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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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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노조’ 만든 산업인력은 박정희가 키웠다

류석춘의 한국사회 읽기 〈5〉

⊙ 평준화 교육으로 도시 중상층 중심의 엘리트 교육체제 무너뜨리는 대신, 농촌 중하층을 위한
엘리트 기능공 양성 시스템 도입
⊙ 기계공고, 시범공고, 특성화공고, 일반공고 통해 50만명, 직업훈련 통해 62만명의 기능공 양성
⊙ 전국 공단에 배치되어 ‘1987 노동자 대투쟁 선도’, 오늘날 ‘귀족노조’의 주역

류석춘
1955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
《전통과 현대》 편집위원,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역임. 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기념재단 부이사장 / 《막스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한국의 시민사회-연고집단, 사회자본》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등 저술

글 |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1975년 11월 13일 정수직업훈련원에 들러 훈련생들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 1979년까지 직업훈련원을 통해 62만명의 기능공이 배출됐다.
  1970년대 초 대한민국은,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 때문에 안보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지 채 3달이 지나지도 않은 1973년 1월 12일 선언한 중화학공업화는 자주국방을 위한 핵심 사업이었다.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문제부터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야당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일(對日)청구권 자금을 비롯한 해외 차관(借款)을 적극 도입하여, 조선·전자·기계·제철·자동차·석유화학 등의 산업을 일으킬 대규모 공장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당시 노동시장에 넘치던 인력이 과연 그러한 첨단 산업에 필요한 숙련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나아가서 만약 숙련이 없다면 과연 그러한 기술을 익힐 가능성은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였다. 노동력의 질을 향상시키는 인력 공급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중화학공업의 꽃이라 불리는 기계산업은 절대 발전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자주국방은 공염불로 끝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절대다수의 노동시장 구성원은 대부분 낮은 학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중화학공업화 성공을 위해서는 이 같은 노동시장의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는 혁명적인 정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의 추진과 동시에 모든 국민이 과학과 기술을 익혀 인적 자원을 극대화하는 ‘범(汎)국민 과학화 운동’을 제창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과학기술개발 없이는 중화학공업 육성은 기대할 수 없다. 모든 경제목표 달성은 전 국민이 범국민적 과학기술 개발에 참여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어린이에서부터 대학생, 성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과학을 습득하고 생활화해야 한다.”(1973년 연두기자회견)
 
 
  ‘과학기술계 인력’을 양성하라
 
  이와 같은 과학기술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지가 숙련을 가진 노동자의 양성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우선 당시 정부가 ‘과학기술계 인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과학기술계 인력’이라는 개념의 도입은 5·16 혁명정권이 ‘기술계 인적 자원 조사 사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의하면 ‘과학기술계 인력’은 과학기술자, 기술공, 기능공으로 나뉘었다.
 
  ‘과학기술자’는 창조적 업무활동을 수행하는 자로서 학자 또는 전문가적 성격을 가지며 일반적으로 4년제 이공계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지향하며, 연구개발, 기본계획 및 관리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기술공’, 즉 현장기술자는 일반적으로 생산 현장에 투입되어 생산기술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혹은 중학교 졸업 후 5년 정도의 전문적 기술교육을 받으며 시공 및 생산설계, 기술 및 공정지도관리 등의 기능을 주로 수행하는 자이다. ‘기능공’은 장기적인 체험과 훈련을 통하여 습득된 기능을 활용하여 제작, 제조 및 운전 등의 생산활동을 수행하는 자로서 실기교육과 현장실습이 가장 요구되는 기술 인력이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10년 동안의 과학기술 인력의 수요와 공급을 세밀하게 예측했다. 과학기술자는 1972년 현재의 공급 기준으로 10년 후인 1981년이 되면 약 5만명의 인력이 초과 공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기술공은 1972년 현재의 공급 기준으로 10년 후인 1981년이 되면 약 16만명이 모자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능공은 1972년 현재의 공급 기준으로 10년 후인 1981년이 되면 약 134만명이 모자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과학기술계 인력 가운데 고학력자의 수급은 문제가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은 분야의 수급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예측되었다.
 
