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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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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멍에 벗겨 평등사회 이룩한 이승만 대통령

평등사회 이룩한 이승만 이야기

글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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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레스 미국무장관 (좌) 과 이대통령 / photo by 조선DB
백정의 아들 봉출, 조선 최초의 의사 7인에 들다
 
홍명희가 쓴 『임꺽정』을 읽노라면 이런 대목을 만난다. 임꺽정이 어린 아들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독백(獨白)한다. ‘내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너도 백정으로 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임꺽정은 기존질서 파괴에 나선다. 백정으로 태어난 운명을 극복한다는 것,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공한 사례도 있다.
 
조선 최초의 의사 7인 가운데 박서양(朴瑞陽)이 있다. 그는 신분이 종보다 더 낮은 ‘백정’의 아들로, 아명(兒名)이 봉출이었다. 봉출의 아버지 백정 박가(당시 백정은 이름이 없었다)가 콜레라에 걸렸다. 봉출은 무어 목사에게 매달렸다. 무어 목사는 고종의 전의(典醫)인 에비슨 선교사에게 사정하여 봉출의 아버지를 살려냈다. 박가는 이 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박성춘’(朴成春)이라는 이름을 얻어 많은 활동을 했다. 박가의 아들 봉출은 ‘박서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박서양은 제중원에 들어가 허드레 일을 하던 중 선교사의 도움으로 의학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노력 끝에 그는 조선 최초의 의사 7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백정이라는 운명의 벽을 넘어 의사라는 자유인이 된, 참으로 감동적인 사례다.
 
인류역사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다. 고대사회는 노예제도가 중심이었다. 서양의 경우 6세기 말경 노예제도가 붕괴되었다. 이어 봉건제도가 등장하여 농노제도가 노예제도의 뒤를 이었다. 농노제도는 18세기 시민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존속했고, 러시아에서는 20세기 초 제정러시아가 무너질 까지 존속했다. 아브라함 링컨의 선언으로, 미국에서는 1863년 1월 1일 노예가 해방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1890년 노예무역이 막을 내렸다. 한국에서는 1886년 고종이 ‘노비세습제’(奴婢世襲制)를 폐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잘못된 제도의 붕괴 뒤에는 합리적인 제도의 도입이 있었다.
 
고종 말 개화파 정부, 평등사회 건설을 꿈꾸다
 
고종 치하 조선 말기 개화 과정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1884년 12월 우정국(郵政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집권세력의 중심인물들을 살해하고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개화파 정부는 청나라의 군사 개입으로 3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개화파 정부는 3일간 수많은 개혁 정책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우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함으로써 신분제도를 철폐한다’는 정책이 들어 있었다. 갑신정변의 정책은 이후 갑오경장과 독립협회로 이어졌다.(교과서포럼,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기파랑, 2008), pp.40-41.)
 
이승만, 선교사들에게서 ‘자유와 평등’을 배우다
 
독립협회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아지트였다. 먼저 이승만의 약력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시간을 달리는 남자』(백년동안, 2016.12)에 들어 있는 남정욱의 글 「이십대 열혈 운동권이 풀어 쓴, 한나절이면 이해하는 자유주의 『독립정신』」을 옮긴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집안은 내리 쇠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명석했다. 이승만은 열세 살부터 과거를 친다. 떨어진다. 또 친다. 또 떨어진다. 원래 나라가 망조가 들면 벼슬길부터 혼탁해지기 마련이다. 그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과거제도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방향을 돌린다. 과거 대신 영어를 통해 관직 진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그의 언어 감각은 탁월했다. 그는 입학 6개월이 지나 영어 조교가 되어있었다.
 
배재학당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선교사들이 많았다. 에비슨, 게일, 허버트 같은 선교사들이 그들이다. 이승만이 이들에게 배운 서양 문명의 핵심은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이었다. 영어 배우러 들어갔다가 정치를 배운 셈이다.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국민에게 정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설명에 이승만은 넋을 잃는다. 인습과 결별한다는 결의로 이승만은 상투를 잘랐다. 막상 잘라놓고는 집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당시 그게 얼마나 파격적인 행동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승만, 독립협회 활동하다 5년 7개월간 수감생활 하다
 
