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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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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三田渡)의 치욕, 을사조약보다 못한 저자세 대중(對中)외교”

⊙ “소방(小邦)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보낸 국서)
⊙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시어도어 루스벨트)
⊙ 병자호란, 을사조약 당시 조선에는 제대로 된 군대 없고, 동맹도 없었지만, 지금은 60만 최강 국군과 세계 최고의 한미동맹 있어
⊙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수치스러운 국가안보, 외교정책의 재앙”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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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10월 30일 국정감사에서 사드 추가 배치 불가 등의 입장을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0월 30일 국회에서 “사드 추가 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고 미국의 MD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 한·미·일 3국 간의 안보 협력이 3국 간의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했다. 중국 정부와 언론은 이를 ‘3불(不) 약속’이라고 대서특필했다.
 
  다음날 한중 양국은 ‘한중관계 개선 관련 양국 협의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서 중국은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천명했다. 한국은 그간 우리가 공개적으로 밝혀온 관련 입장을 다시 설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의 부당한 ‘사드 보복’은 언급하지 않았다.
 
  한 고위 외교관 출신 인사는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수치스러운 국가안보, 외교정책의 재앙”이라고 했다. 조갑제 전 조갑제닷컴 대표는 “동맹과 국격(國格)과 국익(國益)을 해친 합의를 한 이 정부가 과연 이완용을 욕할 수 있나?”라고 했다. 조선시대 ‘삼전도의 굴욕’이나 이완용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길 당시와 지금이 어떻게 다르기에 이런 비유가 나올까?
 
 
  삼전도의 굴욕
 
  1636년 12월 9일 청군(淸軍)의 선봉인 4000여 철기(鐵騎)가 압록강을 건넜다. 청군은 요충지에 자리한 산성들을 무시하고 한양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다. 조선군의 최정예였던 평안도 방면의 군대는 12년 전 이괄의 난 때 반군 편에 섰다가 소멸된 지 오래였다.
 
  전방에서는 봉화가 잇따랐지만 황해도 황주 정방산성에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이를 무시했다. 김자점은 뒤늦게 청군이 평북 안주를 지났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의 보고는 12월 13일에야 조정에 도착했다. 영의정 김류는 경기도 일대의 군대를 소집하고 강화도로 피란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는 “청군이 깊이 들어올 리가 없다”면서 좀 더 추이를 지켜보자고 했다. 조선은 조기(早期)경보와 정보 분석에서 모두 실패했던 것이다. 다음날 청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인조는 역대 선왕(先王)들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과 왕자들을 강화도로 서둘러 피란시켰다. 9년 전 정묘호란 때에도 인조는 강화도로 몸을 피했었다.
 
  그날 저녁 인조 일행이 숭례문에 이르렀을 때 청군이 이미 양철령, 즉 지금의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강화도로 갈 기회를 놓친 인조는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는 병력도, 군량도 없었다.
 
  이후 인조는 도원수 김자점을 비롯해 각 도(道)의 관찰사, 병마사들에게 병력을 이끌고 도우러 오라고 거듭 촉구했다. 남한산성으로 온 것은 조선군이 아니라 청군이었다. 12월 19일 청군의 좌익 주력군 2만4000여 명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전쟁을 모르는 군대 조선군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청군에 패했다. 사진은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12월 24일은 성절(聖節), 즉 명(明)나라 황제의 생일이었다. 인조와 신하들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북경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조선이 이렇게 지극한 사대(事大)의 예를 올렸지만, 명은 조선을 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청군이 이미 북경 인근까지 진출했고 전국 곳곳에서 이자성 등의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조선군들 또한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출동한 근왕병(勤王兵)들이 경기도까지 진출했지만 청군에 패했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 인근에서 벌어진 쌍령전투였다. 경상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병은 초전에는 선전(善戰)했다. 허완의 부대는 초전에 병사들이 무턱대고 총을 쏘아대다가 실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패했다. 민영의 부대는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 병사들에게 화약을 지급하다가 폭발사고가 일어나 자멸했다.
 
  전라병사 김준룡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병은 1월 5일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군량과 화약이 떨어지자 수원 이남으로 철수했다.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이끄는 평안도 근왕병은 1637년 1월 26일 강원도 김화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홍명구와 유림은 작전에 대한 이견 때문에 각자 진을 쳤다. 홍명구의 부대는 청군에게 패했고 홍명구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유림의 부대는 청군의 추적을 뿌리치고 2월 3일 가평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후였다.
 
