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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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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춘의 한국사회 읽기 〈6〉 1997년 외환위기와 중화학공업 부문 노동자의 분열

⊙ IMF사태로 실업자 3배 급증, 실업 증가 중 절반 이상이 기능원 중에서 발생
⊙ 노조, 1998년 현대자동차 구조조정 과정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제물로 삼는 회사의 정책 묵인
⊙ “나라 전체가 부도라는데 우리 회사는 아무 일 없어서 정말 고마움을 느꼈다”(현대중공업 노동자들)
⊙ 노동자들, 노동자 집단 전체의 단결보다는 소속 기업의 단위 노조가 제공하는 보호막에 의존하게


류석춘
1955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
《전통과 현대》 편집위원,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역임. 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기념재단 부이사장 / 《막스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한국의 시민사회-연고집단, 사회자본》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등 저술

글 |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1998년 4월 16일 종묘에서 파업결의와 고용안정 요구대회를 가진 후 행진하는 기아자동차 노조원들.
  경제가 심상치 않다. 석유화학,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등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성장동력들이 하나 둘 꺼지고 있다. 중국은 이제 우리를 ‘추격’하던 단계를 넘어 오히려 우리를 앞서가기 시작했다. 국제금융 전문가들은 조만간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상 가는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한 인식 없이, ‘재벌개혁’이니 ‘복지’니 하는 소리만 하고 있다. 정부는 레임덕 상태에 빠지고 정치권은 대통령 선거에 눈이 팔려 경제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20년 전과 흡사한 상황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그로 인한 노동 부문의 변화를 복기해 보는 것은, 다가오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중)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우)는 1997년 12월 3일 IMF 긴급자금지원에 합의했다.
  1997년 초부터 한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월에는 재계 서열 14위인 한보그룹이 부도를 맞으며 권력형 금융부정과 특혜대출 비리가 드러나 결국에는 대통령 아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한 7월에는 재계 서열 8위로 28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을 체결하고 9월에 화의를 신청했으나 결국 10월에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는 외환보유고의 급속한 고갈에 주목하지 않는 등 심각한 경제문제에 안이한 대처로 일관했다.
 
  마침내 12월 19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 경제는 엄청난 파국을 맞이했다. 국가 부도가 임박했다는 국제사회의 경고는 정부로 하여금 1997년 12월 3일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210억 달러에 달하는 긴급 구제 금융을 지원받는 협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정부는 추가로 IBRD(세계은행)로부터 100억 달러, ADB(아시아개발은행)로부터 40억 달러,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 중심이 된 우방국으로부터 233억5000만 달러라는 자금을 지원받았다. 결국 합계 583억5000만 달러라는 막대한 규모의 구제금융이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투입되었다.
 
  구제금융에는 물론 조건이 따라붙었다. IMF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른 고강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요구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1) 긴축예산을 포함한 거시경제 긴축 2) 상품 및 자본 시장의 완전한 자유화 3) 한국 경제 곳곳에 내장된 구조적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부문별 개혁 프로그램의 가동, 즉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이 그것이다. 개혁 프로그램이 알려지자 시장에서는 극도의 자금경색이 발생했다. 기업의 부도는 물론이고, 기업에 대출을 해준 금융기관의 연쇄적인 부도가 발생하면서 금리와 환율이 끝도 없이 치솟았고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IMF 구제금융과 대선
 
  이러한 와중에도 1997년 12월 19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TV토론을 통해 선거에 출마한 유력 후보자들은 모두 구제금융의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어야만 했다. 선거의 결과는 좌파 진영, 즉 노동의 지지를 등에 업은 김대중 후보가 우파 진영, 즉 자본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회창 후보를 박빙으로 이긴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는 사실상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결국은 같은 정책을 실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IMF 등의 구제금융 조건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국의 ‘IMF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98년 2월 25일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이 맞이한 현실은 참담했다. 김영삼 정부의 방만한 경제운용이 불러들인 국가 부도 위기는 구제금융의 조건에 따라 경제 전반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금융 부문의 방만한 경영을 정리하기 위해 국제결제은행(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이 제시한 위험자산(부실채권) 대비 자기자본 비율 최소 8%가 적용되어 수많은 금융기관이 문을 닫았다. 또한 금융기관의 대출에 의지해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한 기업 부문의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기업의 자산에 대한 부채의 비율을 최대 200%로 잡아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수많은 기업이 부도처리 되었다.
 
