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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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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는 항상 폭풍이 불었다 - 쿠바 미사일 위기, 을미사변, 안중근 의거, 10·26 사태…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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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솔리니는 1921년 10월 28일 검은셔츠부대를 로마로 진격시켜 권력을 탈취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배들이 경복궁을 침범, 민비를 시해했다. 매천 황현은 ‘왕후는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정치에 간여한 20년 동안 점차 망국에 이르게 하더니 마침내는 천고에 없던 변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직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
  2년 후인 1897년 10월 12일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국임을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황제가 무한한 군권(君權)을 행사하는 전제군주국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청년 안중근은 하얼빈 역두에서 일본제국 중추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쓰러져 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 박사가 34년간의 망명생활에서 돌아왔다.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목소리만을 접했던 전설의 국부(國父)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열광했다.
 
  1950년 10월 1일 김백일 1군단장은 이종찬 3사단장에게 호령했다. “육군참모총장을 대신하여 명령한다! 38선을 돌파하라! 이제 38선은 없다!” 감격 속에 국군이 38선을 넘은 이날은 ‘국군의 날’이 됐다.
 
1979년 10·26 사태 후 현장 검증에서 김재규가 범행 장면을 재연해 보이고 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돌연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10월 유신이었다. 자유는 유보되었고 경제는 발전했다. 7년 후인 1979년 10월 18일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했다. 8일 후인 그해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북한이 설치한 폭탄이 폭발하기 직전 전두환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던 한국 대표단 일행의 모습.
  1983년 10월 9일에는 버마(미얀마) 아웅산테러 사건이 터졌다. 동남아 순방 중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였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17명의 고위 수행원과 보도진이 사망했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 32명이 죽고 17명이 다쳤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32명이 죽고 17명이 다쳤다. 등굣길의 학생들이 많았다. 국민들의 마음도 함께 내려앉았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교회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해,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다.
  10월에는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를 바꾼 대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노수도원 소속 수도사이자 비텐베르크대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비롯한 교황청의 잘못을 규탄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내걸었다. ‘95개조의 반박문’을 교회 문에 못 박는 망치질 소리는 개인과 자유, 근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05년 10월 21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는 트라팔가 해상에서 프랑스·스페인 함대를 궤멸시켰다. 해전이 시작되기 전 넬슨은 전 함대에 고(告)했다. “영국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길 기대한다!” 적탄에 맞아 쓰러진 넬슨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은 “내 임무를 다할 수 있게 해 준 신께 감사드린다”였다.
 
  1922년 10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이 ‘로마진군’을 감행했다. 쿠데타를 배후 조종한 무솔리니는 여차하면 외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은 국왕과 문민정치인들이 먼저 손을 들었다. ‘치킨게임’에서 승리한 39살의 무뢰배는 파쇼정권을 수립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증시가 대폭락을 했다. ‘대공황’의 시작이었다. 흥청거리던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가 가고 가족들이 서로 의지하며 궁핍을 이겨내야 했던 ‘월튼네 사람들’의 시대가 왔다. 이 대공황의 시대와 뒤이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이겨낸 세대를 미국에서는 ‘위대한 세대’라고 부른다.
 
1962년 10월 쿠바위기 당시 소련 화물선(위)을 가로막는 미국 군함(아래).
케네디는 단호한 결단과 적절한 타협으로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소련 수상과 미국 부통령이 ‘키친논쟁’을 벌이던 냉전의 절정에서 미국은 체면이 구겨졌다. 기고만장해진 소련은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의 U-2정찰기가 이 미사일들을 발견했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쿠바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이후 2주일 동안 전 세계는 핵전쟁의 공포에 떨었다. 공멸의 위기 앞에서 미소 양국은 타협했다. 그 여파로 소련 수상 겸 공산당 제1서기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2년 후인 1964년 10월 14일 공산당 내 무혈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1973년 10월 욤키푸르전쟁으로 촉발된 제1차 석유위기는 한국경제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제1차 오일쇼크 당시 주유소에 나붙은 영업시간 단축 안내문.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은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날은 유대인들의 속죄일(욤키푸르)이었다. 6년 전 화려한 승리(6일 전쟁)를 거두었던 이스라엘은 한때 국가지도부가 ‘무조건 항복’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이스라엘은 가까스로 전세를 역전시켰고, 10월 22일 휴전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와중이던 10월 17일 석유수출국기구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국가들에 대한 석유공급 중단을 선언하고 유가를 확 올렸다. 배럴당 2.9달러이던 유가는 이듬해 1월에는 11.6달러로 4배 가까이 올랐다. 전 세계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문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1911년 10월 10일 중국 허베이(湖北)성 우창(武昌) 주둔 신군(新軍) 일부 병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소수의 혁명분자가 일으킨, 이 설익은 반란은 5000년 동안 이어져 온 중국의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렸다. 이것이 신해혁명이다. 이후 중국은 40년 가까이 내란과 외침에 시달렸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몰아내고 베이징에 입성한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문루에 올라 “신(新)중국이 일어섰다!”고 선포했다. 신중국의 ‘개국영수(開國領袖)’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마지막 10년 동안 중국을 광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사후인 1976년 10월 6일 사인방(四人幇)이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2008년 10월 2일 ‘국민요정’으로 사랑받던 최진실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식에서 누나의 영정을 들었던 동생 최진영씨도 2010년 3월 29일 자살했다.
  역사 속에 큰 글자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기억할 만한 사건들도 있다. 1810년 10월 12일 바이에른의 왕자 루트비히 1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맥주 파티가 뮌헨에서 열렸다. 독일을 상징하는 세계적 맥주 축제 ‘옥토버 페스트’의 시작이었다. 2008년 10월 2일에는 ‘국민요정’으로 사랑받던 여배우 최진실씨가 자살해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2011년 10월 4일에는 PC와 아이패드, 아이폰의 아버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10-02 오전 8:46:00   |  수정일 : 2017-09-2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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