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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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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실리콘밸리 이야기(2)]
노이만, 쇼클리...컴퓨터와 반도체 진화의 역사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컴퓨터의 아버지 폰 노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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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아인슈타인과 존 폰 노이만


오늘날의 컴퓨터를 만든 사람은 컴퓨터 공학자가 아니라 컴퓨터 개발을 먼발치로 지켜보던 한 수학자였다. ‘존 폰 노이만’ 
 
컴퓨터와 인터넷 역사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친 연구기관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이다. 이 연구소는 평생 아무 책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꿈의 연구소이다. 그 첫 종신교수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존 폰 노이만이다. 둘 다 유대인이다. 일반대중에게는 아인슈타인이 유명하겠지만, 컴퓨터와 인터넷 역사에서는 폰 노이만이 훨씬 중요하다. 
 
2차 대전 때 폰 노이만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그의 천재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프로젝트 책임자인 유대인 오펜하이머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그는 원자폭탄의 개발과정에 개입하면서 컴퓨터 개발의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공동연구 중 수소폭탄의 효율계산을 위해 페르미는 대형 계산자, 파인먼은 탁상계산기로, 노이만은 천정을 바라보며 암산했지만, 노이만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값을 냈다.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서 그는 미 육군이 초대형 계산기 ‘에니악’을 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니악은 18,000여 개의 진공관과 1,500개의 계전기를 사용했고, 무게가 30t이나 되는 거대한 기계였다. '컴퓨터'(Computer)라는 명칭은 계산한다는 뜻의 라틴어 'Computare'에서 유래했다. 이 초기 컴퓨터는 말 그대로 계산만 할 줄 알았지 기억능력이 없었다. 에니악은 주로 군사용 계산에 쓰였다. 미사일의 궤적과 비행거리, 수소폭탄의 폭발력, 암호해독 등 인간의 머리로는 처리하기 어려운 복잡한 계산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하지만 노이만은 에니악에 문제가 많다고 느꼈다. 이 컴퓨터에 다른 일을 시키려면 외부 프로그램 방식이라 배선판 전기회로를 모두 바꿔주어야 했다.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사람이 수천 개의 배선판을 며칠 걸려 다시 세팅해야 했다. 
 
당시 에니악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들이 많았다. 하지만 세계적 수학자 노이만이 후견인이 되자 분위기가 단번에 반전되었다. 노이만은 수학자였음에도 컴퓨터 공학자도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획기적인 이론을 개발했는데 바로 ‘프로그램 내장 컴퓨터’가 그것이다. 
 
중앙처리장치(CPU) 옆에 기억장치(Memory)를 붙여,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저장해 ‘기억시켜’ 놓았다가 사람이 실행시키는 명령에 따라 작업을 차례로 불러내어 처리하는 개념이었다. 이로써 그는 계산 기능만 있는 멍텅구리에 뇌를 만들어 붙여 컴퓨터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그는 컴퓨터가 계산 능력밖에 없는 멍청한 기계가 아니라, 뛰어난 ‘논리기계’(logic machine)라는 개념을 최초로 창안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에드박(EDVAC)으로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 컴퓨터였다. 이것이 1세대 컴퓨터다. 
 
현재 존재하는 스마트폰을 포함한 대부분의 컴퓨터를 '노이만 방식'이라 한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1940년대에는 가히 혁명적인 발명이었다. 노이만 방식 컴퓨터 등장은 그 뒤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했다. 1951년에는 유니박 I(UNIVAC-I)을 만들어 상품화에 성공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이다. 이렇게 많은 과학기술이 전쟁으로 인해 탄생했다. 2차 대전은 과학기술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바로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트랜지스터의 아버지 윌리엄 쇼클리와 페어차일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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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쇼클리

이렇게 초창기 컴퓨터는 부피가 너무 컸다. 컴퓨터의 기억장치를 이루는 회로소자로서 수 천, 수 만개의 진공관을 사용해 연산을 했기 때문이다. 전력소비가 많다보니 열이 많이 났다. 따라서 고장도 자주 나고, 열을 식히기 위해 냉각장치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부피가 너무 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한 번 계산할 때마다 이 진공관들을 새 것으로 교체해주어야 했다. 과학계는 이 난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때 이를 해결한 인물이 있었다. 능력은 뛰어난데 성격이 괴팍하고 까다로운 천재. 현대 소형컴퓨터 기술의 출발점이이라 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의 개발자이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쇼클리가 바로 그다. 
 
