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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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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관련 최규봉 영웅신화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새로 발견된 자료들이 밝힌 실상과 허상

글 | 조화유 재미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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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67주년
 
Victory has many fathers, but defeat is an orphan.이란 서양 격언이 있다. “승리는 아버지가 많고 패배는 고아다”라는 말이니까, 성공한 일에는 공로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고 실패한 일에는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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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작은 섬 팔미도에는 하얀 등대가 있고 그 아래 사진과 같은 기념비 하나가 있다. 거기에는 Douglas MacArthur(다글러스 매카앗서) 장군의 상반신 모습이 좀 어설프게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MacArthur의 비교적 정확한 발음은 “매카앗서”이므로 이 글에서는 맥아더 대신 매카앗서를 쓰기로 한다. 단, 아래 기념비 글은 적힌 그대로 옮긴다).
 
“1950년 9월15일 한국동란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서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 작전을 성공하려면 팔미도 등대를 탈환, 점등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 조직된 특공대는 유진 F. 클라크 미해군대위, F. 클락혼 미육군소령, 존 포스터 미육군중위,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KLO 고우트부대장 등 6명이었다.
 
9월14일 19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다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9월14일 22시 격전 끝에 등대는 점령하였으나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불능 상태, 칠흙 같은 어둠속에서 기진맥진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등대 바닥에서 최규봉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나사못이었다. 그래서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하였고 성조기를 높이 게양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함대 261척에게 인천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렇듯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특공대 중 군인 5명에게는 미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최규봉 부대장에게는 등대에 게양했던 성조기와 맥아더 장군이 친필서명한 사진이 증정되었다. 그 성조기는 최규봉부대장의 기증으로 현재 맥아더장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사진과 감사장은 우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제 6.25동란 5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가 간직한 희귀한 역사와 특공대원의 빛나는 공적과 아울러 이 작전에서 희생된 KLO대원들의 젊은 넋을 기리고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
 
이 기념비는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인 2000년에 새워진 것인데, 기념비에 새겨진 글은 당시 국방부 신문 ‘승리일보’ 주간이었던 시인 구상 씨가 쓴 것이라는데 우선 문인의 글 치고는 문장이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글의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팔미도 등대 불은 최규봉을 비롯한 6명으로 조직된 특공대가 켰다고 했는데, 최씨는
트루디 잭슨 작전(Operation Trudy Jackson) 즉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사전 준비작전의 멤버가 아니었다. 매카앗서 장군의 정보참모였던 차알스 윌로비 소장이 쓴 책
MacArthur 1941-1951’에 의하면, 트루디 잭슨 작전 멤버는 클라크 해군 대위를 비롯해서 한국 해군중령 연정, 한국 육군대령 계인주, 미국 육군소령 노버그, CIA요원 클락혼 그리고 2명의 통신부대 위관급 미육군장교 2명 등 도합 7명으로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규봉은 자기도 트루디 잭슨 팀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 7명 중 4명은 일찍 인천을 떠나고 팔미도 등대 점등에 참가한 트루디 잭슨 팀 멤버는 클라크, 연정, 계인주 셋 뿐이었다. 그러나 클라크는 최규봉씨가 팀 멤버는 아니지만 팔미도에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클라크 회고록에는 최규봉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으나 1957년 최씨가 성조기를 매카앗서 장군에게 선물하는 과정에서 미육군성이 클라크에게 물어서 최씨도 팔미도에 있었던 사실은 확인했다.
 
기념비에는 또 최규봉이 어둠 속에서 나사못을 찾았기 때문에 팔미도 등대 불을 켤 수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최씨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트루디 잭슨 작전 지휘관 클라크 대위가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등대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최씨는 등이 전기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클라크는 등에 새겨진 글을 보고 프랑스제 석유등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 최규봉은 등대에 불이 켜진 후 미국 국기 성조기를 자기가 등대에 게양했다고 했는데, 지휘관 클라크 대위의 회고록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그러나 미육군성 문서에는 팔미도에 성조기가 게양되었으며(누가 기를 게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 기는 나중에 최규봉씨가 가지고 있었다고만 기록 되어있다. 미육군성이 최씨의 말만 듣고 쓴 것인지 클라크의 확인을 받고 그렇게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팔미도에 정말 성조기가 게양되었다면 사진이라도 한 장 남아있을 법 한데 현재까지는 그런 사진은 발견되지 못했다. 어쨌든 최씨는 이 성조기를 전쟁이 끝난 후 매카앗서 장군한테 기념품으로 보낸다.
 