  정부는 총 160조원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공적 자금’을 금융과 기업 부문의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투입하였다. 공공 부문의 부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는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노동 부문에 대해서는 전투적인 노동조합에 대한 대응책으로 노동시장의 유연화, 즉 보다 자유로운 해고가 가능토록 하는 개혁이 추진되었다.
 
 
  실업자, 3배로 급증
 

  당시 추진되었던 여러 가지 개혁 가운데 하나가 기업의 구조조정과 그에 따른 노동 부문의 실업 상황이다. 〈표1〉이 보여주듯이 위기 이전 1996년 실업률은 2.0%였다. 이 숫자는 1980년부터 2014년까지 34년 동안의 실업률 중 가장 낮은 수치였다. 그러나 위기가 닥친 1997년 실업률은 2.6%로 증가했고, 위기 직후인 1998년 및 1999년의 실업률은 각각 7.0% 및 6.3%를 기록해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이를 실업자의 규모로 보면 위기 이전 1996년에는 44만명, 그리고 1997년에는 57만명이던 실업자의 숫자가 위기 이후 1998년에는 150만명, 그리고 1999년에는 140만명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위기를 겪으며 실업자의 규모가 3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다시 말해 100만명 가까운 실업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이는 두 자릿수 경제 발전을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다.
 

  최악의 실업을 가져온 기업의 구조조정이 중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외환위기를 전후한 직업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표2〉는 1997년 6월부터 2000년 6월까지 3년 동안의 직업별 취업자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97년 6월 전체 취업자를 100%로 보았을 때 1998년 6월은 93.7%, 1999년 6월은 95.7%, 그리고 2000년 6월은 99.8%를 각각 기록한다. 그러므로 1997년 위기로부터 3년이 지나면서 전체 취업자의 규모는 위기 이전 수준으로 거의 회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원’ 범주의 직업만은 1997년 6월을 100%로 보았을 때 1998년 6월 76.9%, 1999년 6월 81.5%, 그리고 2000년 6월 85.8%를 각각 기록해 위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범주임을 알 수 있다. 이 범주의 직업은 위기 이후 3년이 지나도 여전히 14.2%가량의 취업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취업자의 숫자로 환산하면 1996년 6월 기준으로 1년 후엔 약 75만명, 2년 후엔 약 60만명, 그리고 3년 후엔 46만명 정도가 각각 줄어든 셈이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실업의 증가 가운데 약 절반이 ‘기능원’ 직업으로부터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기능원’ 직업의 실업자 중 상당수가 중화학공업 부문의 기능공 출신 노동자였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중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들은 이 직업 범주 말고도 ‘장치·기계 조작원/조립원’ 혹은 ‘기술공’ 범주의 직업에도 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범주의 직업은 97년 위기 이후 3년 내에 신속히 위기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하였다. 따라서 97년 위기가 가져온 구조조정, 즉 실업은 대부분 ‘기능원’ 직업에 속한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하며 실업자를 양산한 것으로 분석된다.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
 
