서 황두랑들을 둘러보다가 옷의 등 뒤가 터진 등통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만난 인연은 이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오직 이것만으로 등통을 아껴 주었고 등통도 성품이 조심하고 신중해 궁궐 밖의 사람들과 사귀기를 싫어해 휴가를 주어도 궐 밖을 나가지 않았다. 열 차례 넘게 거액의 돈을 주었고 벼슬도 사대부에까지 올려 주었다. 심지어 문제는 등통의 집에 가서 놀기까지 했다. 문제의 등통 사랑은 도를 넘어섰다. 한번은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을 불러 등통의 관상을 보게 하니 “가난해서 굶어죽을 상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문제는 등통에게 구리 광산을 주어 마음대로 돈을 만들어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문제와 등통의 이 같은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실마리가 있다. 문제는 오랫동안 종기를 앓았는데 그 때마다 등통은 황제를 위해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 한번은 문제가 태자를 불러 고름을 빨아내게 했다. 태자는 어쩔 수 없이 빨아내기는 했지만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평소 등통이 아버지의 고름을 빨아낸다는 말을 듣고서 한편으로는 부끄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등통을 미워했다. 훗날 태자가 즉위했는데 그가 경제(景帝)다. 그는 사사로운 동전 주조를 금지했고 등통은 불법적으로 동전을 주조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실제로 등통은 얼마 안가 재산을 다 빼앗긴 채 남의 집에 얹혀살다가 죽었다고 사마천은 기록하고 있다. 정치적 사건에 관여하다가 주살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지 모른다.
 
  무제도 명군에 속하지만 이연년(李延年)이라는 총신(寵臣)이 있었다. 이연년은 궁형을 당한 뒤에 환관이 된 인물인데 누이동생이 춤을 잘 춰 무제의 눈에 들었고, 이연년도 작사 작곡에 능해 제사에 필요한 음악을 제정하는 데 열성적이었던 무제의 큰 총애를 받았다. 누이동생은 무제의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연년이 궁녀들과 사통(私通)을 하고 태도가 교망하고 방자해 누이동생이 죽자 처형됐다.
 
  등통이나 이연년은 나라를 망치게 한 경우는 아니지만 명군이나 성군도 아첨에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금도 사람인지라 신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호불호에 휘둘릴 수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례를 소개한 사마천은 “심하구나! 사랑과 미움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고 탄식했던 것이다.
 
 
  세종의 귀를 막은 도승지 조서강
 
  이런 옥의 티는 우리의 세종대왕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세종23년 3월 9일부터 세종25년 9월 3일까지 2년 반 동안 도승지로 재직한 조서강(趙瑞康·?〜1444년, 세종26년)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다소 부정적이다. 도승지로 있으면서 세종의 눈과 귀를 막았다는 이유에서다.
 
  조서강은 개국공신으로 문하부 참찬사를 지낸 조반(1341년, 고려 충혜왕 복위2년~1401년, 태종1년)의 둘째 아들이다. 태종14년 문과에서 마지막으로 두 개의 최상위 답안지가 태종 앞에 주어졌을 때 태종이 임의로 고른 것은 정인지의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조서강의 답안지였다. 촉망 받는 신진 엘리트였던 셈이다.
 
  관리로서 그의 경력은 주로 사헌부・사간원에서 쌓았다. 사헌부 감찰로 있을 때인 세종10년 10월 22일 세종은 종친의 문제를 부적절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헌부 관리들을 대거 유배하거나 파직했다. 이때 조서강도 강음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러나 죄가 중하지 않아 다음해 2월 3일 석방되고 세종13년 6월에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의정부 사인(舍人)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이때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한다.
 
  2년 후인 세종15년 6월 3일 우사간이 되고 3년 후인 세종18년 10월 18일 좌사간으로 승진한다. 이어 중추원 첨지사,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세종21년 3월 우승지, 세종22년 8월 좌승지를 거쳐 마침내 세종23년 3월 9일 도승지에 오른다.
 
  조서강은 그다지 강직하다거나 ‘노(No)’라고 말할 줄 아는 위인이 아니었다. 우승지로 있던 세종21년 11월 3일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가 궁중의 음식물과 물품을 관장하는 내자시(內資寺)의 종 가야지와 간통을 한 것이 발각되어 문제가 됐다. 세종은 진노했다. 가야지는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승지 조서강이 나서 “남녀 간의 욕심은 인지상정인 데다가 임영대군은 나이도 어리니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습니다”며 “가야지를 제주도에 보내게 되면 말이 밖으로 퍼질 수 있으니 대신 그 아버지에게 죄를 물어 멀리 유배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한다. 명백한 아첨이었다.
 
 
  자식 앞에서는 세종도 …
 
  재미있는 것은 이런 조서강의 아첨을 세종도 반기고 있다는 것이다.
 
  “내 여러 아들 중에서 이구만이 유독 음탕하고 방자하여 걱정이 많은데 너희들이 ‘연소한 사람의 음탕 방자는 이구만이 그런 것이 아니니 책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니 내가 너희들의 말을 옳게 여긴다.”
 
  언제나 교언영색(巧言令色), 아첨은 멀리하고 직언(直言)에만 귀 기울일 것 같은 세종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첨에 늘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이나 가족의 문제 앞에서는 세종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위인(偉人)’ 세종대왕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례는 계속된다.
 