그리고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 참가 군인 5명에겐 Silver Star(은성무공훈장)가 수여되었으나 민간인 최규봉은 등대에 게양되었던 성조기와 매카앗서 장군이 친필로 서명한 사진을 받았다고 기념비에 적혀있지만, 그것도 사실과 좀 다르다. 클라크 대위와 연정 소령이 나중에 은성훈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최규봉이 매카앗서 장군으로부터 친필서명 사진을 받은 것은 인천상륙작전 7년 후인 1957년 얘기며 그가 그것을 받게 된 것은 최씨가 취한 어떤 행동 때문이다.
 
그 어떤 행동은 이러하다. 최규봉은 1957년 8월 서울의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무관(웰즈육군대령)을 만난다. 그리고 매카앗서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본인이 직접 쓴 건지 번역사가 쓴건지 분명치 않지만 영어가 좀 서툴다)와 자기가 7년 전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도 등대에 꽂았다는 성조기를 고급스런 자개무늬 상자에 넣어서 웰즈 대령에게 맡기면서 그 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맞아 인천에 매카앗서 장군 동상 제막식을 거행할 때 장군에게 좀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장군의 방한 계획이 없음을 알게 된 무관은 최씨의 편지와 성조기를 뉴우욕에 거주 중인 매카앗서 장군한테 보내기로 결정한다.
 
성조기와 최씨의 편지를 받은 매카앗서 장군 측근은 파티를 열어 그 선물을 장군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77세의 퇴역 장군 매카앗서는 뉴우욕의 한 호텔에 기거하며 적적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를 위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여튼 측근들은 그해 11월6일 파티를 연다. 파티에는 약 30명의 현역 또는 퇴역 장성들과 민간인 몇 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최규봉은 파티에 초청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장군의 친필서명 사진과 감사편지를 서울의 미국 대사관 무관 웰즈 대령에게 보내고 최규봉에게 전해주라고만 했다.(1957 미육군성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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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국회의장이 최규봉씨(오른쪽)와 악수를 하고 있다. 이 때만해도 최씨는 출세길로 들어섰다는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그 선물을 받은 최씨는 당시 한국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들을 양자로 바친 국회의장 이기붕 측근과 접촉, 매카앗서 장군의 편지와 사진을 이 의장을 통해 전달받는 형식을 취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증정식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국회의장실에서 열렸다. 그런데 최씨의 행운은 거기서 일단 정지한다.
 