  따라서 당시 과학기술 인력 정책의 핵심은 예상 수요를 전혀 감당할 수 없는 ‘기능공’ 및 ‘기술공’ 인력을 어떻게 확보, 공급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숙련 노동자의 양성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는 문교부(현 교육부)를 통해 실업고등학교 그중에서도 특히 ‘공업고등학교’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공부를 통해 공공훈련을 포함한 ‘직업훈련’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평준화 정책과 우수 실업고 육성 정책
 
중학교 입학시험이 폐지된 후인 1969년부터 학생들은 은행알 추첨기(속칭 ‘뺑뺑이’)를 돌려 진학할 학교를 배정받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교육 문제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된 쟁점은 인문계 중심의 엘리트 충원 구조였다. 당시 자연과학, 즉 이공계 대학 출신은 변변한 직장이 없어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반면, 인문계 대학 출신은 국가기관이나 은행과 같이 안정된 분야에서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야 했다. 여기에 더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에, 좋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좋은 중학교에, 그리고 좋은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좋은 초등학교에 가야만 하는 입시구조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입시지옥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진학하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상층은 물론이고 중산층까지도 어린 자녀들에게 입시를 위한 과외공부를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부의 1968년 ‘중학교 평준화 정책’ 그리고 1974년의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시행된 혁명적인 교육 정책이었다. 두 단계의 평준화 정책으로 상급학교 진학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명문 중학교 그리고 명문 고등학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부는 왜 인문계 위주의 엘리트 교육을 허무는 대신, 그 역할을 대체할 새로운 엘리트 교육 체계를 만들지는 않았는가? 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에서 대기업 중심의 성장 모델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교육에서는 중상층 이상의 엘리트 집단에 타격을 가하는 평준화 정책을 시행하였는가?
 
  이 문제는 인문계 엘리트 중·고등학교의 해체라는 단일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문계 엘리트 학교의 해체를 그와 동시에 추진된 중화학공업화 및 그에 필요한 과학기술 인력의 양성이라는 문제까지로 확대해서 입체적으로 바라보면, 권위주의 박정희 정권의 ‘평등지향성’ 혹은 ‘농촌 중간계급 지향성’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박정희 정부는 도시 중상층 출신 자녀를 주된 수요로 하는 엘리트 교육 체계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농촌 중하층 출신 자녀의 수요를 적극 수용하여 엘리트 기능공을 양성하는 교육제도, 즉 ‘우수’ 실업(공업)고등학교 육성 체계를 새로이 도입했기 때문이다.
 
 
  공업고등학교 특성화 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12월 23일 부산기계공고를 찾아 학생들을 격려했다.
  학교교육을 통한 과학기술 인력 양성, 특히 기능공의 양성은 실업교육, 특히 공업교육을 대폭 강화하면서 교과과정을 실험·실습 위주로 개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전국의 모든 공업고등학교를 대상으로 동일한 지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별로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인력을 지역과 부문별 산업의 특성에 맞게 육성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이루어졌다. ‘공업고등학교 특성화’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기계공고’는 기계산업에서 필요한 기술을 숙련해 고도의 정밀가공 능력을 갖춘, 즉 1/100mm 이하의 단위로 재료를 가공할 수 있는 ‘정밀가공사’를 양성하는 학교로서, 정밀기계, 배관, 금속, 전기, 용접, 공업계측 등의 전공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에게 학비를 면제해 주었으며 희망자에게는 저렴한 기숙사 시설 및 낮은 금리의 생활비 융자도 제공했다. 1973년 금오공고, 성동공고, 국립부산공고(부산한독직업학교), 전남공고를 정밀가공기능사 양성학교로 지정한 후, 1974년에 기계공고로 명칭을 바꾸었다. 〈표〉에서 보듯이 기계공고는 1979년까지 19개 공고로 확대되면서 전국적으로 골고루 분포하게 되었다. 1979년 이들 학교의 입학 정원은 총 1만20명이었다. 따라서 1979년을 전후로 기계공고 졸업생이 매년 약 1만명 정도 배출되고 있었다.
 
  당시 일반공고의 학비 면제 장학생 비율이 15% 수준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기계공고는 50% 이상의 학생이 학비 면제 혜택을 받았다. 또한 재학 중에 ‘정밀가공사’ 2급 자격을 획득하면 연간 10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하여 대부분의 학생이 졸업 전에 자격을 취득하도록 유도하였다.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저리의 기숙사비 혹은 생활비 융자를 제공해 가난하더라도 재능만 있으면 얼마든지 학교를 마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기계공고 입학생들은 거의 전원이 정밀가공사 자격을 취득하고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는 전국기능경기대회를 석권하여 기존 산업체의 기능공들을 압도하였고, 기능올림픽에 출전하여 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려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당시 성장하고 있던 중공업 부문의 대기업에 경쟁적으로 선발되어 100% 취업이 보장되는 상황이었다.
 

