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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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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의 붕괴를 보지 못하고 간 최은희, 신상옥

일세를 풍미하였던 여배우 최은희 씨가 별세하였다. 남편 신상옥 감독이 간 지 12년만이다.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그렸던 두 분의 명복을 빈다. 아래는 신상옥 씨가 타계하였을 때 쓴 글이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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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2월 27일 북한으로부터 탈출한 영화감독 신상옥씨와 배우 최은희씨 부부가 납북과정과 탈출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기자들에게 털어놓고 있다. / photo by 조선일보DB
  김정일의 최후를 보지 못한 신상옥 추억(2006년)
  
  “대담한 것이 아니라 저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였죠”
  
   지난 4월11일에 만80세로 별세한 영화감독 申相玉(신상옥) 씨의 殯所(빈소)가 모셔진 서울대학 병원 장례예식장에 다녀왔다. 별실에는 부인 崔銀姬(최은희) 여사와 장례위원장을 맡은 申榮均(신영균) 씨가 있었다. 
 
   崔 여사는 전날 申 감독을 간호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여보, 내일 다시 올게요”라고 말했다. 申 감독은 문으로 향하는 부인에게 곁으로 오라는 눈신호를 보냈다. 申 감독은 누운 채 말 없이 崔 여사의 손을 꼭 잡더라고 한다. 崔 여사가 “이왕 손을 잡으려면 꽉 잡으세요”라고 했더니 손에 힘을 주더란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내가 “申 감독님은 김정일이의 최후를 보고 가셔야 했는데…”라고 했더니 崔 여사도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申 감독과 마지막 통화를 한 것은 지난 연말이었다.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되었던 崔 여사가 회고록에서 납치되어온 한 마카오 여성에 대해서 썼는데 일본의 납치자 구출단체에서 이 여성의 實體(실체)를 확인한 뒤 崔 여사와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 부탁을 전하려고 申 감독과 통화했을 때 목소리는 쇠약했으나 아직도 김정일에 대한 복수의 일념은 생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申 감독과 만나고 지낸 지난 17년간 한국에서 김정일을 가장 미워한 사람은 아마도 그와 黃長燁(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내면과 실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申 감독은 김정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정일에 대한 그의 증오심과 복수심은 뼈에 사무친 것임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었다.
  
   김정일은 申相玉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그를 납치해간 이유에 대해서 미안한 듯이 떠듬떠듬 실토했고 이 대화는 崔 여사에 의해 녹음되었다. 김정일은 申 감독을 유인하기 위한 일종의 미끼로 崔銀姬 씨를 먼저 홍콩에서 납치했던 것이다. 申 감독은 1978년에 납북된 뒤 崔 여사와 만나지 못하고 세뇌교육만 받고 있던 중 두 번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였다. 그는 약 5년간 사회안전부 및 국가보위부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 김정일의 개인적 후원하에 영화를 만들었다. 申 감독은 ‘한참 일할 나이에 근 10년간 거기 가서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점을 아쉬워했고 거기서 느꼈던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을 잊지 못했다. 그는 자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들의 억압이 얼마나 지독한지, 여기 서울에 앉아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이 김정일과 나눈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해서 탈출할 때 가져온 것을 의심했다. 申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녹음은 보다 절실한 문제였다.
   “대담한 것이 아니라 저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였죠.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반공법이란 게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납치되었다는 증거 없이는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거든요. 우린 신체검사도 안 받았어요. 또 들키면 ‘우린 적을 수가 없기 때문에 녹음했다’고 변명하려고 했고 통했을 겁니다.”
  
   崔銀姬 씨가 핸드백에 녹음기를 넣고 녹음했는데 45분짜리 테이프를 썼기 때문에 다 녹음하지 못했다고 한다. 집요한 성격의 申 감독은 곁에 앉은 崔 여사에게 눈짓으로 화장실에 가서 바꿔 끼우라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申 감독은 “녹음을 하면서도 이것이 바깥으로 나가는 유일한 김정일의 육성이란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申 감독과 崔 여사는 1986년에 비엔나를 통해서 탈출한 뒤 미국 CIA의 보호 아래서 생활했다.
   “다행히 미 CIA가 김정일의 목소리를 녹음한 게 있었습니다. 동생 김경희가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있다가 김정일의 전화를 받는 것을 녹음해두었지요. 이것과 대조해서 저희가 가져온 것이 진짜임을 확인한 겁니다. 그게 없었으면 우리는 미국으로도 못갈 뻔했습니다.”
  
   申, 崔 두 사람의 증언과 녹음에 의해서 김정일에 대한 많은 정보가 알려졌다. 月刊朝鮮(월간조선)은 1995년 10월호 부록으로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발행한 적이 있다. 김정일을 연구하려는 북한 전문가들은 이 녹음 테이프를 듣지 않으면 안된다.
  
