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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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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마저 ‘운동적’ 방식이 범람한다면…

글 |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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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 전경 / photo by 조선DB
 요즘 사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운동적 문화의 사법부 판(版)이라고 필자는 본다. 필자의 이런 시각도 ‘적폐’라고 하겠지만, 이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일부 판사들과 바깥 세력의 부추김은 딱히 범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것을 기어이 범죄로 포장해 보려는 ‘정치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법부 차원에서도 법보다 정치가 더 상위에 있다는 식이다.

 양승태 전 대법관 시절의 법원행정처의 행위는 권한을 다소 남용했다는 정도의 비판은 들을 순 있어도, 그것을 범법행위로 보는 건 무리라는 게 대체적인 평판이다. 그럼에도 일부 성향 판사들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권력은 지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수사하라고 ‘투쟁’을 벌이고 있다. 아니, 어떻게 사법부마저 운동적 사고와 운동적 방식에 휩쓸리게 되었는가? 이게 선진 법치국가의 사법부에서 있을 법한 일인가?

 사상에 따라서는 법이나 사법행위도 정치행위라고 볼지는 모른다. 법과 사법행위는 지배세력의 정치적 도구이기에, 진보정권 하에서는 그 도구를 보수시절 사법부를 몰아세우고 밀쳐내고 처벌하는 데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법적 방법이나 사법적 절차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동적-대중투쟁적 방법과 절차에 따라 써먹을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은 자유일지 모르나, 그런 시각과 행동은 사법부인들 스스로 자체의 권위와 국민적 신뢰를 추락시키는 자해 행위가 될 것이다.

 사법부 구성원들이 특정한 세계관, 역사관, 사회과학, 그리고 특정한 정파, 세력, 경향의 한 하위체계로 편입될 경우 그것은 이미 사법부의 독립성, 객관성, 정치적 초월성을 스스로 내동댕이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도구화된 사법운동가(activist)들일 뿐이다.

 이에 대해 “그럼 너희 보수 사법부는 보수정파의 도구 아니고 무엇이었느냐?”고 반론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더러운 적폐'의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노선'의 도구라는 점에서 도덕적 우위와 정당성을 갖는다고 강변할지 모른다. 필자도 물론, 예컨대 권위주의 당시의 도구화 된 사법부 행태를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른바 ’진보‘ 시대에 들어와서도 사법부가 똑같은 정치적 도구화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법부에서마저 ‘운동적’ 방식이 범람한다면 그거야말로 자유민주 법치국가 대한민국은 무너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판사들과 김명수 대법원장은 특정한 정치의식에 앞서 법의식에 투철하기 바란다. 그 어떤 이상한 민주주의의 법의식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법의식 말이다. 하기야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어버린 민주주의로 가자는 판에, 그 풍조가 사법부라 해서 예외란 보장이 있을까 싶진 않지만 말이다.

 한심한 세태다. 언제 판사들이 이렇게 전혀 다른 종류의 판사들이 되었나? 교사들이 달라져서 그렇게 됐나? 386 또는 586이 70대까지 해먹는다고 칠 때 앞으로도 20년은 그들의 세상이니 그 동안 ‘1948년에 세운 대한민국’이 어다 남아나겠나? 하기야 그건 필자 세대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들 해보셔, 그 끝에 뭐가 있는지 봐야지...아무렴.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06-07 17:23   |  수정일 : 2018-06-0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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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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