 
  중동 진출 기능공 배출한 시범공고
 
  한편, ‘시범공고’는 해외 진출 특히 중동 진출에 소요되는 기능공 중 기계조립, 판금, 용접, 배관, 제관, 전기공사 등을 전공으로 하는 인력의 배출을 목적으로 1976년 3월 〈표〉에서 보듯이 시도별로 1개 학교씩을 지정하여 총 11개 학교를 육성하였다. 시범공고는 당시 중동의 건설 수출을 주도하던 대림산업, 현대건설 등과 같은 기업과의 산학협동을 통해 양성기능사 1인당 20만원씩의 운영비와 실습재료비를 회사 측에서 학교에 제공하는 방식, 즉 ‘위탁 기능인력 양성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977년 한 해에만 대림산업은 8개 공고(서울공고, 용산공고, 안양공고, 춘천공고, 천안공고, 전주공고, 목포공고)에 합계 2억1000만원, 그리고 현대건설은 3개 공고(부산공고, 대구공고, 울산공고)에 합계 9000만원을 각각 지원하였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시범공고 학생들 역시 졸업 전에 ‘국가기술자격제도’에서 규정하는 ‘기능사 2급’ 자격증을 거의 대부분 취득할 수 있었다. 이들 학교의 전체 입학 정원은 대략 9000명 수준이었으므로, 같은 숫자의 2급 기능사들이 배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범공고 학생들 중 특히 ‘해외 진출 기능사 중점양성 과정’에 선발된 학생들은 여러 가지 특전을 받았다. 우선 2급 기능사 자격을 획득하면 현장실습을 하는 동안 회사로부터 월 2만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졸업과 함께 해외취업이 100% 보장되었다. 취업 후 현지에 가면 본인의 숙식비 등 현지생활비를 회사 측이 전액 부담하였고, 여기에 더해 월 15만원 이상(매년 5만원 인상)의 송금도 보장받았다. 이는 물론 월급에 더한 수입이었다. 또한 당시 시행되던 병역법이 병역 미필자의 해외 취업을 금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특별 규정에 의해 예외적인 대우를 받아 해외 진출 회사에서 5년간 근무하면 병역을 마치는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기계공고와 마찬가지로 시범공고 학생들도 능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금오공고
 
금오공고에 있는 기능탑.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특성화공고’는 〈표〉에서 보듯이 전자, 건설, 금속, 제철, 화학, 전기, 철도, 광산, 항공 등과 같은 특정 분야의 기능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총 12개 공고를 지정하여 육성하였다. 특성화공고의 운영은 기계공고의 운영에 준하여 시행되었기 때문에 학비 면제, 장학금, 기숙사, 생활비 대출 등과 같은 학생 복지 차원에서 기계공고와 거의 동일한 혜택이 주어졌다. 학생 대부분이 졸업할 때까지 2급 기능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모두 관련된 산업에 100% 취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 학교도 농촌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학교는 합해서 대략 600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특성화공고’ 가운데서도 금오공고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금오공고는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 아래 대일청구권 자금을 기반으로 1973년 개교한 학교이다. 처음에는 기계공고로 출발하였으나 1977년부터 ‘중견 기술요원 양성 공업고등학교’로 특성화되었다. 금오공고는 재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등록금은 물론 학비도 전액 지원을 하였으며, 실험실습을 위한 설비도 최첨단 장비가 보급되었다. 이 학교는 ‘공업입국’의 선봉이 되는 표본적인 학교로서 자리매김되어 1970년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학교 학생들은 2급 기능사 자격을 100%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기능올림픽에도 출전하여 메달을 수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금오공고 졸업생들 가운데 성적과 기능이 우수한 학생들은 1980년 3월 개학한 금오공과대학으로 계속적인 장학 혜택을 받으면서 진학할 수 있었다.
 
 
  기업인들에게 일반공고 참여 독려
 
  이와 같은 3가지 유형의 특성화 공업고등학교 말고도 1979년 현재 전국에는 ‘일반 공업고등학교’가 55개 존재했다. 일반공고는 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기능공을 양성 및 공급하는 학교였지만, 당시 정부의 재정 형편상 투자 순위가 낮아 앞에서 살펴본 기계·시범·특성화 공고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지원이 빈약하였다.
 