  조선군이 참담한 실패를 거듭한 것은 장수도, 병사도 전쟁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장수들은 대국적 차원에서의 전략은커녕 정찰의 필요성도, 어디에 진을 쳐야 하는지도 몰랐다. 군량과 화약 등 병참에도 어두웠다. 병사들은 총을 쏘아야 할 때와 말아야 할 때를 몰랐고 적이 쳐들어오면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청 태종의 조롱
 
청 태종 홍타이지.
  남한산성은 이렇게 고성(孤城)이 돼버렸다. 이러는 사이에 청군은 태종 홍타이지가 이끄는 본진 5만4000명,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우익군 2만2000여 명으로 계속 증강됐다. 성을 포위한 적군이 나날이 늘어가는 데도 조선군들은 날씨가 추워 손이 곱아 활시위조차 당길 수 없었다. ‘방한복’이라고 할 수 있는 가마니조차 병사들에게 충분히 나누어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637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1월 12일 최명길을 통해 보낸 국서에서 조선은 “소방(小邦)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라며 한껏 고개를 숙였다.
 
  홍타이지는 이에 대해 1월 17일 보내온 국서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라. 네가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한 번 겨뤄보자. 하늘이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 조정의 주장은 엇갈렸다. 최명길이 항서(降書)를 쓰자 김상헌이 이를 찢어 버리며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이때의 일이다.
 
 
  항복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치욕의 현장에는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1월 19일 청군이 쏜 홍이포의 포탄이 남한산성에 떨어져 사상자가 발생했다. 1월 22일에는 강화도가 함락됐다. 강화도 방위사령관 격인 검찰사 김경징은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었다.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였다. 강화도에 들어간 후 김경징은 천험(天險)의 요새인 것만을 믿고 방어 준비를 게을리하다가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산성에서는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1월 23일과 26일, 하급 군관과 병사들이 행궁(行宮) 앞으로 몰려와 “척화신(斥和臣)들을 내놓으라”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을 사주(使嗾)한 것은 신경진, 구굉, 홍진도 등 고위 장수들이었다.
 
  1월 26일 강화 교섭차 청군 진영을 찾은 최명길은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의 저항의지는 이로써 끝장났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1월 30일 인조는 청군이 삼전도에 마련한 수항단(受降壇)으로 나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했다.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인조가 돌아온 서울에는 백골이 뒹굴고 있었다. 최명길이 명나라 도독 진홍범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청나라로 끌려간 피로인(被虜人)은 5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6년 후인 1642년의 호구(戶口)수가 약 165만명, 이를 바탕으로 추정한 당시 인구는 1076만명가량이었다.
 
  조선은 대륙의 정세 변화에 눈을 감고 쇠락해 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만을 강조했었다.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西人) 정권은 이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전쟁 준비는 게을리했다. 전쟁을 모르는 문신들이 군대를 지휘했고 병사들은 초보적인 전투지식도 없었다. 반면에 청나라는 여진부족들은 물론 인근 몽골까지 끌어들였고 명나라에서 소외된 학자와 무장(武將), 장인(匠人)들을 폭넓게 포섭했다.
 
  동맹도, 군대다운 군대도 없었던 나라, 스스로 말하기를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던’ 나라는 결국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종말
 
한일합병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의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조약 서문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원하여, 상호간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하기 위해서 이 목적을 달성코자 하여 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함이 가장 좋은 길임을 확신…” 운운하고 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넘겼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때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해 6월에는 경찰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감옥 사무와 사법권은 1909년 7월에 일본에 빼앗겼다.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되고 각 부처 차관으로 일본인들이 임명됐다.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4년 8월에는 재정권이 넘어갔다.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2월에 한일의정서를 맺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할 권한과 군사기지를 설치할 권한을 획득했다. 대한제국은 이때부터 국권(國權)을 차례로 일제에 빼앗긴 것이다.
 
 
  고종의 애소(哀訴), 이토의 협박
 
을사조약 당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왼쪽). 오른쪽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주한일본군사령관.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의 정점(頂點)은 1910년의 한일합병이 아니었다.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국권을 상실했다.
 
