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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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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분열과 귀족노조의 탄생...비정규직 제물삼아 살아남은 중화학공업 노동자들

류석춘의 한국사회 읽기 〈7〉

⊙ 김영삼 정권부터 추진하던 ‘노동시장 유연화’, 김대중 정권 시절 노사정위원회 통해 본격 도입
⊙ 현대자동차노조, 사원식당 여성노동자 정리해고 인정하고 나머지 노동자들의 고용보장 받아
⊙ 시민운동 등장, 김대중 정권 출범 등 거치면서 ‘학출’ 노동자 퇴조하고, 블루칼라 출신 현장파 득세

류석춘
1955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
《전통과 현대》 편집위원,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역임. 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기념재단 부이사장 / 《막스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한국의 시민사회-연고집단, 사회자본》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등 저술

글 |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1998년 8월 24일 현대자동차 노사는 정리해고 등 쟁점에 합의했지만, 그 뒤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왼쪽부터 협상을 중재했던 노무현 당시 의원, 정몽규 회장, 김광식 노조위원장, 이기호 노동부 장관.
대선(大選)의 계절이 되면서 ‘일자리’ 문제가 화두(話頭)가 되고 있다. 하지만 어느 후보의 공약을 보아도 뾰쪽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등 노동시장의 양극화(兩極化) 문제는 법과 제도를 통해 양자간의 차별을 없애겠다는 주장만이 있을 뿐, 지금의 경제상황 아래서 노동시장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은 부족한 것 같다. 현재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의 중심에는 대기업 노조가 중심이 된 ‘귀족노조’가 있다. 그러나 어느 대선 후보도 이 문제를 직시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이 ‘귀족노조’는 언제, 어떻게 등장했을까?
 
  노동시장의 양극화 문제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 때부터 ‘노동시장 유연화’를 주장하면서 비롯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5월 ‘노동’과 ‘자본’ 그리고 ‘공익’ 및 ‘학계’ 대표가 참여하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출범시켜 노동개혁을 추진했다.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내에서 ‘자본’ 측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강조하면서 정리해고, 파견근로, 변형근로시간제 등의 도입을 주장한 반면, ‘노동’ 측은 기본권 보장을 강조하면서 복수(複數)노조, 정치활동, 3자개입 허용 등을 주장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탈퇴와 복귀를 포함한 오랜 진통 끝에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경제위기가 닥치기 약 1년 전인 1996년 11월 12일 일부 조항이 완전히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법의 기본적 개정방향을 제시하는 대통령 보고를 끝으로 활동을 마무리했다.
 
  이를 바탕으로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야당의 반대로 개정안은 여당 단독으로 같은 해 12월 26일 새벽 4시 국회를 변칙적으로 통과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총파업 등 여론과 시민사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국회는 1997년 3월 8일 변칙 처리된 개정안을 폐기하고 여야 합의로 재개정한 노동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자본이 요구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해 정리해고 및 변형근로가 도입되었고 또한 노조전임자 급여 금지 및 무(無)노동·무임금 원칙이 관철되었다. 3자개입, 정치활동, 상급단체의 복수노조 가입 등 노동계의 요구도 수용되었다. 그렇지만 교원과 공무원의 단결권은 허용되지 않았다.
 
 
  IMF 사태 와중에 정리해고 도입
 
1998년 1월 17일 열린 노사정위원회 전체회의. ‘노사정대화합으로 민주발전 경제회생’이라는 플래카드가 IMF사태라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사태의 와중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은 당선자 신분으로 현직 대통령 김영삼과 1997년 12월 20일 회동하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는 활동을 개시하면서 시급히 필요한 금융개혁 추진을 위해서 은행 간 인수·합병을 할 때 정리해고를 허용토록 하는 데 이어, 이듬해 1월에는 ‘노사정(勞使政)’ 3자 간 고통을 분담하여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선언을 이끌어 냈고, 나아가서 IMF의 권유에 따라 일반기업 간 인수·합병을 할 경우에도 정리해고가 가능한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모든 산업으로 정리해고를 확대하는 비상경제대책위원회의 방향에 노동은 반발했다. 노동의 반발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과 자본 그리고 정부가 같은 지분으로 참여해 정리해고를 포함한 노동문제 전반에 관한 여러 쟁점을 협의하기 위해 1998년 1월 15일 만들어진 기구가 바로 ‘노사정위원회’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위원회는 김영삼 정부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동일한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입장이 대립되는 노동과 자본이 공존하고 있을뿐더러, 노동을 대표하는 두 단체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서로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협의기구인 노사정위원회에 진입과 탈퇴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활동의 여건이 김대중 정부에서는 IMF 구제금융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는 사실뿐이다.
 