  사립공고가 대부분인 일반공고를 당시 ‘우수공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정부는 능력 있는 기업인이 학교를 지원, 신설, 인수 하는 등의 방법으로 학교 운영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 공고 신설을 불허하여 부실 공고가 새로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1978년 설립한 울산의 ‘현대공업고등학교’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설립된 일반공고의 대표적 예다. 이들 55개 일반공고의 졸업생은 1979년 합해서 대략 2만5000명 정도라고 추정된다.
 
  일반공고 재학생 가운데 얼마나 많은 숫자가 졸업할 때까지 ‘2급 기능사’ 자격을 획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교육부는 1979년 공고 출신을 포함한 기능사 2급 수험대상 인원의 목표 합격률을 85%로 설정하고 있었다. 인력 수급에 관한 당시 교육부의 목표는 모두 초과 달성되고 있었으므로, 공고 출신 응시자의 실제 합격률은 85%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79년 공고 졸업생 5만명의 85%, 즉 약 4만3000명 정도가 합격했을 것이라고 추산할 수 있다. 한편 앞에서 살펴본 기계·시범·특성화 공고 출신의 합격률은 거의 100%였으므로, 공고 출신 총합격자 4만3000명에서 ‘우수공고’ 출신 합격자 총수인 2만5000명을 빼면 대략 1만8000명 정도의 ‘일반공고’ 합격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론된다. 다시 말해 ‘일반공고’ 졸업생 2만5000명 가운데 약 1만8000명가량이 2급 기능사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반공고’의 2급 기능사 합격률은 대략 72% 정도가 된다.
 
 
  공고 통해 ‘개천에서 용 나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보아 ‘공업고등학교 특성화’ 정책은 기계·시범·특성화 공고라는 ‘우수공고’와 ‘일반공고’라는 투 트랙으로 운영되었다. 우수공고에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실험을 위한 기자재부터 실습에 필요한 재료까지, 또한 장학금에서부터 생활비 혹은 기숙사비의 저리 지원까지 다양한 혜택이 주어졌다. 또한 이들 우수 학교는 전국적으로 골고루 분산되어 분포하고 있었으며, 입학하는 학생의 숫자가 1979년에는 전체적으로 약 2만5000명에 달했다. 교육과정 또한 내실이 있었던 만큼 당시 추진되고 있던 중화학 및 첨단 산업 분야 대기업에서의 수요가 많아 졸업생들은 100% 취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수공고’는 당시 상대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던 농어촌 중하층 출신의 우수한 인재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반면에 또 다른 약 2만5000명의 ‘일반공고’ 학생들은 ‘우수공고’와 같이 어려운 경쟁을 통해 입학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역시 졸업 후의 진로가 그렇게 어두운 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 가운데 졸업과 함께 ‘2급 기능사’ 자격을 획득한 72%의 경우에는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중화학공업의 인력 수요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2급 기능사 자격을 따지 못해도 학교를 졸업하면서 이들 역시 ‘기능사보’ 자격으로 여전히 중화학공업 분야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인문계 고교 평준화’와 함께 시작된 ‘공업고등학교 특성화’는 이와 같이 당시 사회의 중하층 계층 특히 농어촌의 중하층 계층에게 새롭고 전도가 유망한 직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매우 역동적인 교육정책이었다. 1970년대 중반 농어촌의 중하층은 기능공 양성이라는 새로운 교육의 기회를 이용해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었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표〉에 정리되어 있듯이 ‘공업고등학교 특성화’ 정책을 통해 ‘2급 기능사’ 혹은 ‘기능사보’로 육성된 고교 졸업자는 1979년 한 해에만 5만명을 넘나드는 숫자였다. 그러므로 이를 1972년부터 1981년까지 누적하면 약 50만명의 공고 졸업생이 기능공으로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체적으로 보아 이러한 혁명적 변화의 시작은 자주국방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중화학공업화로부터 비롯된다.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 유신체제는 농어촌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계층의 상승이동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유신이 평등지향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는 ‘정치적 갑옷’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한국 현대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민주화 이후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흙수저’ 혹은 ‘헬조선’ 등의 담론이 퍼지는 상황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직업훈련
 
  부족한 기능공을 충원하는 통로로 공업고등학교를 특성화시키는 방법 말고 활용된 대안이 직업훈련이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기 이전까지 존재하던 직업훈련은 1967년 1월 제정된 ‘직업훈련법’에 따라서 시행되었다. 이 법은 직업훈련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공공직업훈련’과 ‘사업 내 직업훈련’이다.
 