졸업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너무 싫었다.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의 주요 인물 17명이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아슬아슬하게 검거를 피한 이승만은 반격에 나섰다. 이승만은 수천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경무청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고종은 황국협회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지만 이승만은 물러서지 않았다. 고종과의 싸움은 치열하게 이어졌다. 이승만을 비롯한 과격파들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 등의 등용을 요구했다. 고종은 역적 중의 역적인 박영효를 등용할 수 없어 독립협회 의관들을 체포했다. 이승만은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다시 시위대를 조직하려 하다가 종로에서 체포되었다. 재판 끝에 그는 종신형과 곤장 100대를 선고받았다. 그는 5년 7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남정욱은 이렇게 썼다. “이승만은 적잖은 글과 저서를 남겼다. 그 가운데 『독립정신』은 이승만이 수감생활 6년차에 그동안 감옥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부한 것을 다듬어 풀어 낸 역작이다. 『독립정신』의 요지는 수백 년 전제정치에 찌들어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조선의 백성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개화시키고 서양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받아들여 내정 개혁을 단행하면서 만국공법을 준행, 중립 외교를 펼쳐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것이다. 개화, 개혁, 독립이 핵심이라는 얘기다.”
 
이승만, 반봉건혁명, 반식민혁명, 반공산·반전체주의 혁명 주도하다
 
김광동은 『시간을 달리는 남자』에 들어 있는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만들어 세우다—이승만의 건국혁명과 역사적 의미」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승만은 연속된 세 개의 혁명을 주도한 세기적 인물이었다. 첫째는 반봉건혁명이고, 둘째는 반식민혁명이고, 셋째는 반공산·반전체주의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대한민국의 건국이고, 대한민국 자유민주체제의 확립과 성공적 정착이다. 봉건조선에서 태어나 일본 식민시대를 겪어야 했던 이승만에게 민주주의는 꿈이었다. 이승만은 봉건주의, 군국주의, 공산주의라는 세 개의 반민주, 반자유적 체제를 넘어서야 했고, 그 때 비로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길이 열릴 수 있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이룩한 것 가운데 하나는, 오래 동안 지속되어온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대한민국을 평등사회로 만든 것이다.
 
제헌 헌법 제8조,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 없애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은 정권을 잡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다. 이승만 이야기를 시리즈로 쓰면서 이승만 정부가 도입한 제헌 헌법을 들춰봤다. ‘헌법 제1호’(1948.7.17.)인 제헌 헌법 제2장 제8조는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일체 인정되지 아니하며 여하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하지 못한다.
훈장과 기타 영전의 수여는 오로지 그 받은 자의 영예에 한한 것이며 여하한 특권도 창설되지 아니한다.”
 
제2장 제8조는 ‘헌법 제6호’(1962.12.26. 개정)에서 제2장 제9조로, ‘헌법 제9호’(1980.10.27. 개정)에서 제10조로, ‘헌법 제10호’(1987.10.29. 개정)에서 제11조로 바뀐 뒤 현재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내용은 그대로이고, 문장만 부드럽게 다듬어졌다.
 
이승만 덕분에 드디어 '반상제도' 사라지고 평등사회 이루어지다
 
제헌 헌법 제8조에서 보듯이, 이승만 정부는 ‘사회적 신분이나 사회적 특수계급 제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바로 이 조항이 당시 지배적 신분제도인 '양반 상놈' 하던 반상제도(班常制度)를 깨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냇가로 멱 감으러 갈 때면 장터 중심에 있는 정육점을 지나치곤 했다. 우리들은 정육점을 지나칠 때마다 점포 안에 걸려 있는 소나 돼지 부위를 구경하곤 했다. 정육점에서는 항상 건장한 남자와 그의 두 아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기를 사러 온 사람들은 누가 됐건, 심지어 시골 촌부마저도 ‘반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그것이 ‘제도’였다. 정육점은 ‘백정’만이 경영했고, 백정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신분이었으므로 ‘반말’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불편함이 없었다. 당시는 6·25 전쟁 전후였다. 그러나 지금은 ‘양반 상놈’ 반상제도란 한국사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카스트제도가 건재한 인도를 보라. 왕조가 살아있는 영국, 스웨덴, 스페인, 일본, 태국, 중동국가 등을 보라. 3대째 세습되고 있는 김일성 왕조를 보라. 이승만은 우리에게 평등사회를 안겨준 산타다! 그러한 이승만을 인정하지 않고, 참배도 거부하는 정치가들이 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2-20 10:30   |  수정일 : 2017-02-2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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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1941년 광주 출생, 광주제일고‧전남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업. 美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 받음.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미국에서 경제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1979)를 읽고 ‘시장경제’에 빠져들었고, ‘시장경제’ 강의를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교수로 인정받고 있다.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적잖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처리즘: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는 마거릿 대처의 삶과 정치를 연구·정리한 중요한 저작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외에도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갖고, 『좋은 정책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 『성경과 함께 떠나는 시장경제 여행』 등 자유시장경제를 널리 알리기 위한 책들을 30여 권 집필했으며, 지금도 어느 작업실에서 다음 책 집필에 혼신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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