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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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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과 우리사회의 '헬조선' 논쟁

책임 있는 보수주의자가 가져야 할 책임의식은 무엇일까?

글 |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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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인의 종말」 저자 피터 드러커
피터 드러커가 젊어서 출간한 ‘경제인의 종말(1939)’은 2차 대전 직전의 유럽 사람들이 전체주의에 빠져들던 모습을 분석한 책이다. 이 시기를 분석한 드러커의 저술은 현재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인(economic man)’이란 18세기 산업혁명 이래 서구 유럽의 인간 모델로서 경제적 만족만이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인간에 대한 가설을 말한다.
 
서유럽 사람들이 전체주의 파시즘에 빠져들게 된 이유 
 
경제인의 종말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당시 서구 유럽 사람들이 전체주의 파시즘에 빠져들게 된 것은 온갖 ‘주의(ism)’가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주제는 후에 ‘기능하는 사회(functioning society)’라는 주제로 다시 정리되었다. 둘째 부분은 전체주의의 등장, 그 행태, 정책, 그리고 미래의 전망에 관해 설명했다. 드러커는 전체주의를 역동적인 신질서의 서곡이라는 히틀러의 선전을 믿지 않았고, 이는 붕괴 중인 구질서의 말기 증세쯤으로 해석하면서 나치즘이 곧 몰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책에서 밝혔다. 특이하게도 드러커는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동종인 히틀러와 스탈린이 연합할 것이라든가, 후에 구소련이 망할 수밖에 없는 체제임을 예언함으로써,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미래학자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여기서는 두 주제 중 첫째 부분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본다.
 
드러커에 의하면 전체주의가 대두된 것은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마저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드러커는 파시즘, 공산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 이념보다 자본주의가 갖는 시장 메커니즘이 자유의 속성을 그 안에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전체 경제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 분명한 강점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파시즘 경제나 사회주의 경제가 현실 속에서 실패로 드러나기 전이었음에도 사회의 작동원리에 대해 인문학, 정치 철학적 식견을 잘 갖추었던 드러커로서는 전체주의의 중앙 계획경제가 자만심에 가득 찬 오류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드러커는 시장 자본주의의 장점을 알면서도 시장 자본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한 것은 시장자본주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정신적 가치에 등한함으로써 천박한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의 등장을 막아내지 못한 무능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도피
 
당시 전쟁과 경제 공황의 공포 속에서 수동, 무관심, 냉담으로 가득 찬 유럽의 대중은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도피하여 선동가들의 비이성적인 호소에 기꺼이 몸을 맡겼던 것이다. 지금 한국의 상황으로 보자면 지난 30여 년간의 세월은 자유시장 경제를 포기하고 공평, 분배, 복지를 내세우며 사회를 계획경제 쪽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에 대해 시장 자본주의를 지켜내려는 의지가 실종되고, 보수주의자는 중도를 표방하고, 중도에서 또 한 걸음 후퇴하여 나중에는 대다수가 자유주의 체제에 냉소적인 대중에 동조됐던 것이 아닌가 반성해 본다. 현 상황을 초래한 여러 원인 중에서 한국의 정통 세력이 시장 자유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견고한 정신적 가치에 대해 나태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비판하고자 한다. 이런 반성이 오늘의 사태를 바로잡을 희망을 실현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물론 피터 드러커가 제시하는 기준은 높고도 험하다는 것을 안다. 후일 그는 경제인의 종말에서부터 천착했던 ‘기능하는 사회’의 개념을 지식 근로자의 공헌이라는 개념으로 재탄생시켰다. 그의 사상에 의하자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는 이 땅의 지식인 그룹(지식근로자)이 높은 기준의 책임감이 없고 공헌 의식이 없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실상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경제체제를 논한다면 기껏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얘기하고, 따라서 개인이나 개별 기업이 열심히 경제적 부를 추구하면 사회는 잘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식의 설명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드러커거 보기에 영적으로는 사후 세계나 초자연적 존재를 향한 개인의 책임이나 자연법적 인간의 존엄 같은 가치는 관심 없고, 그저 교회에 열심히 출석만 하면 자신의 신앙생활은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이비 신자와 비슷한 것이다. 드러커에 의해 평한다면 한국사회에는 시장 자본주의 속에 내재하는 개인의 품위, 질서 정신, 규칙의 준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 속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책임의식 같은 정신적 가치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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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김의균 기자 / 조선DB

예를 들어 젊은 사람들 오랫동안 회자한 '헬조선' 신드롬에 대해 사회의 정당성 있는 기성세대가 가져야 할 책임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단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파시즘적 선동에 빠져들 위험을 알리는 신호라 할 만하다. 자신의 처지가 희망이 없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을 부추겨서 정치적 입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려는 세력들이 이 단어를 퍼뜨렸다.
 
