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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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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 7주기(週忌)...황장엽(黃長燁) 선생을 추억하며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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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2월 9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씨의 출판기념회./조선DB
어제는 황장엽(黃長燁) 선생 별세 7주기(週忌)가 되는 날이었다.

“내가 오판을 했습니다.”
   
2010년 6월 서울 강남 한 사무실에서 전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 선생의 '논리학'(이신철 박사와 共著·시대정신)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필자는 사회를 보았다. 黃 선생은 1997년에 한국에 온 이후 2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독창적인 '인간 중심 철학'을 완성해간 과정이었다. 

출판기념회 시작 전에 사무실에서 만난 黃 선생은 예의 단아한 모습이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천안함 폭침(爆沈)사건이 나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는 것을 보고 ‘이번엔 김정일이 誤算(오산)을 했구나’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런데 내가 誤判(오판)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 공포증이 이렇게 강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정부의 한 要人(요인)이 나를 찾아와 이야기하던 끝에 이렇게 말합디다.

‘북한을 너무 몰아붙이면 몰린 쥐처럼 고양이를 물지 않을까요?’

하도 기가 막혀 내가 ‘누가 고양이고, 누가 쥐인가?’라고 물었어요. 우리가 휴전선에서 대북방송을 하겠다고 하면 저들은 ‘우리도 대남방송 하겠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확성기를 향하여 총을 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가 고양이고 누가 쥐입니까?'

그는 출판기념회 答辭(답사)를 통하여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고 걱정하였다. 여진족 30만 명이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을 정복, 淸(청)을 세운 사실을 소개하면서 “천안함 폭침이 북한소행이 아니라는 사람이 스무 명이라도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20~30%가 믿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나라입니까? 이게 무슨 민주국가입니까?”라고 절규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을 떠나서 과연 버틸 수 있습니까? 아무리 거리에 자동차가 우글우글해도 思想戰(사상전)에서 지면 모든 게 끝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뒤돌아보면, 遺言(유언)같은 발언이었다. 
  
“세 사람부터 뭉칩시다.”
  
그해 8월 黃 선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일요일 서울 강남 사무실을 찾았다. 경호 경찰관이 안내 하여 들어갔다.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첫 마디가 충격적이었다.

“우리 세 사람이 이제부터는 목숨을 걸고 싸웁시다.”

그가 말한 세 사람은 자신과 김동길(金東吉) 선생, 그리고 필자였다. 黃 선생은 절박한 말투였다. 북한정세가 급변하고 있는데 남한에선 이러고 있으니 답답하다면서 “먼저 우리 세 사람이 형제적, 동지적, 전사적(戰士的) 관계로 뭉치자”는 것이었다. 뭉쳐서 무얼 하자는 것보다는 뭉치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이날 黃 선생은 이례적으로 점심 식사를 불고기로 했다.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는 분인데 필자를 위하여 시간을 많이 냈다. 그가 공개된 식당에 갈 때는 경호팀이 동행하므로 번잡해진다. 식사를 하면서 黃 선생은 김일성에 대하여 인간적 장점과 함께 치명적(致命的) 평가를 내렸다.

'김일성은 속물(俗物)이었습니다. 스탈린과 모택동(毛澤東)은 악당이었지만 한 구석엔 영웅적 풍모가 있었어요. 가족을 편애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권력을 넘기더니 나중엔 아들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어느 자리에서 김일성이 위민(爲民)해야 한다고 연설을 하는데 이를 듣고 있던 김정일이 저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黃 선생, 위민(爲民)이 다 뭡니까? 인민에겐 무섭게 대해야 돼요.''

黃 선생은 김일성에 대한 인간적 감정과 역사적 평가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2001년 책(‘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에서 그는 이렇게 비판하였다. 

<그는 자기 아들의 권력 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정권을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함께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生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함께 싸우고 함께 죽는다.”
  
그 다음 주 金東吉 선생을 만나 黃 선생의 뜻을 전했다.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열흘 뒤 金 선생 댁에서 세 사람이 모였다. 黃 선생은 “맹세문을 만들자”고 했다. 문장은 필자가 준비하기로 하였다. 며칠 뒤 黃 선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맹세문에 형제적, 동지적, 戰士的 관계로 뭉친다’는 말을 꼭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戰士的’이란 말이 좀 과격한 것 같아 참고하겠다고만 이야기하였다. 지난 9월 초 김동길 선생 댁에서 우리 세 사람이 만났을 때 필자가 내어놓은 초안(草案)은 이러하였다.

<서약(誓約): 한반도의 수구(守舊)반동 세력을 제거하고 자유통일(自由統一)을 이룩하여 일류(一流)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사명이다. 우리 세 사람은 진실-정의(正義)-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동지적(同志的)·형제적 관계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한다.>

黃 선생은 이렇게 고치자고 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것을 다짐한다.” 그 순간 필자는 ‘함께 죽는다’는 맹세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란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이 그 대목을 강조하니 그 방향으로 고쳐오겠다고 하였다.

그해 10월2일 김동길(金東吉) 교수 82회 생신 축하 모임이 있었다. 집 앞에 천막을 쳐놓고 냉면, 빈대떡을 내어놓았다. 황장엽(黃長燁) 선생도 참석하였다. 필자는 “동지적·형제적 관계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것을 다짐한다”는 문장을 담은 서약문 초안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받은 黃 선생의 “곧 만납시다”라는 말이 이승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출처 | 조갑제닷컴
등록일 : 2017-10-11 10:17   |  수정일 : 2017-10-1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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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 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月刊朝鮮>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 傳記》(全13권)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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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생  ( 2017-10-11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0
초안대로 실천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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