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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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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예언자 ‘아모스’...정의는 어디서 출발했나?

글 |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예언자 아모스 photo thecatholicatalogue.com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1949년 펴낸 ‘역사의 기원과 목적(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이란 책에서 현대문명을 지탱하고 있는 사상의 뿌리를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르는 소위 ‘축의 시대’에서 찾았다. 그 무렵 꽃피우기 시작한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혁명에서 현대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그리스-로마에 등장하는 사상이 그 후 등장하는 종교와 철학사상의 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예컨대 공자, 노자로 시작된 중국 사상은 그 이후 묵자, 장자, 맹자로 이어져 거대한 아시아 문명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다. 우파니샤드를 통해서는 힌두교를, 그리고 붓다를 통해서 불교를 배태시킨 인도 사상은 물질주의, 회의주의, 허무주의와 인간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고 그런 것들을 각자의 삶에서 발현하는 체계를 발명하였다. 페르시아에서는 자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가 등장하여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이원론에 근거한 세계관을 만들어 후대 철학과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통해 문학이,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통해 역사가 탄생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필두로 철학과 정치학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도 이런 현대문명의 뿌리 중 하나다. 여기서는 ‘예언제도’와 ‘예언’이라는 독특한 현상이 등장한다. 여기서 예언이란 현실을 직시하여 희망 찬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이며 정신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청사진이다. 그리고 그런 청사진을 제시하는 인물을 ‘예언자’라고 부른다.
   
   ‘예언자’에 해당하는 고대 히브리어 세 단어가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한 단어는 ‘보는 사람’이란 의미를 가진 ‘로에(Roe)’다. ‘로에’라는 단어는 고대 이스라엘이 국가를 건설한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는데 미래 일을 예측하고 자연현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을 이르는 용어다.
 
두 번째 등장한 단어가 ‘신의 말을 듣고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란 의미를 지닌 ‘나비(Nabi)’다. ‘나비’는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을 찾아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람이다.
 
세 번째 단어는 ‘호제(Hozeh)’다. 호제는 단순히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핵심을 꿰뚫어 보는 자’란 의미다. 이 단어는 기원전 7세기경에 처음으로 등장한 단어로, 오늘날 우리가 미국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을 이를 때 사용하는 ‘예언자’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 예언제도를 통해 국가나 사회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주장하였다.
   
   
   임시 외국인 노동자, 히브리인
   
   고대 이스라엘을 건립한 ‘히브리인’은 요즘 말로 바꾸면 ‘임시 외국인 노동자’ 혹은 ‘나그네’ 정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르는 고대 히브리어가 바로 ‘히브리(Hebrew)’다. 이 단어의 어근인 히브리어 동사 ‘아바르’는 ‘광대한 지역이나 강을 건너 다른 지역으로 진입하다’이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도시는 강 주변이나, 강줄기를 새로 만든 수로 근처에 건설하는 게 보통이었다. 대부분이 사막이기 때문에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의 이동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나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고대사회에서 자신의 고향이나 도시를 떠나는 일은 죽음이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사형에 해당하는 극형이 성벽 밖으로 범죄자들을 내쫓는 행위로 나와 있다.
   
   스스로 자기가 속한 혈연공동체를 떠나 경제적 자유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히브리어로 ‘이브리’라 불렀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는 ‘Hebraios’, 라틴어로는 ‘Hebraeus’라고 번역되었다가 후대에 영어 ‘Hebrew’가 되었다. 고대 전승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 셈은 ‘에베르 자손들의 조상’이며 그 후대 아브라함은 ‘히브리인’으로 불린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우르지방에서 떠나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다시 가나안에 정착한 전형적인 ‘히브리인’이다.
   
   이들의 이동이 이집트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이나 벽화,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19세기경부터다. 고대 이집트 문헌에서는 이들을 ‘샤수(shasu)’라고 불렀는데, 고대 이집트어로 ‘맨발로 이동하는 자’란 뜻이다. 기원전 13세기 파라오 메르넵타 석비에선 이들이 ‘이스라엘’이란 명칭으로 등장한다. 이 석비에 고대 이집트어로 ‘이스리이르 페케트 벤 페르테프’, 즉 “이스라엘은 초토화되었고 그 자손은 더 이상 없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샤수는 모압, 에돔,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 지역 출신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집트어 문헌에는 샤수 외에 ‘하비루(Habiru)’라는 명칭도 등장한다. 기원전 13~기원전 2세기에 아마르나 문헌에 등장한 이 용어도 히브리인들과 어원적·사회학적으로 연관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대 근동 도시의 소작농으로 있다가 왕이나 귀족들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자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도망친 사람들이다. 성서에서는 이들이 이집트에서 노동자로 살다가 모세라는 지도자와 함께 탈출한 자들로, ‘온갖 잡족’이라고 표현돼 있다. 이들은 이집트란 당시 최고의 문명국에서 하층민으로 살다가 자신들을 변호하는 신(神)이 있다는 모세의 말을 듣는다. 그 신은 다른 나라들의 왕이나 귀족들을 위한 신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귀로 직접 들으며 그들의 고생을 눈으로 직접 보는 신이다. 그 신의 이름은 ‘야훼’이다.
 
