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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주의자 박동운 교수의 대한민국 가꾸기

100년 기업 두산을 창업한 보부상 박승직

한국의 창업 CEO 5인③

글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5-02-24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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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그룹 박승직 창업주./조선DB
박용곤 두산그룹 전 회장은 두산그룹이 창립 100주년을 맞은 1996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마침내 우리나라도 1세기에 달하는 기업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에게 있어 지난 1세기는 개화기를 필두로 일제 압박기 및 국토의 아픈 분단과 동족상잔, 그리고 경제개발기 등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이 같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반만년 역사를 통해 유례가 없는 눈부신 산업화를 이룩해 냈으며, 바로 그 역사의 한 증인으로 두산그룹이 성장해 왔다.”
 
두산그룹은 박용곤 전 회장의 할아버지 박승직(朴承稷) 창업자가 1896년 8월 1일에 개점한 ‘박승직 상점’에서 출발한 기업이다. 두산그룹은 창업 CEO 박승직의 기여로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발전했고, ‘한국 최초의 100년 기업’이 되었다. 여기서는 박승직 창업자를 다룬다.1)

보부상(褓負商)으로 돈을 벌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 시절인 2006년 8월 28일에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배땅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배땅 프로젝트’란 일제시대 보부상으로 사업을 일으킨 할아버지 고(故) 박승직 두산 창업주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박영만 회장이 기획한 행사다. ‘배땅’은 서울 종로 4가 배오개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를 줄인 말이다. 박 회장은 젊은 직원들과 함께 2004년 11월 6일에 배오개를 출발하여 매주 토요일마다 20∼30km씩 걸어 2005년 추석 때까지 해남에 도착하기로 목표를 정했었으나 그룹 내분으로 지연되다가 2006년 8월 28일에야 마무리했다.

박승직은 1864년 6월 22일에 경기도 광주 탄벌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문회는 몰락한 양반 후손으로 8남매를 거느린 소작인이었다. 5형제 중 셋째인 박승직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8세부터 한문공부를 했고, 15세에 결혼했다.
 
군수 민영완이 전라도 해남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는 17살 박승직을 개인비서로 쓰려고 데리고 갔다. 박승직은 해남에 도착하자마자 행상의 길을 모색했던 것 같다. 원래 해남, 강진은 제주도 산간지방 생산물의 내륙 집산지였고, 행상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박승직은 해남장터에서 장사를 배웠는데 맏형에게 꾸준히 송금하여 타향살이 3년 동안 300냥을 모았다. 3년 후에 박승직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돈을 관리했던 맏형이 2년 후에 100냥을 박승직에게 돌려줬다.
 
이 돈으로 박승직은 마판상(馬販商)이 되어 광목과 옥양목 등을 말에 싣고 장사하러 다녔다. 그의 장사 길은 제물포에서 면포(綿布)를 사서 경기도 산간지방과 강원도 일대를 다니며 행상을 하는 것이었다. 강원도 산길을 다닐 때 그는 두 달 동안 오직 감자만 먹으며 근검절약했다고 한다. 그는 1888년 25세 무렵에 어느 정도 저축이 되자 30여 석을 추수할 수 있는 전답을 마련했다. 박문회 가족은 형편이 풀리게 되었다.
 
박승직은 서울에서 사업하고 싶어 서울에 정착한 맏형과 상의하여 1889년에 배오개에다 집을 마련했다. 서울에 정착한 후에 박승직은 경기도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의 영암, 나주, 무안, 강진 등지까지 왕래하면서 여러 종류의 포목 행상을 했고, 때로는 위탁판매도 했다. 그는 포목 행상을 하면서 정직과 신용을 생명처럼 지켰다. 
 
1896년 8월 1일에 ‘박승직 상점’을 개설하다
 
서울로 이주한 지 7년이 지나 박승직은 1896년 8월 1일에 종로 4가 15번지에 ‘박승직 상점’을 개설했다. 이는, 10여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오직 행상으로, 근면과 절약으로, 상인정신으로 이루어낸 자신의 꿈의 실현이자 두산그룹 100년 역사의 출발이었다. 그의 나이 33세.
 