  일본 천황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0일 고종 황제를 만난 자리에서 “두 제국 간의 결합을 한층 공고히 하는 것이 극히 긴요하다”면서 “그 방법은 외교를 귀국 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우리 정부 스스로 이를 대신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종은 “일이 중대하니 지금 스스로 이를 재결할 수 없다. 정부 신료에게 자순(諮詢)하고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며 시간이라도 벌어보려 했다. 이토는 “정부 신료에게 자순하심은 당연하지만, 일반 인민의 의향을 살핀다는 운운의 말씀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이토는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萬機) 모두 다 폐하의 친재(親裁)로 결정하는 소위 전제군주국이 아닙니까? 인민의 의향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시라 추측된다”고 압박했다.
 
  이것은 고종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국제(國制)는 제1조부터 9조까지 황제의 권한과 존엄만을 강조했을 뿐, 국민의 정치 참여나 권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토는 “이를 승낙하시거나 혹은 거부하시거나 폐하의 마음이지만, 만약 거부하시면 제국 정부는 결심한 바가 있어 그 결과는 과연 어느 곳에 이를지…”라고 협박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불러 ‘한일협상조약’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11월 17일 덕수궁에서 회담이 열렸다. 궁궐 밖은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었고 궁궐 안에도 일본 헌병들이 들어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참정대신(총리) 한규설은 “그 내용에 있어 어떻게 규정되더라도 굳이 반대하지 않겠지만, 다만 그 형식에서만이라도 조금 여지를 남겨둘 것을 희망한다”고 사정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입장은 완강했다. 결국 그날 밤 조약은 체결됐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만이 반대했다. 조약에 찬성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을사오적’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을사년의 춥고 쓸쓸했던 기억은 국어사전에 단어를 하나 남겼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그것이다.
 
 
  고립무원이었던 대한제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에 고종은 국권을 보존, 회복하기 위한 비밀외교를 벌였다. 1905년 9월 미국 의원들과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방한했을 때에는 ‘공주’로서 극진하게 대접했다. 한규설과 민영환은 한성감옥에서 청년 이승만을 꺼내 미국으로 보냈다. 이승만은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앞두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태프트 육군장관과 가쓰라 타로 일본 총리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후였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사회진화론 신봉자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나는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는 걸 반드시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국무장관 존 헤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보듯 당시 대한제국은 고립무원이었다. 당시 세계 제1의 강국 영국과 태평양의 신흥 강국 미국은 러시아 견제와 만주 및 중국에서의 이권을 위해 일본을 응원하고 있었다. 영국은 ‘영광스런 고립’이라는 고립주의 외교의 전통을 깨고 1902년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을 맺었고, 1905년에는 이를 갱신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한반도에서 손을 뗐다.
 
  군사력도 형편없었다. 최근 한 대학교수는 “1901년 이미 한국군은 일제 외에 아시아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3만 대군의 ‘신식 군대’였다”고 주장했다. 군사(軍史)연구가들에 의하면 1900년 이래 장부상 병력은 중앙군이 7500명, 지방군이 1만8000명이었다. 이들은 독일・프랑스・미국 등에서 수입한 소총과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한제국군의 훈련 모습. 을사조약 당시 장부상 병력은 7731명에 불과했다.
  1904년 2월 9일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아시아 2위의 신식 군대’는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했다. 그나마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강요로 병력을 감축, 1905년 무렵에는 장부상 병력이 7731명으로 줄어들었다. 지방군은 매천 황현이 “군대가 해산됐다고 하자 백성들이 반겼다”고 할 만큼 최소한의 기율도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설사 ‘3만 대군’이었다고 한들 ‘아시아 1위’와는 격차가 너무 컸다. 일본군이 러일전쟁 당시 뤼순전투에서 낸 사상자만 5만9000명에 달했다.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어도, 동맹도, 군대도 없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은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과 다를 바 없었다.
 
