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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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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과 PD...한국 내 운동권의 친북의 역사

글 |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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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26일 서강대에서 전대협 학생들이'평양축전 참가보장요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조선DB

저도 60~70년대까지 이어지던 잔존 남로당 계열 또는 통혁당이나 남민전 사건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직접 지도 아래 혁명조직을 남한에 재건하려던 움직임과 80년대 NL 운동이 어떤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은지 고민해본 적이 있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NL과 PD의 직접적인 사상적 배경은 80년대 초 무림-학림 논쟁이고 그들을 대표하는 이론가가 무림의 장명국(내일신문 대표, 석탑출판사 대표 역임)과 학림의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 주간노동자신문 창간)입니다. 둘 사이의 이-장 논쟁이 전설처럼 전해져오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무림은 준비론적 입장이었고, 학림이 투쟁론적 입장이었다고 하는데 무림이 이후 NL의 이념적 조직적 모태가 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조직적 연결은 약한 편입니다. 강철 김영환이 무림 계열 선배들과 직접적인 연결 속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는 점이 이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김영환은 사실 대남방송을 통해 학습한 것도 아니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구해볼 수 있었던 관변 학자들의 저술이나 논문을 통해 학습했다고 증언하더군요(믿기 어렵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대남방송 청취 붐은 NL이 학생운동에서 바람을 일으키면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으로 압니다.
 
사실 학림 그룹은 중심 인물들이 대학로 학림다방에 주로 모여 숙덕대며 음모를 꾸몄다고 해서 수사진이 붙인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무림은 안개 무(霧)를 씁니다. 안개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인물들간의 관계와 성격이 분명치 않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들었습니다. 북한과의 사상적 조직적 연계성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당장 선도적 투쟁에 나서자는 학림에 비해 준비론적 입장을 내세운 정치 조직노선 때문일 수도 있구요.
 
학림은 전민학련 전민노련 사건에 이어 깃발 사건, CA조직, 사노맹 조직 등으로 직접적인 이념적 조직적 연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학림과 투쟁론 계열은 애초부터 남한 사회 내부에서 자생적인 혁명 역량을 양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고, 사회구성체 논쟁에서도 신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내건 NL과 달리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내세웠습니다.
 
신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선 필연적으로 민족모순이 우선이고 그런 점에서 북한과의 공조 내지는 그들을 혁명기지로 지도력을 인정해야 하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고 오히려 북한은 남한의 혁명을 방해하는 세력 정도로 보는 시각이 강합니다. 그래서 학림 계열 내부에서는 북한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분위기가 강했습니다(물론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바뀐 계기가 두 번 있었는데 첫째가 CA 계열의 분화입니다. 이른바 다수파와 소수파의 분화가 그것이죠. 다수파의 대표가 박종철 사건의 당사자인 박종운이었고 이들은 북한에 대해 NL과 비슷한 태도를 가졌고 결국 NL로 흡수됩니다. 소수파가 학림 계열의 정통을 이어받았고 그 중심인물이 백태웅(이정로), 박노해 등이었죠.
 
이들이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건설해서 극단적인 수준의 선도투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북한을 인정하게 된 사건이 발생합니다(두번째 계기).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동조하는 메시지를 담은 시를 박노해가 발표하죠. 그게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시였습니다. 문익환 목사가 북한에 가서 발언했던 표현을 긍정하고, 반북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한 혁명의 결정적인 장애물이라는 선언이었죠.
 
이후 사노맹이 와해되면서 사실 남한의 혁명세력 가운데 반북 노동자 계급론적 입장을 가진 세력이 PD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데, 사실 이들은 원래의 학림 계열(이들은 민족민주혁명 즉 ND노선을 내세웠습니다)과는 무관한, 어떻게 보면 정치노선이 극히 빈약한 노동자 경제투쟁적 정체성이 강한 그룹이었습니다.
 
사실 이들이 유일하게 차별성을 가진 정치노선이 합법정당의 건설이었습니다. 즉, 1988년 민중의당 1990년 민중당이 그것인데, 이 노선이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합법 제도권 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한 NL이 대거 민노당에 침입(?)해 조직을 장악함으로써 결국 PD 등 반북 내지 비북세력은 남한 혁명세력 내에서 완벽하게 패배하고 소수파로 전락합니다.
덧 : 사실, NL과 PD 계열의 조직적인 분화를 처음 알린 것이 1980년대 중반의 CNP 논쟁이었습니다. 당면한 혁명의 성격을 놓고 견해가 갈린 것인데, CDR(Civil Democracy Revolution, 시민민주주의혁명)과 NDR(National Democracy Revolution, 민족민주주의혁명), PDR(People Democracy Revolution, 민중민주주의 혁명)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CNP 논쟁이라고 불렀죠.
 
저기서 CDR이 보수야당 정치세력 즉 김영삼 김대중 세력의 대표성을 인정하는 노선으로 이어졌고, NDR이 CA와 사노맹으로 대표됩니다. PDR은 노동자 주도성을 인정하는, 계급적 관점을 가장 강조하는 그룹이었습니다. 여기서 NL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상 NL은 조직 및 인물, 정치노선으로 보자면 CDR 계열과 가장 유사하다는 게 역설적이지만 사실입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02-23 11:32   |  수정일 : 2018-02-2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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