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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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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연이 꼭 오래가야 하는 건 아니다

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3)

까칠언니의 한마디
인연, 소중하다.
하지만 인연 맺느라 들이는 노력이 당신의 영혼을 좀먹게 두진 말길.
당신이 있어야 인연도 존재하니까.

글 | 은열

“우리, 강원도 여행 갈까?” 얘기가 처음 나온 건 어죽으로 유명한 파주의 한 식당에서였다. “지인이 운영하는 펜션에 연락해볼게.” “운전은 내가 하면 되고.” “그럼 난 맛있는 저녁 쏘겠음!” 순식간에 ‘6월 우정 여행’이 결정됐다. 멤버는 전(前) 직장 선배 A와 친구 B, 그리고 나였다.

갓 입사했을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햇수로 벌써 19년. 그 사이 셋 다 소속이 바뀌었으며, 어리바리하던 풋내기의 티를 벗고 각자의 업무에서 베테랑이 됐다. 취미도 관심사도 제각각이지만 각자의 생일을 핑계 삼아 1년에 최소 세 번은 꼬박꼬박 모였고, 매해 고심을 거듭해 진심이 담긴 선물을 건넸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가족의 안부를 묻고 대소사를 챙길 정도의’ 친분도 생겼다.

‘제발 싸우지만 말자!’ 그게 이번 여행에 임하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였다. 제아무리 친한 사이라도(심지어 가족끼리도) 함께 여행하다 보면 으레 다투게 마련이란 얘길 너무 자주 들은 터였다. 공교롭게 셋이 떠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숙소는 화장실 말곤 사방이 트여 숨을 곳 하나 없는 스튜디오형 공간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아침잠 없는 A는 이른 새벽 일어나고도 종일 운전하느라 녹초가 된 내가 뒤척이기라도 할까 봐 세면대 물 소리 하나까지 조심했고, 이동하는 내내 조수석에 앉아 한숨도 자지 않고 내 말벗이 돼줬다. 사려 깊은 B는 숙소를 중심으로 갈 만한 곳과 소문난 식당을 살뜰하게 정리, 출력해 왔다.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둘에게 한 줌의 추억이라도 더 남겨주려 연신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 것도 B였다.


절연, 잠깐 통쾌하고 오래 헛헛하더라

사실 내겐 A와 B 같은 친구가 꽤 여럿 있다(자랑, 맞다). 한동안 그 사실을 훈장처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다. 내심 ‘이 정도도 안 되면서 친구라고 할 수 있어?’란, 일종의 ‘친구부심’이 있었다. 동시에 ‘양질의 인연’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며 가며 고개 한 번 까딱한 사이, 명함 한 장 주고받은 사이도 소중히 대했다. 일단 안면을 튼 사람에겐 어떻게든 인상적으로 기억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내가 애쓰는 만큼 내 인간관계도 튼실해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정반대 경우’에도 똑같은 태도를 고수했단 사실이다. 내가 노력했는데 상대가 그에 걸맞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다짜고짜 맘이 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란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생전 연락 한번 없다 자기 아쉬울 때만 ‘이모티콘 작렬’ 메시지를 보내며 뭔가 요구하는 사람, 도움받을 땐 입안의 혀처럼 굴다가 막상 뭐 좀 부탁하려 하면 함흥차사인 사람, 툭하면 약속에 늦거나 빠지며 딱한 거짓말로 임기응변하기 바쁜 사람….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목구멍까지 차오르게 하는 이가 차고 넘쳤다. 그럴 때마다 내 입장은 단호했다. ‘당신이 내 호의를 이렇게 무시하는데 내가 왜 굳이?’ 그러곤 결연하게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었다.

고백하건대 잠깐은 통쾌했다. ‘나랑 친해지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지, 암만!’ 혼자 고개를 주억댔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모든 인연이 내 원칙대로 순탄하게 깊어지진 않았다. 내 태도가 한결같아도 그걸 받아들이는 상대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난 ‘정말 좋은 인생의 벗’이 될 수도, ‘굳이 사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단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 사이, 적잖은 인연과 알게 모르게 이별했다.


‘영 아닌’ 이들만 솎아내고 함께 가는 삶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일 자체’보다 ‘대인관계’의 고충을 말한다. 실제로 인간관계는 일이나 공부처럼 미친 듯이 매달린다 해서 풀리지 않는다. 서로의 개성이 맞부딪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말하자면 화학반응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노오오력’으로 해결되는 성질의 과제가 아니란 사실만 이해해도 그 이후는 꽤 쉬워진다. 최선을 다하되 영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맘을 접게 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가 ‘뭐 그럴 수도 있지’로 바뀐다. 무던히 노력했는데도 어떤 이와의 인연이 1년은커녕 한두 달밖에 이어지지 않을 때 속상해하거나 애달파하는 대신 ‘쿨(cool)하게’ 작별을 고할 수도 있게 된다. “당신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그동안 정말 즐거웠어요. 어디서든 행복하시길!”

허용되는 것만 나열한 후 나머지는 전부 불허하는 규제를 ‘포지티브(positive) 규제’라고 한다. 금지하는 행위를 명기한 후 그걸 제외한 전부를 허용하는 ‘네거티브(negative) 규제’의 반대 개념이다. 규제의 강도(强度)로 치면 당연히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높다. 이런 분류는 대인관계를 풀어가는 방식에서도 종종 유효하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규정할 때 매사 포지티브 방식을 적용하면 고단하다. 늘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해야 하고, 적이면 가차 없이 철퇴를 내려쳐야 하니까. 그럴 때 네거티브 방식을 도입해보면 어떨까?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사람만 추려내고 고만고만한 나머지와는 느슨하게 연대하며 지내는 것이다. 둘 다 경험해본 내 결론은 단연 네거티브 쪽이다. 무엇보다 그 편이 정신건강에 훨씬 유익하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소설 《미국의 목가》엔 대인관계와 관련해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문장이 나온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07-31 08:34   |  수정일 : 2018-07-3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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