   申 감독은 탈출하여 별세할 때까지의 20년간 회고록이나 좌담, 기고문 등을 통해서 줄기차게 김정일을 비판했다. 그를 알고 지낸 지난 17년간 필자에게는 申 씨가 영화감독이 아니라 북한정권의 속성과 본성을 꿰뚫어보는 북한 전문가였다. 1989년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가까이서 본 김정일 정권의 성격을 물었다.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마적단이죠. 북한이란 마을을 점령하고 노략질하여 주민들을 굶겨죽이면서도 하나도 양심의 가책이 없이 파티를 즐기는 마적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북한을 알면 알수록 그의 마적단論(론) 이상 가는 관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을 북한産(산) 문서로 연구하기 시작하여 관념 속에 근사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 존재하지도 않는 북한을 상대로 굴욕적인 정책을 펴다가 파탄해가고 있는 이종석類(류)의 자칭 전문가들을 가장 경멸한 것이 黃長燁 씨와 申 감독이었다.
  
   申 감독의 요청에 의해 필자는 1999년 초 黃長燁-申相玉 對談(대담)을 마련한 적이 있었다(1999년 3월호 월간조선). 이 對談의 사회를 필자가 보았는데 이런 말을 했다.
   “申 선생께서는 김정일 측근들이 남한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셨죠? 그 심리가 남한을 동경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자신만만하고 경멸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黃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옮은 말씀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김정일이가 현대감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또 남한 것을 다 알고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이죠. 우리에게도 남한 영화를 새벽까지 보여주곤 했습니다.”
   申 감독이, 북한 사람들은 세뇌되어 있어 통일이 되더라도 몇만 명은 산 속으로 들어가 저항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黃 선생은 즉각 반박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들이 밤낮 義理(의리)에 대해서 강조하지만 그것은 도둑집단의 의리일 뿐이지 원칙에 기초한 의리가 아니거든요. 무너지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무너져요. 대장인 김정일이가 무너지면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아무런 사상적 바탕이 없기 때문이죠.”
  
   申相玉 씨가 김정일보다 더 미워하게 된 것은 金大中(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햇볕정책이란 詐術(사술)로써 무너지는 김정일을 도와주어 북한주민들의 고통을 연장했다는 것이다. 申 감독은 金大中 집권기에도 월간조선을 통해서 비판을 자주 했다. 그때마다 편집장이던 나를 찾아와 이런저런 식으로 글을 쓰고싶다고 의논했다. 미국시민권자인 申 감독은 “이런 글을 써놓으면 입국을 허가해줄까”하고 걱정하는 척하다가 신랄한 글을 써오곤 했다.
  
   특히 2000년 6월 소위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2001년 10월호 월간조선에 기고한 ‘김대중 앞 공개장’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북한정권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 바탕 위에 지은 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평양선언대로 통일한다면 반드시 內戰(내전)이 일어납니다.>
  
   申 감독은 또 나를 설득하여, 국민들이 김정일-김대중 야합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崔 여사와 함께 썼던 회고록을 손질하여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으로 출판하도록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있던 2003년 초에는 ‘金大中 대통령 앞 마지막 편지’라는 글을 갖고 왔다. 3월호에 실렸는데 제목은 ‘노벨賞을 위해 민족을 판 당신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이 편지의 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거짓투성이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일생 단 한번이라도 솔직해져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국민과 세계를 향하여 사죄할 것은 사죄하여 국가의 위신을 회복케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이제 막 출범하는 새 정부로 하여금 당신이 파놓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申相玉 감독이 딱 한번 북한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남한에 있을 때는 로맨티시즘이나 센티멘탈리즘, 이런 거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북한에서도 김정일이가 나에게 정치적 영화를 만들라는 주문을 안해요. 그런 강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영화들이나, 과거 카프(일제시대 사회주의 문학 조직) 계열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고 어느 정도 사회적 開眼(개안)을 했습니다. 그런 걸 두 개 만들었죠. ‘소금’하고 ‘탈출기’라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공부가 너무 값이 비쌌지요.”
  
   예술 이외엔 통 관심도 잡기도 없었다는 申 감독이지만 김정일, 김대중 두 사람 때문에 말년엔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話題(화제)를 영화 쪽으로 돌리려 해도 그는 자꾸 남북문제로 돌아왔다. 영화 속의 주인공 같은 일생을 산 申 감독은 영화인으로서 평가받는 만큼 또 다른 평가를 받을 것이다. 김정일의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오고야 말 그의 파멸을 앞당긴 인물로서 말이다. 김정일의 최후를 보고 가지 못한 그의 冥福(명복)을 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출처 | 조갑제닷컴
등록일 : 2018-04-17 10:16   |  수정일 : 2018-04-1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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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 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月刊朝鮮>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 傳記》(全13권)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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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 2018-04-18 )  답글보이기 찬성 : 2 반대 : 1
김대중이처럼 이승과 저승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구 해봐라, 어떻게 왜 그거이 가능한 거냐?
      답글보이기  김효태  ( 2018-04-21 )  찬성 : 2 반대 : 0
전라도 사람이 존경하는 대중 선생이 뿌린 욕망의 씨앗이 자라고 번성하여 이제 자유 대한민국을 뿌리채 흔들어대고 있네. ㅋㅋㅋ
하동진  ( 2018-04-17 )  답글보이기 찬성 : 8 반대 : 0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daik  ( 2018-04-17 )  답글보이기 찬성 : 12 반대 : 2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효태  ( 2018-04-17 )  답글보이기 찬성 : 15 반대 : 1
자유 대한민국을 친북좌파 정권으로부터 지키기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도데체 무엇일까? 온갖 인기 영합정책에 마비되어 온전한 판단력이 흐려져있는 국민을 보면 눈물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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