보수주의나 시장경제의 정신적 가치
 
한편, 오늘날의 한국 경제를 일으킨 주역들은 이 단어가 철없고 배은망덕한 표현일 뿐이라고 분개할 뿐 이 현상을 자신들의 책임과 관계 지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그리도 오랫동안 젊은이들 입에 오르내리고, 기성 세대가 이 단어의 부당함을 타이르는 점잖은 설득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데는 역시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보수주의나 시장경제의 정신적 가치에 대해 나태했다는 점을 반성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지속해서 발전하기를 염원하는 책임 있는 보수주의자라면, 단지 이런 용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절대적인 지표만 본다면 ‘헬조선’이란 단어는 말이 안 된다. 세계 10위 안에 드는 교역국, 3만 불 가까운 GDP 등 거시경제 지표를 보면, 수십 년 전 세계 최빈국을 거쳐 오늘의 번영을 가져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세대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이 철없는 투정을 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이 단어를 씀으로써 표현하고 싶은 생각은 자신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소외감이다. 청년실업 등으로 나타나는 고용 없는 성장은 젊은이들을 사회 속에 의미 없이 부유하는 존재인 것 같은 위기감을 주고 있다.
 
회고하자면, 우리가 한 세대 전에 젊은이들이 처했던 상황은 비록 경제 규모는 지금보다 적었고 따라서 급여도 적었지만, 사회 전반이 성장하는 경제여서 일자리가 많았고 사람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반면에 지금은 비록 풍요로운 거시경제 지표를 갖고 있지만,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해서 실질 청년실업률이 20%를 넘을 정도다. 그렇다면 사회의 책임 있는 보수주의자라면 이 용어를 쓰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좌절과 위기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가 역주행을 시작할 때 장차 이런 사태가 오지 않도록 온몸을 바쳐 저항도 하고 상태를 호전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과연 얼마나 했는가, 또 그런 행동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모색은 얼마나 했는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지난 30여 년 전을 돌이켜 보면, 예전에 한때 민주화 운동을 한다면서 노동조합원들이 공장장을 무릎 꿇리고 모욕을 주던 시기가 있었다. 그 후에 많은 기업이 한국 내에서 투자하기보다는 공장을 뜯어 중국이나 동남아로 이전했고, 중소기업은 정부의 지원제도에 매달리는 세월이 오래 계속되었다. 노조에 의한 고용 경직성과 투자 의욕의 저하 같은 일이 지속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고용 없는 성장을 맞게 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기업가 그룹의 책임은 무엇인가?
 
그러나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을 읽고 한껏 기준을 높여 반성해 보면, 현대 산업 경제의 주역인 기업가 그룹은 진정 책임 있는 보수주의자로서 한국의 장래를 위해 더욱 책임감 있는 자세를 갖고 목소리를 냈어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영자라면 정부의 지원을 바라지만 말고 혁신을 통해 독일과 일본의 강소기업들처럼 작지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거듭나는 투지를 가졌어야 한다.
 
 대기업의 경영진은 과거 이병철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기업의 목적이 사업을 통해 국가를 보위하는 ‘사업보국’임을 지속해서 천명했어야 한다. 또 노조를 향해서도 그때그때의 위기를 모면한다는 자세보다는 정도를 지키는 자세를 지키며 회사 밖의 근로자까지 함께 생각하자는 책임의 정신을 설득하는 리더십을 보였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 지금의 한국 기업은 일본, 미국에 비교도 안 되는 생산성을 내면서 근로자의 급여는 오히려 그들보다 높은 기형적 구조가 되었으며, 동시에 노조 밖에 있는 수많은 근로자는 극심한 차별 속에 방치된 결과가 되었다. 또 3차 산업, 서비스 산업에서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는 노력이 더 필요했는데도 기업들은 대부분은 정부 탓, 환경 탓을 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사회 전반이 가하는 일반 환경의 악화에 대해 기업으로서 별도리가 없는 측면이 크지만, 책임 있는 보수주의자로서 져야 할 책임의식 역시 부족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03-30 13:50   |  수정일 : 2018-03-3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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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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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근  ( 2018-04-01 )  답글보이기 찬성 : 8 반대 : 6
여기에 또 사이비 어설픈 지식인이 헛소리 떠드시네요. 일견 들어보면 보수의 잘못도 있다는 엉뚱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잘못이 있다면,지나온 세월동안 어떻게든 경제를 성장시키겠다고 앞만보고 달려온 것이지요. 지금은 사상과 이념의 전쟁터 입니다.아직도 이렇게 나이브하고 어설픈 주장을 하나 사이비 지식인이 있으니 그것이 더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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