  본격적인 공공직업훈련의 확충은 주로 국제원조 자금과 차관 자금으로 이루어졌다. 국제원조 자금으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업이 UNDP 자금으로 1968년 설립된 ‘중앙직업훈련원’이다. 또한 1971년에는 독일의 지원으로 ‘한독부산직업공공훈련원’이 그리고 1976년에는 일본 정부의 협조로 ‘대전직업훈련원’, 벨기에의 도움으로 ‘한백창원직업훈련원’이 각각 설립되었다. 공식적인 국제원조라고는 할 수 없지만 1973년 용산의 보광동에 설립된 ‘정수직업훈련원’ 또한 미국 하원의원 오토 패스먼(Otto Passman, 루이지애나)이 육영수 여사를 후원한 자금으로 건립되었다. 이와 같은 5개의 국제협력에 의한 공공직업훈련원과는 별도로 노동청은 ADB 및 IBRD 등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전국에 모두 20개의 공공직업훈련원을 설치했다.
 
  한편, 사업 내 직업훈련은 사업체가 경영상의 필요에 의해 그 종업원 혹은 종업원이 될 수 있는 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직업훈련을 말한다. 사업 내 직업훈련 중 보건사회부령(令)에 적합한 기준인 경우 그 훈련을 행하는 자의 신청에 의해 노동청장이 인정을 하면 ‘인정직업훈련’으로 구분했다. 인정직업훈련 기관은 공공직업훈련 기관처럼 직업훈련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노동청으로부터 보조받을 수 있었다. 인정직업훈련의 이와 같은 보조금 제도는 사업 내 직업훈련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즉 3차 및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10년 동안 ‘직업훈련’을 통해 약 81만명의 기능공이 배출되었다. 시기를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한 1979년까지로 국한하면 약 62만명 규모의 기능공이 배출되었다.
 
 
  ‘귀족노조’의 탄생
 
1989년 6월 임금협상에 앞서 ‘협상에서의 승리’를 다짐하고 있는 대우조선 노동자들. 박정희 시대에 양성된 기능공들은 이후 노동운동과 ‘귀족노조’의 주인공이 됐다.
  같은 기간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공고’ 교육을 통해 충원된 기능공의 규모 또한 약 50만명에 달했다. ‘공고’와 ‘직업훈련’의 실적을 합치면 전체 131만의 기능공이 배출된 셈이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기능공 양성이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정부의 예측, 즉 10년 동안 134만명의 기능공 양성이 필요하다는 예측이 실제로 차질 없이 집행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결과다.
 
  이렇게 하여 양산된 기능공들은 지리적으로 울산, 마산, 창원 등과 같은 중화학공업단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을 폭발시키며 ‘87 노동자 대투쟁’을 주도했다. 1987년 이후 이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임금 또한 한껏 끌어올렸다. 1997년 위기 이후에는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노동조합의 힘으로 헤쳐나가며 조합에 가입할 자격이 없는 ‘비정규직’을 희생양으로 삼아 스스로의 위치를 보존하기도 했다.
 
  오늘날 대기업 부문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속해 있는 ‘귀족노조’ 집단이 그들로, 이들은 다른 분야의 비숙련 노동자들과 비교하여 계층의 상승이동을 실현할 수 있었던 집단으로, 소속 기업으로부터 제공받는 임금, 직장의 안정성, 복지혜택 등에서는 결코 소외된 집단이 아니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산층을 구성하는 핵심 집단이다. 이 숙련 노동자들의 뿌리에 1970년대 박정희가 추진한 중화학공업화가 자리 잡고 있다.⊙
 
[월간조선 2017년 3월호 / 글=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3-13 09:04   |  수정일 : 2017-03-1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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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호  ( 2017-03-19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1
공업 인력을 양성하여 대한민국이 오늘날과같이 잘살수있게 만든 이가 박정희 대통령인것은 사실인데 귀족노조 탄생으로 공업고 중시정책이 잘못 되었다는 글로 제목을 줕이면 되겠소? 귀족노조 탄생은 그후 사용자들과 좌파정부의 책임이 튼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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