민주노총은 1998년 2월 9일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합의안을 전면 거부하고. 지도부를 퇴진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출범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98년 2월 8일 노사정위원회는 10대 의제에 대한 일괄타결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 타결에서 자본은 노동시장 유연화 관련 조항인 정리해고와 파견근로를 보다 확대해서 적용한다는 소득을 얻었고, 노동은 기본권 관련 조항인 공무원직장협의회와 교원노동조합의 결성 그리고 노조의 정치활동에 대한 허용의 폭을 넓혔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정리해고를 인정한 합의안을 거부했다.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배석범 직무대행이 이끌던 지도부가 사퇴했고, 강경한 입장의 단병호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했다.
 
  1998년 2월 14일에는 근로기준법 등 19개 안건이 통과되었다. 개정된 법률의 주요 내용은 정리해고의 사유를 보다 광범위하게, 즉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파견근로제의 법적 기반을 마련해서 정부의 구조조정 작업이 탄력을 받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었다. 한편 같은 달 17일에는 공무원 노조의 설립을 사실상 허용하는 공무원직장협의회법이 통과되었다. 나아가서 같은 해 4월 30일에는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허용하는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전교조 합법화
 
  1998년 6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모두가 참여하는 제2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하였다. 1999년 8월까지 활동한 제2기 노사정위원회에서 다루어진 핵심 쟁점은 ‘실업자 노조가입’ ‘교원노조’ 등 제1기 노사정위원회(1998. 1~2)에서 합의하였으나 입법으로 연결되지 못한 쟁점들이었다.
 
  실업자의 노조가입 문제는 노사정위원회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정부 내에서 노동부와 법무부의 입장 차이가 커 결국 법제화하지 못했다.
 
  특히 이 쟁점은 노동법 기준으로 조합원 자격이 없는 임원을 두고 있던 전교조 그리고 전교조가 속한 민주노총 입장에서 자신들의 적법성 문제와도 관련된 심각한 문제였다. 1995년 11월 출범한 민주노총은 1999년 11월 합법화하기까지 ‘법외(法外)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위원회에 정식으로 참여하면서 적법성에 관한 논의를 비켜 갔다. 결국 이 쟁점은 실업문제가 어느 정도 진정될 것으로 보이는 2000년 이후에 실시한다는 잠정적인 결론으로 봉합되었다.
 
  한편 교원노조법은 한국노총 산하의 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의 적극적인 입장 그리고 정리해고제 도입 등에 대해 반발하는 민주노총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엄호를 등에 업고 마침내 1999년 1월 6일 국회를 통과하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1998년 12월 31일 교원노조 법제화 등 합의사항 불이행 그리고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 강행을 이유로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하고 다음해 2월 24일 대의원 대회의 결의를 통해 노사정위원회를 공식적으로 탈퇴했다. 한국노총은 1999년 4월 9일, 재계는 1999년 4월 16일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선언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5월 24일 ‘노사정위원회 설치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같은 해 9월 1일 제3기 노사정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노사정위원회는 임시기구에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상설’ 협의기구로 바뀌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3기 위원회에 처음부터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현대차 노동자들의 선택
 
  1997년의 경제위기는 1990년대 초반 김영삼 정부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민주’ 노동운동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 이후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은 ‘민주’ 노조의 전투적 운동방식과 그에 따른 임금상승 및 고용보장은 이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불황의 그늘이 기업의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는 부도(default)를 막기 위해 들여온 해외자본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의 유연화를 밀어붙였다.
 
  전투적 노동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문성현은 2010년 출판한 책 《희망은 당신 곁에 있습니다》에서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곳곳에서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일어났지만 그 양상은 격렬하지 않았다. 도산 위기에 빠진 기업에서는 교섭 상대가 사라졌고, 간신히 살아남은 기업에서는 사용자들이 교섭 자체를 완강히 거부했다. … 노동조합들은 자신이 처한 처지나 상황에 따라 ‘각개후퇴’ 하면서 쓰러지거나 목숨을 부지했다.〉
 
  1997년 위기의 여파로 정리해고 문제를 두고 가장 격렬한 투쟁을 했던 현대차 노조의 상황을 문성현은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결국 사원식당에서 근무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인정해 주는 대가로 나머지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받자 투쟁을 접었다. 한쪽에서는 ‘민주노조가 그럴 수는 없다’고 난리를 쳤다. 다른 한쪽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았겠느냐’며 침묵을 지켰다.〉
 