  세종22년 2월 8일 양녕대군이 서울에 집을 짓자 대사헌 윤번과 사간원 지사 황수신이 궐문 앞에서 부당함을 상소했다. 그러나 우승지 조서강은 세종이 양녕 문제와 관련된 대간의 말은 전하지 말라고 했다며 상소문을 세종에게 계달하기 어렵다고 노골적으로 이들에게 말한다. 두 달 후인 4월 23일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건한 흥천사 재건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에 국고를 지원하겠다고 하자 승지들은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신들의 척불(斥佛)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실록은 ‘조서강 등이 왕의 말을 출납하는 데 있어 아첨하고 뜻을 맞추어 조금도 비판적 의견을 내거나 말리지 않아서 임금(세종)이 부처를 높이는 행사를 이루게 되었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이방원의 리더십은 타고난 자질과 더불어 진덕수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태종3년 5월 21일 태종은 옥새와 각종 제사기기들을 관장하던 상서사에 명하여 《대학연의》의 서문과 신하들이 그 책의 내용에 관해 쓴 글을 정리해 병풍을 만들게 했다. 교훈적이거나 중요한 구절들을 늘 가까이 두고자 함이었다.
 
  태종이 주로 《대학연의》에서 배웠던 바는 바람직한 군신(君臣)관계에 집중해 있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면 리더십 문제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태종11년과 12년에 그가 《대학연의》를 어떻게 이해해서 어디에 적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사들이 집중해 있다.
 
 
  아첨이 싹틀 여지를 자른 태종
 
  태종11년 5월 20일 그는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 격으로 훗날 세종이 도승지로 명칭을 바꾼다) 김여지와 동부대언 조말생을 불러 《맹자(孟子)》를 강하다가, “신하가 임금을 섬김은 예(禮)로써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임금을 옳다고만 섬기면 아부하는 자다’ 했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조말생은 “만약 한결같이 임금만 섬기기로 마음먹어 임금의 과실을 보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첨하고 순종만 함으로써 임금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비위만을 맞춤으로써 임금을 즐겁게 하는 데만 애쓰는 자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태종은 동의하면서 《대학연의》에서도 그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고 덧붙인다. 그만큼 《대학연의》는 그의 정신 깊숙이 자리 잡은 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태종은 그해 12월 15일에는 아예 우부대언 한상덕에게 명하여 《대학연의》에 있는 말 중에서 귀감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편전의 벽에 크게 쓰도록 지시했다.
 
  “《대학연의》는 고금의 격언을 모아서 만든 글인데, 내가 매번 읽을 때마다, 덕형(德刑·덕을 베풀 때와 벌을 행할 때) 선후(先後·일을 할 때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분별과 토지제도 그리고 외척을 멀리하는 것이 중대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더불어 그는 직언(直言)과 모함의 차이를 구별해 내는 문제의 중요성도 《대학연의》에서 배웠다고 털어놓는다. 태종12년 10월 20일 태종은 신하들과 신문고(申聞鼓) 문제를 논하다가 남을 모함하는 참소(讒訴)와 직언을 구별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렇게 말한다.
 
  “참소하는 말을 정확히 가려내기가 가장 어렵다. 만약 임금이 신하들의 직언(直言)을 참소하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그 실수는 큰 것이다. 《대학연의》에서도 국왕이 늘 경계해야 할 것 중 참소나 중상모략이 으뜸이라고 했다. 매우 절실한 말이라 생각한다.”
 
 
  임금 스스로 마음을 바로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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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 이세민은 측근의 아첨이 작용할 여지를 막으려 노력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종은 자신과 가까운 환관들에 대해서도 지극히 엄격한 자세를 견지했다. 아첨이 싹틀 여지를 아예 막아 버린 것이다. 태종2년 8월 4일 자 《태종실록》이다.
 
  〈어가가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경기도) 장단(長湍)에 장막을 쳤는데[次] 내관 이용(李龍) 김완(金完) 노희봉(盧希鳳) 신용명(辛用明) 등을 순위부에 가두었다. 상(上·태종)이 연어(年魚)를 상왕전에 바치라고 명했는데 보내지도 않고 이미 보냈다고 거짓말을 했고 의안대군에게 내려준 것이 있는데 명을 받고서 (직접 하지 않고) 나이가 젊고 지위가 낮은 환관에게 그것을 대신하게 한 때문이다.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상이 아주 가까이 여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디거나 늦거나 하면 엄하게 징벌을 가했기 때문에 환시(宦寺)들이 감히 제 뜻대로 하지 못했다. 모두 4일 만에 풀어 주었다.〉
 
  결국은 임금의 마음이다. 아첨은 아첨꾼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빌미를 제공하는 데서 시작한다. 조선의 태종 이상으로 아첨을 잘 끊어낸 중국의 임금은 당(唐) 태종이다.
 
  진덕수는 “간사스러운 아첨배들이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을 두려워한 인물로는 당 태종만한 황제가 없었습니다. 당 태종은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봉덕이(封德彛) 우문사급(宇文士及) 권만기(權萬紀)의 무리들이 다 끝내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고 말했다.
 
  《신당서(新唐書)》에서 바로 그 당 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임금이란 오직 하나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차지하려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나쁜 신하들은) 혹 용력으로써, 혹 변설로써, 혹 아첨으로써, 혹 간사한 계교로써, 혹 탐욕으로써 그것을 차지하려 한다. 이들 각각이 스스로 (임금의 마음의) 주인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임금이 조금이라도 해이하여 그중 하나라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곧 위태로움과 멸망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행하기) 어려운 까닭일 것이다.”
 
  임금 스스로 마음을 바로 하는 것[正心]만이 아첨의 싹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이다.⊙
 
[월간조선 2017년 1월호 / 글=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1-11 08:53   |  수정일 : 2017-01-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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