  ‘기능원’ 범주의 직업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은 당시 중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위기 이전부터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이미 공급과잉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기아, 현대, 대우로 3파전을 벌이던 기존의 승용차 생산시장에 삼성이 1990년대 전반 새롭게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공급과잉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국민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던 기아차를 가장 먼저 부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마침내 기아차는 1997년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갔고 결국 1998년 말 재벌회사인 현대차에 인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아차는 물론 기아차 계열사의 노조는 인원삭감, 임금동결 등의 자구 노력을 기울이며 회사의 경영진과 협조하며 그룹 살리기를 추진했으나 결국에는 모두 실패했다. 당시 기아차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기아중공업에서 ‘기계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던 유한식의 2015년 3월 증언은 비장하다. “1998년 7월 전체 생산직 사원 2047명 가운데 436명을 자체적으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채권단에 ‘화의’를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아중공업은 현대위아에 1998년 말 합병되었고 저는 ‘점령군’에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업무를 마무리하고 2003년 3월 스스로 퇴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기아차를 흡수한 현대차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경쟁하던 회사를 인수했다는 경영의 측면에서는 승자일 수 있어도, 회사 내부의 노동자 입장에서는 사실상 기아차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1997년 위기를 겪으며 국내의 자동차 수요는 전년도에 비해 반 토막이 났고 그에 따라 현대차 공장의 가동률도 반 토막이 났기 때문이다. 경영의 위기는 대규모 감원의 필요성으로 이어져 마침내 회사는 1998년 8월 전체 생산직 근로자 4만6000명 가운데 1만여 명에 달하는 인력감축을 노조와 합의했다. 이 인력감축에는 ‘자연감소’ 및 ‘희망퇴직’은 물론 ‘무급휴직’ 그리고 나아가서 ‘정리해고 277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물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들
 
1998년 8월 21일 현대자동차 파업은 비정규직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시발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합의에 동의한 노조 지도부는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있을 수 없다”는 선거공약을 제시하며 1997년 8월 당선된 7대 노조위원장 김광식이었다. 경제적 호황을 배경으로 “최대한의 투쟁을 통한 최대한의 경제적 보상”이라는 1987년 이후 지속되어 온 전투적 노동운동의 관행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이 합의에 기초해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현대차 노조는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현대차 노조의 분열은 단위 기업에서는 물론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국가 혹은 자본과의 협상에서도 노동운동의 분열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1998년 현대차 구조조정의 과정과 결과는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의 가능성을 노조가 받아들였다는 맥락에서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른바 1998년의 ‘36일 파업’을 거치면서 노조는 정규직인 조합원을 보호하기 위해 조합원이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 특히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제물로 삼는 회사의 정책을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의 아픔은 결국 노조의 보호를 받는 정규직으로부터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으로 최종 전가되었다.
 
  유형근이 2012년 제출한 서울대학교 박사 논문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변형: 울산 지역 대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1987~2010〉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실제로 회사는 정규직 노동자의 인원조정 이전에 1722명의 사내하청 인원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정규직으로 대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규직 노조가 회사의 하청 우선 조정 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최소한 사회적 공론화의 노력을 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1997년의 경제위기가 모든 중화학공업 부문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1987년부터 1994년까지 강성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던 현대중공업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5년 새로 당선된 현대중공업 노조 지도부는 여전히 전투적 노선을 추구하는 강성 활동가들의 무대였다. 그러나 90년대 초반부터 불어닥친 국가와 자본의 ‘신경영전략’은 강성 노동운동이 주도하는 정치투쟁의 악순환, 예컨대 ‘정권퇴진’과 같은 정치적 구호와 그에 따른 구속의 반복이 가져오는 비효율에 염증을 느끼며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조합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단체교섭(collective bargaining)을 중심으로 한 실리적 노동운동을 추구하는 노조 대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투쟁 중심의 강성노조 집행부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변화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들이닥친 1997년의 경제위기는 노사관계에서 회사의 입장을 강화해 주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파업과 같은 강경한 방법보다는 실리 위주의 협상을 선호하는 경향을 부추겼다.
 
  이와 동시에 위기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 경영진은 ‘노조조합원에 대해서는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강성 지도부를 상대로 한 온건 대의원들의 견제는 2002년 마침내 실리 위주의 온건한 노선을 추구하는 지도부를 당선시키며 협조적 노사관계가 정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2004년 9월 현대중공업 생산직 노조는 강성투쟁을 주도하는 민주노총 산하의 금속연맹을 탈퇴했다.
 