 
  ‘학출’ 노동자들의 이탈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을 놓고 ‘민주’ 노조는 분열을 거듭했다. 그 결과 ‘민주’ 노동운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1980년대 내내 학생운동권 출신의 이른바 ‘학출’들이 노동현장으로 ‘존재이전’, 즉 ‘위장취업’을 하면서 그 역량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87년 6월 갑자기 등장한 노태우의 민주화 선언은 같은 해 7, 8월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마산 창원 울산을 중심으로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을 불러 왔다. 이때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생겨난 ‘민주’ 노동조합은 기존의 노사협조적 노동조합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대학 출신 운동권의 지원을 통해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폭발적으로 분출시켰다.
 
  1989년부터 시작된 동구 공산권의 붕괴 그리고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사회·공산주의 이념을 배경으로 한 ‘학출’ 주도의 노동운동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체제를 과격하게 부정하는 노동운동보다는 체제에 참여하면서 개량적인 방법으로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타협적 노선이 등장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와 협조하면서 시민운동으로 말을 바꾸어 타며 노동운동을 떠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의 출범을 전후로 우후죽순같이 등장한 이른바 시민단체가 이러한 경향을 잘 대변해 준다. 예컨대 1989년 7월 창립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1993년 4월 창립된 ‘환경운동연합(환경련)’, 그리고 1994년 9월 창립된 ‘참여연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관심은 이제 더 이상 작업장의 노동자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을 통해 정당을 만들고 선거를 통해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권력의 지분을 획득하는 일, 즉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는 일이 되었다.
 
 
  국민파 권영길
 
민주노총의 ‘국민파’를 대표하는 권영길 초대 위원장.
  운동권의 이와 같은 새로운 흐름은 1995년 11월 정식으로 출범한 민주노총의 활동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민주노총은 초대 위원장에 언론노조 출신의 노동운동가 권영길을 합의로 추대했다. 그는 명문 대학 출신으로 언론사에서 파리 특파원 경력을 가진 화이트칼라 노동운동가였다. 그는 학생운동 노선에서 이른바 대중성을 강조하는 노선을 따른 운동가로 분류된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198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운동을 하여야 한다는 ‘민족해방’(NL : National Liberation) 노선과 선도적인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민중민주’(PD : Peoples’ Democracy) 노선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민족해방’ 노선은 북한의 주체사상, 즉 권력의 3대 세습도 용인하는 황당한 노선이지만, 운동의 방법으로 대중에 파고드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대학가의 좌파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에 이에 대항하던 학생운동의 ‘민중민주’ 노선은 고전적인 사회주의 혁명, 즉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을 추구하는 과격한 노선을 채택하여 상대적인 소수파로 밀려났다.
 
  권영길이 민주노총의 출범과 함께 제창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라는 슬로건이 ‘민족해방’ 노선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 슬로건으로 인해 이 노동운동 노선은 이후 ‘국민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권영길은 1997년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운동권의 다양한 노선을 연합시킨 조직 ‘국민승리 21’의 후보로 입후보하면서 민주노총 위원장직을 배석범 직무대행에게 넘기고 노동운동을 떠났다.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를 선택한 국민파 노동운동 노선은 그러나 권영길 후보의 실망스런 득표율 1.26 %로 엄청난 좌절을 겪었다.
 
 
  현장파 이갑용
 
강경노동투쟁을 선도했던 ‘현장파’ 이갑용 위원장.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주노총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면서 1998년 2월 8일 배석범 직무대행이 합의해 준 정리해고 수용을 놓고 엄청난 후폭풍을 겪었다.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합의안 비토는 단병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를 거쳐 1998년 3월 민주노총 2기 위원장 선거로 이어졌다. 노사정위원회 불참으로 상징되는 현실정치 자체에 대한 부정을 기조로 강경한 투쟁, 즉 정리해고 불가를 노동운동의 노선으로 삼은 이갑용이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이갑용은 권영길과는 완전히 반대의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맹(마창노련)’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등을 거치며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이후의 강경한 노동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른바 ‘골리앗’ 전사로 유명한 그는 중화학공업의 대표적인 블루칼라 노동운동가로서 공식교육은 직업훈련원을 통해 이수한 고등학교 학력이 전부였다. 그는 이른바 노동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운동가였다. 이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강경한 노선의 노동운동은 이후 ‘현장파’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 노선은 학생운동에서 이른바 전위적인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민중민주(PD) 노선과 조응하는 노동운동 노선이다.
 