쇼클리는 1910년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그는 22세인 1932년 캘리포니아공대를 졸업하고, 불과 3년 뒤 MIT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클린턴 데이비슨의 눈에 띄어 26세 나이에 당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벨연구소 연구원이 된다.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당시 학계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진공관을 대체할 수 있는 전자증폭기의 개발이었다. 진공관은 20세기 초반에 개발되어 당시 컴퓨터와 대부분 전자기기의 핵심부품으로 쓰였다. 하지만 부피가 커 회로 크기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발열이나 전력소모 문제도 심각했지만 그 보다 내구력이 취약했고 값이 비쌌다. 때문에 컴퓨터의 소형화와 대중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쇼클리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에 몰입해 반도체 기반의 증폭기 곧 '트랜지스터'의 기본개념을 고안해내어 그 개발에 전력했다. 참고로 트랜지스터(transistor)라는 이름은 transfer(전송) + resistor(저항)의 두 단어를 합친 것이다. 
 
그는 마침내 1951년 7월 새로운 개념의 ‘접합형 트랜지스터’ 개발에 성공했다. 이로써 기억장치를 이루는 회로소자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등 반도체 소자로 대체되어 크기가 작아지고, 소비전력이 적게 들고, 냉각기의 필요성이 감소되었으며, 무엇보다 고장이 적어 신뢰성이 높아졌다. 대성공이었다.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2세대 컴퓨터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뒤 쇼클리는 벨연구소를 떠나 1955년 벡맨인스트루먼트의 지원 아래 자신의 이름을 딴 ‘쇼클리 반도체연구소’를 세웠다. 쇼클리 반도체연구소에는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는 나중에 인텔을 세운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도 있었다. 
 
쇼클리 반도체연구소는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인재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쇼클리의 까다로운 성격과 고압적인 운영방식이었다. 결국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 등 8명의 연구원이 쇼클리의 운영 방침에 반발해 1957년 연구소를 떠났다. 그들은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로 옮겨 ‘페어차일드반도체’를 설립했다. 쇼클리는 이들을 ‘8인의 배신자들’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출처; 김영우, IT동아 기자) 
 
 
8인의 배신자들부터 시작된 실리콘밸리 반도체산업 
 
배신자 8인이 만든 페어차일드는 트랜지스터 제조 선두기업이 되었다. 이른바 플래너 공정은 트랜지스터를 보다 싸고 쉽게 제조하면서도 성능은 크게 향상시킨 뛰어난 혁명이었다. 이로써 배신자 8 명의 플래너 트랜지스터는 크게 성공했다. 
 
그 뒤에도 반도체 혁명은 계속되었다. 2년 뒤 이들은 4개 트랜지스터 회로를 하나의 실리콘웨이퍼에 집적시키는데 성공했다. ‘실리콘 집적회로’(IC: Integrated Circuit)가 탄생된 것이다. 이 집적회로를 기억장치 구성소자로 사용한 IBM사는 1964년 4월 'system 360'이라는 새로운 기종을 발표했다. 이때부터를 제3세대라고 부른다. 
 
컴퓨터에 IC를 사용함으로써 중앙처리장치는 소형화되면서도 기억용량은 더 커졌다. 따라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구사할 수 있어 기능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후 페어차일드는 집적회로 개발로 실리콘밸리의 떠오르는 별이 되면서 직원도 12,000명으로 늘어나 대기업이 되었다. 
 
그러자 초기의 창립자들은 페어차일드를 떠나 다시 새로운 창업을 시작했다. 초기 창립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난 사람은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로 이들이 1968년에 인텔을 창업했다. 그리고 유진 클라이너는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로 성장하게 되는 KPCB를 설립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실리콘밸리의 거물이 되었다. 내셔널 세미컨덕터와 어드밴스드 마이크로 디바이시스 등의 회사도 페어차일드에서 갈라져 나온 회사들이다. 
 