박승직이 상점을 개설한 때는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시기다. 상점 개설 2년 전에 단행된 갑오개혁으로 어용(御用)·독점상점이었던 육의전2)(六矣廛)이 폐지되어 일반 상인들은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승직은 상점을 개설했다.

장안의 거상(巨商)이 되다
 
박승직은 뛰어난 상술과 넘치는 정력으로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 그는 서울지역 포목상계의 지도자가 되었고, 장안의 거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덕분에 그는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그는 1884년에 ‘한성상업회의소’를 발기하여 창립총회를 갖고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한성상업회의소는 후에 ‘대한상공회의소’로 발전했다. 그는 1905년 7월에 종로와 동대문 포목상들과 손잡고 동대문시장 경영을 목적으로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인 광장주식회사(廣藏株式會社) 설립에 참여했다. 그는 1907년에 장안의 주요 객주 계통 포목상인 30∼40명과 연합하여 삼정계(三井系)의 광목 독점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공익사(共益社)를 설립했다. 그는 1940년까지 공익사의 사장직을 맡았는데,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업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생활은 굴곡이 심했다. 그는 15세에 결혼했던 부인 김 씨와는 서울로 이주 전에 사별했고, 그 후 노 씨와 결혼하여 딸 넷을 얻었으나 1905년에 상처했다. 그 해에 그는 정 씨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그런데 딸만 있는 집안에서 정 씨와의 사이에 1910년 10월 나이 36세에 첫 아들 두병(斗秉)을 얻었다. 그는 아들 두병을 애지중지했고, 학교는 줄곧 일본 학교만을 다니게 했는데 이는 일본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얘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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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박승직 창업주 생가./조선DB


박가분(朴家粉)이 히트를 치다
 
수입 면포를 주로 취급하던 ‘박승직 상점’에 이색 상품 ‘박가분’이 떴다. 이 제품은 1915년 4월부터 그의 부인 정 씨가 사업을 돕기 위해 면포 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주려고 집에서 손으로 만든 화장품이다. 그런데 화장품을 사용해본 여성들의 반응이 뜻밖에 좋았고, 방물장수를 통해 전국적인 판로가 생겨나면서 박승직 상점의 거래상품으로 어엿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소규모 가내 수공업으로 시작된 ‘박가분’은 당시 국내 화장품 시장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박가분’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불경기에 박승직 상점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다가 일본 상품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1930년대에 사라지고 말았다.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개편하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불경기 여파로 박승직 상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상점을 1925년에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개편하여 사장이 되었다. 그는 1921년에 경성곡물신탁주식회사 감사역에 취임했고, 1925년에 ‘한국 상공업계의 발전에 기여하고 상공인 상호 간의 협동적 이익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중앙번영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1930년에 ‘경성상공협회’로 변경되었는데 박승직은 1931년에 회장에 취임했다. 1919년 고종 장례식 때와 1926년 순종 장례식 때에 박승직은 상인봉도단(商人奉悼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주주가 되다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는 일본인의 소유였는데 일본이 유화정책으로 박승직과 김연수 두 명의 조선인을 주주로 참여시켰다. 1934년부터 첫 시판이 이루어진 소화기린맥주는 1939년에 최고의 판매액을 올리는 등 맥주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박승직은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을 개설해 위탁판매를 시작했는데 맥주도 배급제였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물러갔다. 그러자 소화기린맥주의 한국인 종업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주주였던 박승직에게 지배인이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81세라는 고령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그 책무를 장남인 두병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훗날 동양맥주가 탄생했다.

상점 개설 후 48년 만에 휴업하고 5년 후에 타계하다
 
일본은 1941년 12월에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후에 장기전 체제로 들어갔다. 이에 따라 국내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박승직 상점의 운명도 시대적 상황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출과 순이익이 뚝 떨어졌다. 박승직은 불황에 대비하여 1942년부터 사업을 정리해갔다. 박승직은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1945년 8월 13일에 창고에 쌓인 상품을 공정가격으로 처분한 후에 휴업에 들어갔다. 개점한 지 48년 만의 휴업이었다.
 