  결국 1997년의 경제위기에 대한 민주노총의 대응은 기본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노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우선,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 타협을 강조하는, 권영길로 대표되는 ‘국민파’의 주도적 역할이다. 이들은 권영길, 배석범으로 이어지며 민주노총 지도부를 장악하고 김대중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 협조했다. 국민파의 하부 조직은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이기보다는 주로 화이트칼라 노동운동 조직이다. 예컨대 전교조, 사무노련, 보건의료노조 등이 국민파의 주력이다.
 
  반면에, ‘현장파’는 국민파의 정치적 타협과 배신을 비판하며 1987년 이후의 전투적 투쟁을 현장에서 지속해야 한다는, 이갑용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다. 이들의 주력은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이 속한 금속노조 조직이며, 현대차 노조가 가장 대표적이다. 권력 혹은 자본과의 대화와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며 파업과 같은 전투적 투쟁을 선호한다.
 
 
  중앙파 ‘단문심’
 
전노협 시절부터 노동운동의 중앙지도부를 형성했던 ‘중앙파’ 3인방. 왼쪽부터 단병호, 문성현, 심상정.
  이 두 세력의 중간에 이른바 ‘중앙파’라고 불리는 제3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중앙파는 학생운동 노선에서 전투적인 투쟁을 중시하는 민중민주(PD) 계열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현장에 뿌리를 둔 세력이 아니다. 대신 이들은 이른바 ‘학출’이라는 배경을 민족해방(NL) 노선과 공유한다. 즉 노선으로는 민중민주, 그리고 인물로는 민족해방과 각각 가까운 세력이다.
 
  노동현장의 뿌리가 없다는 측면에서 이들은 앞의 두 세력같이 특정한 산업을 중심으로 한 하부의 노동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다. 대신 이들은 민족해방 노선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일부가 정치권, 즉 국회로 진출하였다. 중앙파의 핵심인물은 이른바 ‘단문심’(단병호·문성현·심상정)인데, 이들은 ‘전노협’ 시절부터 노동운동의 중앙지도부에 포진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유로 이들은 중앙파라 불리게 되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단병호와 심상정은 2004년 선거를 통해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문성현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의 최측근 참모로 활동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은 1997년의 위기를 겪으며 이른바 ‘학출’들이 주도하는 ‘민주’ 노동운동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의 등장과 함께 ‘학출’ 노동운동가들 상당수가 시민운동으로 말을 갈아타며 정치세력화, 즉 현실정치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들 중 일부는 동료 노동자의 해고마저도 수용해야 한다며 김대중 정권에 협조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들 중 상당수가 노동운동을 배경으로 정치권에 진입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은 ‘학출’이 주도하는 타협적인 ‘민주’ 노동운동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귀족노조의 탄생
 
  그렇다고 노동현장에서의 강경한 투쟁이 과거처럼 노동운동에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경제적 호황을 배경으로 가능했던 ‘최대한의 투쟁을 통한 최대한의 경제적 보상’ 전략은 1997년의 위기와 함께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생존의 기로에서 허덕이는 기업, 그리고 기업의 생존에 스스로의 생존을 저당 잡힌 노동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1997년의 경제위기는 ‘민주’ 노동운동의 내부 단결을 무너뜨렸고 운동노선 내부의 투쟁을 불러왔다.
 
  다른 한편, 중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노동조합은 회사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조합원을 살리기 위해서는 비조합원을 차별하는 선택에 의지해야 했다. 노동자 계급 전체의 단결은 멀어져 갔고, 노동조합은 기업별로 살아남아야 했다. 인수·합병을 당한 기아차의 노동자는 물론이고 구조조정을 겪은 현대차의 노동자도 고용을 보장하고 심지어는 경제위기의 한가운데에서도 임금을 상승시킨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화학공업의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서 실리 위주의 노동운동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만든 보호막은 내부 노동시장의 형성으로 이어져 기업별 노조 전통을 강화했다. ‘민주’ 노동운동이 지향한 산업별 노동조합 체제는 현대중공업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위기를 겪으며 약화되어 갔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는 경제위기의 와중에 등장하기 시작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이었다. 정규직 노조가 쌓아 올린 고용과 소득의 보장 바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픔과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른바 ‘귀족’ 노조의 등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5-15 09:13   |  수정일 : 2017-05-1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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