이들 8인이 실리콘밸리에 반도체산업을 부흥시킨 초창기 멥버들로 이로써 IT 생태계는 혁명적으로 변화를 맞이했다. 이런 반도체회사의 급성장으로 실리콘을 재료로 하는 반도체 산업이 샌프란시스코 남쪽 밸리를 번영케 했다. 그 뒤 사람들은 이 지역을 실리콘밸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유대인 앤디 그로브 등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 모은 인텔은 메모리 반도체로 승부를 걸었다. 1969년 첫 메모리칩을 출시한 이래 10여 년간 메모리 시장은 인텔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일본 반도체가 저가공세를 펼치면서 위기가 닥쳐왔다. 그때 앤디 그로브의 진가가 발휘됐다. 메모리를 포기하고 CPU만을 생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인텔= CPU’의 등식이 성립하는 새로운 인텔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참고; 이병철의 도전, 반도체) 
 
그 무렵 실리콘밸리를 둘러보던 동방의 작은 나라 기업가가 있었다. 이병철이었다. 18년만의 처음 미국 나들이였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휴렛팩커드 사무실이었다. 직원들이 컴퓨터 하나로 계산, 기획, 보고까지 거의 모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와 반도체에 관해서는 늘 신문기사를 놓치지 않고 많은 자료를 보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정신이 확 들었다. 컴퓨터와 반도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핵심 산업으로 부상하리라 직감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병철은 반도체사업 기획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기획안에는 반도체 중 메모리 분야는 오히려 일본이 미국보다 앞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일본이 미국보다 앞선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한 개 라인을 건설하는 데 무려 1조 원이나 들었다. 그에게 일본은 경제발전 단계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교과서였다. 일본은 이전 해보다 100억 달러 이상의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불과 2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이 이런 성장을 한 것은 반도체 덕분이었다. 
 
1983년 3월 15일자 중앙일보에는 삼성의 새로운 도전을 밝힌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세상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인텔’은 이병철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꼬았다. 이병철은 담담하게 반도체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바로 그해 64KD램 개발을 완료했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 개발이었다. 
12월 12일 삼성은 64KD램을 처음으로 수출했다. 공장도 지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도체는 바로 수익을 볼 수 있는 산업은 아니었다. 이병철은 장기적 안목을 갖고 투자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삼성을 글로벌기업으로 만들었다. 2017년 삼성전자는 반도체분야에서 인텔을 추월하고 세계 최대 반도체회사로 자리매김했다.(출처; 중앙일보, 이병철 이야기, 2013.3.6 등)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7-19 09:08   |  수정일 : 2017-07-1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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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 세종대 교수

서울고와 외대 스페인어과를 나와 1978년 KOTRA 입사하다. 이후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무역관 근무를 거쳐, 경남무역관장, 뉴욕무역관부관장, 파나마무역관장, 멕시코무역관장, 마드리드무역관장, 밀라노무역관장을 역임하고 2010년 정년퇴직했다. 배재대학에서 ‘서비스산업의 역사와 미래’, ‘유대인의 창의성’,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 바 있으며 현재는 세종대학에서 ‘세종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32년간 수출전선 곳곳에서 유대인들과 부딪치며 그들의 장단점을 눈여겨보았다. 우리 민족의 앞날도 제조업 보다는 그들이 주도하는 서비스산업에 있다고 보고 그는 10년 전부터 유대인 경제사에 천착해 아브라함에서부터 현대의 월스트리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경제사> 시리즈 10권을 썼다. 그 축약본 <유대인 이야기>가 2013년 초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예스24 네티즌 투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출간한 <세 종교 이야기>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2년 연속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 같은 해 화폐금융시리즈 곧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동시 출간했다. 최근에는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를 펴냈다. 그는 종이책 이외에도 금융산업 등 각종 서비스산업에 대한 이야기와 <한민족 이야기> 등 103권을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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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수  ( 2017-07-20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0
삼성을 비하할 의도는 없지만 첫번째 64K Dram은 TI꺼 그대로 베낀듯 함. 리프레쉬 주기가 일반적인 것과 달리 4mS 로 길었고 TI 데이터 sheet과 업체이름만 다르고 똑 같았슴. 초기라 이해 할만한 부분도 있지만 자랑하기엔 좀 문제가 있는 부분도 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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