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칼럼 | 사회
  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백내장 부작용 수술로 시력을 잃었던 한 달

글 | 엄상익 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

본문이미지
조선DB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워있다. 겁이 난다. 정말 지독히도 운이 나쁜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의사는 백내장 수술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말하면서 천 명에 한 명가량 부작용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런데 그 한 명이 바로 나였다. 글씨가 쐐기 모양으로 일그러져 보았다.
 
큰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내가 보는 앞에서 주사기 바늘을 눈에 박았다. 눈으로 다가오는 바늘을 보면서 고문이라도 받는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부작용이 생겼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윤곽 일부가 흔들리면서 증발하는 모습이었다. 머릿속이 실타래가 꼬이는 것 같이 복잡한 느낌이 왔다. 수술한 병원에 갔더니 담당의사는 자기 실력으로는 안 되니까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수술을 담당하는 의사가 설명했다.
 
  “수정체에는 가는 실들이 발같이 달려있어요. 그게 수정체가 눈동자의 가운데 정확히 있게 하는 기능을 하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 이상이 생겨서 수정체가 내려앉은 겁니다. 이제 그 실을 눈알 쪽으로 빼내서 눈에 아예 묶어 버릴 겁니다.”
 
  말만 들어도 끔찍했다. 내 눈알을 가지고 바느질을 한다는 소리같이 들렸다. 눈에 바늘이 들어오는 걸 보는 건 고통이었다. 나는 전신마취를 해달라고 사정했다. 의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면서 꿰매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공포가 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취를 시작합니다.”
 
  의사가 선언하고 눈알에 약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면도날이 스치는 듯한 통증이 스치면서 깊은 물 속에 들어온 듯 시야가 변했다. 각막을 드러낸 것 같았다.
 
  “이 수술은 백내장 수술보다 백 배쯤 힘든 겁니다.”
 
  의사가 눈알에 뭔가를 붙이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파랗게 변했다. 십 년 전 백내장 수술에 이상이 생겨 큰 병원에 갔을 때 다시는 수술을 받기 힘들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힘들 것이라는 수술을 다시 받게 된 것이다. 그동안 의학적 발전의 덕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다시 이렇게 수술을 받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시력을 잃는 것보다 수술은 다시 볼 수 있는 희망이었다. 하늘에서 눈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현미경같이 생긴 안과 수술기계에서 나오는 빛 같았다. 속으로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 밝은 빛 속에 한 달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감색 한복을 입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 하나님한테 이 수술 잘되게 해 달라고 부탁해 줘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전에 수술을 할 때 어머니가 옆에서 꼬박 기도해 주었었다. 수술을 하면서 의사가 말한다.
  “그동안 사용하시던 수정체를 그냥 쓸려고 했는데 안되겠습니다. 제가 표준품인 새 걸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자동차 부품을 갈아 끼듯 쉽게 말한다.
  “팅, 팅”
  가는 명주실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눈알을 꿰맨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치지직’ 하고 뭔가 타는 소리도 들렸다.
 
  “이거 왜 이래 사전에 준비를 잘하라고 했잖아?”
  의사가 옆의 레지던트를 질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긴장하고 있다. 나는 겁이 덜컥 난다. 이러다가 시력을 잃는 건 아닐까. 의사들이 슬리퍼를 끌고 수술실 위를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 수술 기구들끼리 부딪치는 메마른 소리가 났다.
 
  “수술이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보실 수 있으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의사가 선언했다.
 
  2
 
  눈알이 부어서 절간 입구에 보이는 화엄신장 같이 튀어 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화면 속에서 모래가 위에서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알 속에 여러 개의 좁쌀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수술한 실밥인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그걸 떼내기 위해 손길이 갔다. 눈꺼풀이 그곳에 닿을 때마다 파란 불꽃이 이는 것 같이 따끔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누운 채 시간이 갔다. 활자나 모니터를 보지 않고 보내는 시간이 이렇게 긴지 처음 깨달았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인 채 정체되어 있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밤새 몸을 뒤척였다. 누워만 있으니까 허리도 아팠다. 멀쩡할 때는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던 눈이었다. 생각해 보니 눈을 너무 혹사시킨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매일같이 어둠침침한 만화방에 드나들었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보면서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다. 영양제 한 번 제대로 주지 않고 부려먹었다. 어떤 기계라도 그렇게 사용했으면 붉은 녹물이 흘러나왔을 것 같았다. 그 눈에 이상이 생기니까 세상이 없어졌다. 몇겹의 검은 썬팅을 한 것 같았다. 시간이 가지 않았다. 답답했다.
 