 
  IMF사태 때도 어려움 못 느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2006년 9월 22일 무분규 12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한 현대중공업 노사 대표들. 현대중공업 노조는 분규를 포기하는 대신 복지와 임금에서 이득을 확보했다.
  이 갈등의 발단은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박일수씨가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분신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된다. 사건이 발생하자 민주노총 금속연맹과 사내 비정규 노조 그리고 일부 정치단체가 즉각 분신대책위를 구성하고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쟁점으로 확산시키는 투쟁을 주도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에 맞서 분신사태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며 노조를 배제한 어떤 협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그 결과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은 현대중공업 노조를 제명했고, 동시에 현대중공업 노조는 금속연맹과 민주노총으로부터 탈퇴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때부터 상급 노동단체에 납부하던 한 해 가맹비 약 5억8000만원을 자체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은 1995년부터 2014년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질 때까지 20년 동안 무분규 기록을 경신하며 모범적인 노사관계를 실천하는 대표적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분규가 없다고 하여 노조가 임금이나 후생에서 양보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적이 좋을 때는 높은 임금인상과 성과급으로 협상이 타결됐고, 실적이 어려울 때는 고용보장과 복리후생 확보로 실리를 챙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1997년의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구조조정의 무풍지대에서 고용안정을 누리면서 도시근로자가구 평균소득의 2배 가까운 임금을 누렸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월간조선》 2017년 2월호에 실린 필자의 글 “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고?”를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2015년 3월 현대중공업에 30년 가까이 근속한 20명의 기능공 출신 노동자를 상대로 한 심층면접 결과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1997년의 위기 상황에 관한 질문에 응답자들은 모두 실업의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답했다. 예컨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면서 나라 걱정은 했지만 개인적으로 위기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혹은 “나라 전체가 부도라는데 우리 회사는 아무 일 없어서 정말 고마움을 느꼈다”는 응답과 같은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심지어는 IMF의 고금리 정책으로 “금융 이자 소득이 컸다”는 답변도 있었다. 유광호·류석춘이 공동으로 2015년 연세대 《동서연구》 27권 3호에 발표한 논문 〈정주영의 기능공 양성과 중산층 사회의 등장: 현대중공업 사례를 중심으로〉가 이를 뒷받침한다.
 
  1997년 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의 아픔은 중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들이 속한 기업에 따라, 업종에 따라, 그리고 고용의 지위에 따라 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 실업의 위기는 이들을 한편으로 강경한 투쟁으로 이끌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온건한 타협이 보다 효율적일 수 있음도 경험하게 했다. 다른 한편 동료의 해고를 보며 중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들은 대처하는 방법과 수위를 놓고 서로 다른 노선으로 분열했다. 그 결과 이들은 비정규직을 방패로 삼아 스스로의 생존을 보장받으며 노동자 집단 전체의 단결보다는, 자신이 속한 기업의 생존 나아가서 자신이 속한 기업의 단위노조가 제공하는 보호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
 
  전체적으로 보아 1997년 경제위기는 1987년 대투쟁 이후 강화되어 온 노동운동의 계급적 효과, 즉 기업별 노조를 뛰어넘는 산업별 노조라는 연대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는 역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정부와 기업의 ‘신경영전략’이 1997년 위기를 거치며 탄력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1997년 위기 이후 중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은 기업별로 차별화되기 시작했다. 단위 사업장에서 진행되는 노사 간의 협상에 상급노조를 포함한 제3자의 개입을 금지하는 ‘3자 개입’ 금지의 전통이 강화되면서 ‘기업별 노조’ 활동이 대세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또한 회사를 상대로 고용과 소득을 보장받으려는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이 만든 울타리 밖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안정을 위한 완충장치로 삼기 시작했다.⊙
 
[월간조선 2017년 4월호 / 글=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4-18 09:09   |  수정일 : 2017-04-1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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