 
  2017년 한중 외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0월 30일 국회에서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우리 정부는 사드 추가 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고, 미국의 MD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며 “한·미·일 3국 간의 안보 협력이 3국 간의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중국 외교부와 《인민일보》 등 중국 매체들은 이를 ‘3불(不) 약속’이라 표현하면서 환영했다. 우리 정부는 ‘약속’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 중국 측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중국 외교부는 ‘3불 약속’이라는 표현을 피했지만, 중국 매체들은 여전히 ‘3불 약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날 외교부는 지난 10월 31일 ‘한중관계 개선 관련 양국 협의 결과’를 발표했다. 양국 간 협의에는 한국에서는 남관표 국가안보실 제2차장이, 중국에서는 쿵쉬안유 중국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차관보)가 나섰다.
 
  〈● 한국 측은 중국 측의 사드 문제 관련 입장과 우려를 인식하고,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는 그 본래 배치 목적에 따라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 것으로서 중국의 전략적 안보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중국 측은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를 반대한다고 재천명하였다. 동시에 중국 측은 한국 측이 표명한 입장에 유의하였으며, 한국 측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기를 희망하였다. 양측은 양국 군사당국 간 채널을 통해 중국 측이 우려하는 사드 관련 문제에 대해 소통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 중국 측은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천명하였다. 한국 측은 그간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혀온 관련 입장을 다시 설명하였다.
 
  ● 양측은 한중 관계를 매우 중시하며, 양측 간 공동문서들의 정신에 따라,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발전을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양측은 한중 간 교류협력 강화가 양측의 공동 이익에 부합된다는 데 공감하고 모든 분야의 교류협력을 정상적인 발전 궤도로 조속히 회복시켜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수치’
 
중국의 사드보복 이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 나붙은 중국어 안내판. ‘이해합니다. 그래서 기다립니다(因爲理解所以等待)’라는 글귀에 중국에 숙이고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우선 양국 대표의 격(格)이 맞지 않는다. 우리 측에서는 국가안보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안보실의 차관급 인사가 나섰다. 우리 국가안보실에 상응하는 중국의 기관은 국가안전위원회이다. 중국의 외교부는 대외관계에서 발언권이 약한 부서다. 그런 부서의 부부장(차관)도 아니고 조리(차관보)를 국가안보실 2차장이 상대한 것부터가 중국에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중국은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를 반대한다고 재천명’하고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천명’했다. 자기들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다는 얘기다.
 
  반면에 한국 측은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는 그 본래 배치 목적에 따라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 것으로서 중국의 전략적 안보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 측의 사드 문제 관련 입장과 우려를 인식’하고, ‘그간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혀온 관련 입장을 다시 설명하였다’고 했다. 중국의 무도한 ‘사드 보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한 고위 외교관 출신 인사는 “한국이 성급하게 해결하려고 미래의 안보 주권까지 넘긴 치욕적 합의”라면서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할 때는 동맹도, 대안(代案)도 없었지만 한미동맹도 있고, 중국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미리 항복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수치스러운 국가안보, 외교정책의 재앙”이라고 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이 말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맹과 국격(國格)과 국익(國益)을 해친 합의를 한 이 정부가 과연 이완용을 욕할 수 있나? 이완용 또한 동맹도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역부족으로 나라를 넘긴 것 아닌가? 동맹도 대안도 있는데 국익을 헐값에 넘겼으니 이 정부는 인조보다, 이완용보다 더 타락한 것 아닌가? 삼전도보다 더한 치욕적・사대주의적 외교의 결정판이다.”
 
 
  “스스로 업신여긴 후에 남이 업신여긴다”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고 성안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을사조약 때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덕수궁 안팎을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는 명나라는 쇠락해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을사조약이나 경술국치 때는 대한제국에 믿을 만한 동맹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다.
 
  병자호란이나 을사조약 때는 변변한 군대가 없었지만, 지금은 60만 대군을 갖고 있다. 한국군은 세계 최강인 미군과 한미연합사령부를 통해 하나로 묶여 있다. 미국은 최근에도 한반도 주변 해역에 3개 항공모함 전단을 배치했다. 한국은 미국이 내미는 손만 잡으면 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국회 발언이나 한중 합의를 보면, 대한민국은 국익과 국격을 위해 제대로 말을 한 것 같지 않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12년 전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고 했지만, 지금 우리는 입도 벙긋 못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맹자》에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무릇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후에 남이 업신여기고, 집안도 반드시 스스로 망한 후에 남이 망치고,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후에 남이 공격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12-04 09:22   |  수정일 : 2017-12-0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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