 그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한 신이다. 이들에게 ‘야훼신이 유일신’이란 표현은 다른 민족이나 집단이 믿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니다. ‘야훼신이 유일신’이라는 표현에는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신만이 유일하게 ‘신’이라 불려야 한다는 신앙관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의 신은 ‘고아의 아버지, 과부를 돕는 재판관’으로 표현된다.
 
특히 ‘시편’ 82편엔 이스라엘 신이 법정에 나와 신들을 모아놓고 재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신만이 ‘고아와 과부를 변호해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신으로 등장한다.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신들은 거짓이며, 그 신들은 인간들처럼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아모스’라는 예언자는 바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이 소외된 자들의 복지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바로 이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가난한 농부이자 목동이었던 아모스
   
   예언자 아모스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절에 살았다. 그는 기원전 793~기원전 753년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한 예언자다. 아모스는 자신의 이름을 최초로 문헌에 남긴 소위 ‘문서 예언자’이기도 하다. 그가 다른 예언자들과 다른 점은 가난한 농부이자 목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유다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8㎞ 떨어진 테코아라는 시골 출신이다. 그는 거친 광야에서 양떼를 몰고 다녔다. 남유다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초원도 수없이 돌아다니며 예루살렘이나 베델과 같은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온몸으로 목격했다. 그는 자신의 배만 채우면 만족하는 보통 인간과는 달리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사막 한가운데서 동료 인간들이 종교와 결탁한 왕족, 특권층 귀족들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한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 사회 약자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여겨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는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들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다. 아모스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그의 예언자들을 향해 정의로운 말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요즘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의 시골에 사는 농부가 평양에 가서 북한 정치의 잘못에 대해 연설하려는 꼴이다.
   
   그는 신의 소리를 마음속으로 듣는다. 신은 그에게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가 국가의 번영이 자신의 선정의 결과라고 착각하는 자만심을 꾸짖으라고 명령한다. 남유다의 무명인사인 아모스에게 북이스라엘로 가서 신의 경고를 전하라는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모스는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과 같은 ‘히브리인들’에게 진리의 말을 선포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베델로 향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구조는 ‘나할라’라는 특별한 체계를 통해 지탱됐다. ‘나할라’는 보통 ‘유산(遺産)’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다.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운 후, 모든 부동산을 이스라엘 12지파에 배분했다. 이 부동산은 다시 각 지파에 속한 친족들에게 나뉘어졌고, 친족들 밑에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인 ‘베이트’에게 할당됐다. 이 직계가족에 속한 양도불가한 부동산이 바로 ‘나할라’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청지기처럼 가꾼다. 이들은 야훼가 ‘나할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토지는 몇몇 귀족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성문 앞에 모든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법정이 있었다. 이 법정은 사회의 약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로 주민들이 선출한 10여명의 원로가 약자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결정을 내리는 구조였다.
   
   아모스는 이 ‘나할라’ 제도가 왕족, 그리고 왕족과 결탁한 귀족들, 또 이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사제들과 예언자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봤다. 그리고 가난과 곤경에 빠져 있는 ‘히브리인들’을 목격했다. ‘나할라’의 주도권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을 경제적으로 억압하는 몇몇 탐욕스러운 중앙 관리들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선택한 그들의 신은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사회정의라고 가르쳤다. 자꾸 늘어가는 불의는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 그 기반 자체를 흔드는 정신적 재난이었다.
   