  ‘이럴 때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나는 벽에 기대 앉아 마음의 눈길을 내면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너는 안 보일까봐 벌벌 떨고 있지?’
  내가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그렇지.’
  ‘한번 생각해 봐. 왜 너만 아니어야 하는 거지?’
 
  나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고통이 닥칠 때 ‘왜 나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속에서 또 다른 내가 밖의 나에게 묻고 있었다.
  ‘왜 너만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거야?’
  ‘그건 그러네, 내가 뭐라고.’
 
  뇌리에 떠오르는 죽은 친구의 모습이 있었다. 그가 30대 초경 머릿속의 뇌수가 흐르는 미세한 관을 몸속에 떠돌아 다니던 기생충의 알이 막았다. 뇌압이 올라가자 그는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고 했다. 뇌수를 흐르게 하기 위한 수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시신경이 잘못되어 그는 시력을 잃었다. 그의 인생이 허물어져 버렸다. 그의 아내는 앞을 못 보게 된 남편에게 밥을 떠먹이면서 빨리 30년이 흘러버리면 좋겠다고 저주를 했다. 친구는 내게 자살을 하려고 더듬거리면서 벽에 혁대를 걸어 목을 맸는데 혁대가 끊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고 했다. 그 순간 너무나 아팠다고 했다. 은총인지 저주인지 그에게 암이 겹쳐서 덮쳐왔다. 그 친구는 암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착하고 성실한 친구였다. 같이 법대를 다니고 법무장교 생활을 했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빨리 그리고 힘들게 데려가시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세상이었다. 나라고 그렇게 되지 않는 예외이어야 할 이유를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나도 이제 보이지 않을 수 있고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돌이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육십대 중반이면 살만큼 살아왔지. 아들딸도 다 자랐고 집착할 가질 만한 재산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는데 왜 너만 죽으면 안 되는 거지? 죽는다고 해도 세상은 전혀 지장이 없이 잘 돌아갈 텐데.’
 
  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 심연에 있는 존재가 부연해서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네가 지금 인생을 마감하나 십년 후에 마감을 하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신의 입장에서는 요절한 청년이나 백살을 산 노인이나 큰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나만 아프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살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나만 아니어야 할 까닭이 전혀 없는 존재였다.
 
  3
 
  침대 옆의 병풍 속 오리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벽에 붙은 디지털 시계의 붉은 글자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희였다. 하나님이 빛을 다시 주셨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해 주는지 몰랐다. 볼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시력을 회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시야가 비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앞에서 날파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뿌옇게 보이는 세상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눈과 인간이 만들어 주는 눈은 질에 차이가 있었다. 색도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감사하다. 딸 정아가 손녀와 손자를 데리고 병문안을 왔다. 열 살짜리 손녀 다미는 오자마자 식탁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네 살짜리 손자 태윤이는 내 방 옆에 있는 리모컨을 가지고 와서 “할베이, 어어” 하며 텔레비전 어린이 프로를 켜달라고 한다. 백발의 아내는 주방 식탁 앞에서 조용히 성경을 읽고 있다. 내가 다시 보고 싶던 아름다운 광경이다. 성경 속에서 소경을 데리고 들에 나가 예수가 진흙에 침을 썼어 소경의 눈에 바른 후 묻는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 내게 뭐가 보이느냐?”
  “뿌연 안개 속에 나무들이 어른거리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세상을 보아왔는지도 모른다. 성경 속의 예수는 다시 소경의 눈에 침을 바른 후 묻는다.
  “이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느냐.”
  소경에서 명확한 세상이 보이고 있었다. 주님은 나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제거하고 바른 세상을 보게 해 주시려고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5-19 09:23   |  수정일 : 2017-05-19 09:58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니스트 사진

엄상익 변호사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맨위로

하단메뉴

개인정보 취급방침독자센터취재제보광고문의조선뉴스프레스인스타그램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