박승직은 휴업 중인 박승직 상점을 1946년에 ‘두산상회’로 다시 개업하여 두산의 여명기를 열었다. 박승직이 아들 두병에게 물려준 ‘두산(斗山)’은 ‘한 말(斗) 두 말 쌓아 올려 큰 산을 이루라!’는 뜻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나서 박승직은 1950년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같은 해 12월 20일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승직의 경영이념
 
박승직의 경영이념은 어떤 것인가? 이에 관해 김성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매헌 박승직은 초창기에는 생소한 제조업분야의 경영을 기피했고, 상업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인화, 근검, 정직, 신용 등 4대 경영이념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업정신으로 활용했다. 그의 인화사상은 동양맥주의 사시(社是)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는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업경영에서도 늘 인화를 강조했고, 종업원들에게 인화, 근검, 정직, 신용 4대 기업정신을 주지시켰다. ... 그가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화, 근검, 정직, 신용의 4대 경영이념을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3)   

박승직은 1929년에 “勤者成功”, 곧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휘필(揮筆)을 남겼는데, 이는 후손은 물론 두산그룹 사원들도 좌우명으로 삼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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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두산중공업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수주한 슈웨이하트(Shuweihat) 2단계 해수담수화 플랜트에 설치될 담수증발기 1호기를 창원공장 자체 부두를 통해 출하하고 있다./두산중공업 제공


박두병이 두산그룹을 이끌다
 
박두병은 1945년 해방 직후에 시국을 관망하면서 소일하고 있을 때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지배인이 되었다. 그는 어려운 여건에서 맥주 생산을 재개했다. 그는 1947년에 상호를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상표를 OB(Oriental Brewery)로 바꿨다. 그는 1948년 7월에 동양맥주 사장에 취임하여 ‘두산상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1950년에 6·25동란이 일어나자 그는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두산상회는 1951년에 ‘주식회사 두산상회’로 발족하여 박두병이 사장에 취임했다. 박두병은 1952년에 정부로부터 동양맥주주식회사를 인수받아 두산의 창업기를 열고 두산그룹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소장이었을 때 1973년 8월 4일에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박두병은 박용곤,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다섯 아들을 두었다. 박두병이 타계하자 큰 아들 박용곤이 회장을 맡았고, 그 후 남은 아들들이 차례로 회장을 맡으면서 두산그룹을 이끌어오고 있다. 현재 다섯째 아들 박용만이 회장을 맡고 있다.
 
이 글은 창업 CEO 박승직 이야기가 목적이므로 두산 이야기는 여기서 마친다.   
 
각주 
1) 박승직 이야기는 한국경영사학회가 2002년 5월에 발간한 『경영사학』 제17집 제1호에서 김성수 외 5인의 학자들이 쓴 <特輯: 梅軒 朴承稷·蓮崗 朴斗秉 硏究>를 텍스트로 삼았다.
2) 육의전은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고도 하는데 여섯 종류의 어용(御用)상점으로 국가 독점이었다.
3) 김성수(2002.5), 「梅軒 朴承稷과 蓮崗 朴斗秉의 生涯와 經營理念」 , 한국경영사학회(2002.5), 『경영사학 제17집 제1호』, pp.22∼23.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1941년 광주 출생, 광주제일고‧전남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업. 美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 받음.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미국에서 경제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1979)를 읽고 ‘시장경제’에 빠져들었고, ‘시장경제’ 강의를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교수로 인정받고 있다.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적잖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처리즘: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는 마거릿 대처의 삶과 정치를 연구·정리한 중요한 저작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외에도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갖고, 『좋은 정책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 『성경과 함께 떠나는 시장경제 여행』, 『노동시장 개혁은 슈뢰더처럼, 대처처럼』, 『7인의 위대한 정치가』 등 자유시장경제를 널리 알리기 위한 책들을 30여 권 집필했으며, 지금도 어느 작업실에서 다음 책 집필에 혼신을 쏟고 있다.

등록일 : 2015-02-24 03:54   |  수정일 : 2015-02-2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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