   아모스에게 신과의 계약은 본질적으로 동료 인간에 대한, 특히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와 직결돼 있다. 아니, 그 신과의 약속은 약자에게 베푸는 관심과 선행으로 완성한다. 그는 유대의 모든 구성원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중산층, 정부, 왕, 권력기관, 그리고 종교인들이 자신들끼리 성전 안에서만 유유자적하며 신을 섬기는 척한다고 고발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성들을 ‘바산의 암소’라고 부른다. 바산은 실제로 요단강 건너편 곡창지대를 이른다. ‘바산의 암소’라는 명칭은 사실 비하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결국은 도살장에 끌려가 살해당하고 갈고리에 꿰어 매달릴 운명이다. 지금은 호위호식하며 즐겁게 사는 귀부인들처럼 행동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신이 비난하는 범죄는 우리가 아는 살인, 강간, 폭력 등만이 아니다. 이러한 범죄들이 분명 사회의 도덕을 현저하게 파괴하는 중대 범죄이긴 하지만, 아모스는 모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항상 발견되는 사회에 만연한 죄를 지적한다. 이 죄들은 잘 드러나지 않고, 특히 가진 자들의 자발적 노력과 행위를 통해 견제되는 것들이다. 야훼신 역시 이러한 범죄들이 나라 전체를 멸망시킬 정도로 신을 화나게 하는 범죄라고 지적했다. 우리가 주위에서 항상 보는 뇌물 주기, 속이거나 끼워 팔기, 가난한 자들 학대하기, 그리고 채무자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부도덕한 마음과 행동은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아모스는 “도덕은 제의나 종교적 의무처럼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되지 않으나 도덕성이 신앙심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야훼신에게 예배 드리기 위한 전제조건은 도덕성의 확보이다.
   
   아모스는 신을 대신하여 북이스라엘에 외친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 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야훼신은 아무리 사람들이 모여 성대한 예배를 드리고, 값진 예물도 드리고,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연주와 찬양을 드려도 받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그는 그런 위선적인 예배가 역겹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회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는 가짜다.
   
   아모스에게 불의와 도덕적 불감증은 신성모독이다. 야훼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계약의무를 이행할 때 유지된다. 그 의무가 바로 사회정의이다. 사회정의를 행하지 않는 이들이 드리는 의례나 예배는 웃음거리다. 사실 예배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고자 하는 은총이지, 신에게 필요한 제도가 아니다. 예배는 인간이 의례를 통해 신의 존재를 자신의 공동체에 확인시키고 자신들이 잘못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비는 제도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점점 자신들이 신에게 많은 제물을 바치면서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형식적인 의례만 화려하게 치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성대한 의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신이 자신 편이라는 정신적 쾌감을 갖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아모스는 도덕성을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종교적 가치로 해석하였다. 신의 본질은 그의 도덕적 본성이다. 동료 인간에게 의롭고 자애로운 자는, 그 자신이 의롭고 자애로운 자가 된다. 자신과 동료 인간에게 도덕적인 자는 그 자신 안에 신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된다.
   
   
   아모스가 신을 대신해 고발한 것들
   
   이스라엘 사회가 도덕적 불감증과 불의의 늪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종교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의 강자 편에 서서 자신들의 세속적 이윤만 바라는 속물이 되었다. 북이스라엘에 가장 큰 성전이 있는 도시는 베델이었다. 과거 신앙의 조상 야곱이 사막 한가운데서 신을 만나 ‘사다리 꿈’을 꾼 후 이곳은 ‘베델’, 즉 ‘신이 계신 집’이 되었다. 베델은 원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신을 간절히 만나려는 사람에게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 어느 장소다. 그런 장소가 잠정적으로 ‘베델’이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유다의 예루살렘과 맞먹는 웅장한 성소를 베델에 지었다. 이들은 신이 그 웅장한 성소 안에만 계신다고 확신하고 이스라엘인들을 성전으로 불러모아 헌금을 징수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모스는 예언자에 해당하는 세 번째 용어인 ‘호제’를 사용한다. 그 기본적인 의미는 ‘세상을 상식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이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예언자는 더 이상 환상에 젖어 가난한 자들에게 형이상학적이며 삶과 유리된 말을 고상하게 포장하여 헌금을 걷어가는 자가 아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그런 종교인 노릇을 하며 밥을 빌어먹으라고 종용한다. 그는 베델이 왕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절대권력 왕에게 거스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 구절에서 당시 북이스라엘 종교의 타락상을 볼 수 있다. 종교인은 돈을 밝히는 세속 직업이 되었고, 종교는 정치와 유착되어 그 시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회지도층이라 굳게 믿고 선택한 자들이 스스로 누구인지 깊이 묵상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이기심을 좇을 때 그 사회는 허물어진다. 우리의 종교가 고아와 외국인 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의 눈으로 사회의 취약점을 발견해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게을리한 채 사회 기득권층의 이익만 강화하는 것은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치명적 실수다. 정의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행위다. 정의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살피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경청하고 이루어주는 거룩한 행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성스러운 가치를 ‘정의’라 한다.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사회인가?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의 눈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가?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4-14 14:29   |  수정일 : 2017-04-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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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  ( 2017-04-17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0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성스런 가치를 정의라 한다? 오히려 정의없이 멀쩡하게 지탱하고 있는 사회가 그 반대보다 더 부지기수로 많은 것 같은데...마치 수많은 속칭종교지도자들이 정의롭지 못하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듯이...지금 대한민국에 정의가 있냐? 떼거지들을 정의라 부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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