이 전달식에서 최씨를 본 이기붕 의장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라고 말한다. 그러자 거기 참석한 한 사람이 최규봉을 이범석 장군의 측근이라고 소개한다. 이범석은 당시 이기붕이 싫어하는 정적의 한 사람이었다. 이기붕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다. 고위공직 자리 하나 줄 것이라는 귀띔까지 받았던 최씨에게는 날벼락이었다. (“국경 없는 기자단” 서울 특파원 김비태가 Bridge(가교) 잡지 1997년 3월호에 쓴 기사 참조) 이 행사는 주요 한국 신문이나 방송이 보도하지는 않은 것 같고 영자신문 The Korean Republic과 The Korea Times만 보도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년 동안 최씨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듯하다. 그는 1962년 8월5일자로 매카앗서 장군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때는 장군이 별세하기 2년 전이라 그 편지가 전달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매카앗서 기념관에는 최씨의 편지만 보관되어 있다. 최씨는 자기가 팔미도 등대에 꽂았다는 성조기를 10만불(요즘 가치로는 100만불쯤 될듯)에 사겠다고 한 미국 신문사도 있었으나 거절하고 그 기를 장군에게 보냈다고 했다.
어쨌든 최규봉씨는 성조기를 매카앗서 장군에게 보내고 그 답례로 받은 장군의 친필서명 사진과 편지 덕분에 한국에서 영웅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신문, 방송들에 많이 그를 소개했다. 그 사진과 감사편지를 최씨가 받게 된 경위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매카앗서 장군이 인정한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 생각할 것이다. 서울의 전쟁기념관에도 그 사진과 편지가 전시되었다.(지금은 전시가 되지 않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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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16년 10월15일 자동차로 5시간 걸리는 미국 버지니아 주 노옵호오크 시에 가서 MacArthur Memorial을 방문했다. 그곳의 curator(관리인) Corey Thornton 씨는 내가 미리 부탁한대로 최규봉씨와 관련 서류 뭉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성조기도 보여주었는데 그 기는 지금은 전시장에 있지 않고 창고에 들어있다고 했다. 그와 함께 성조기를 자세히 보았지만 최씨가 말한 작전명령 번호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기의 가로 세로 길이와 기념관 자료번호(F6 139)만 적혀있는 평범한 성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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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archivist(고문서 전문가) James Zobel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최규봉 씨가 2002년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인터뷰를 요청하자 응했는데 녹음기를 켜니까 갑자기 인터뷰를 중단했다고 말해주었다. 왜 그가 인터뷰를 중단했는지 알 길이 없다.
 
최씨가 KLO (Korea Liaison Office) 대원으로 한국전쟁에서 대공 첩보활동을 통해 유엔군을 도운 전공은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천상륙작전 당일 매카앗서 장군을 기함에서 만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또 팔미도 등대와 성조기에 관한 그의 말이 과장되었거나 일부는 허위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역사는 가능한 한 정직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필자는 최규봉씨를 만난 적이 없을뿐 아니라 그에게 아무런 개인감정도 없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는 걸 망서리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가 가능하면 정확하게 기록되어 후세에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클라크도 최규봉도 매카앗서 장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조선일보, 월간조선 등의 한국 신문, 방송 등을 통해 최규봉씨가 수십년 동안 계속 주장해온 것과 인천상륙작전 직전 2주 동안 인천 앞바다 섬들에서 정보수집 작전을 전개한 미해군대위 유진 클라크의 수기 내용을 비교해보기로 한다.
 
<1> 최규봉은 1950년 8월18일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 섬에서 클라크 대위를 처음 만났으며 그때 클라크로부터 Operation Chromite(인천상륙작전의 공식명칭)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라크는 8월18일에 일본 토오쿄에 있었으며 8월26일에야 유엔군사령부 소속 육군소장 홈즈 대거와 해군대령 에드워드 피어슨으로부터 Operation Trudy Jackson(트루디 잭슨 작전 즉 인천상륙사전준비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 최씨는 9월9일 매카앗서 사령부로부터 팔미도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섬에 있던 북한군과 여러 차례 총격전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클라크 대위는 한국 해군중령 연정과 두 차례 팔미도에 들어가 보았으나 그 섬에 적군은 없었으며 등대의 석유등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고 그의 수기에 썼다.
 
<3> 최씨는 9뤌15일 오전 0시 40분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라는 명령을 자신이 직접 매카앗서 사령부로부터 무전으로 받았으나 작은 나사 하나를 3시간 동안 찾느라 100분이나 늦은 오전 2시 20분에야 점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라크 대위는 사령부로부터 오전 0시30에 점등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 섬에 미리 가 있던 한국인 협조자들이 클라크와 연정을 적으로 오인하고 발포를 하는 바람에 20분 늦은 오전 0시 50분에야 등대불을 켰다고 기록했다. 하필 그때 클라크가 2주 동안 작전본부로 쓰고 있던 영흥도를 향해 북한군이 처들어오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흥도에서 머지 않은 팔미도에서 그런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이 있었던 것 같다.
 
<4> 최규봉은 자신이 팔미도 등대불을 켠 후 자기와 클라크, 연정, 계인주, 클락혼이 작은배를 타고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있는 함정 Mount McKinley호로 가서 매카앗서 장군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을 만났으며 그의 소개로 매카앗서 장군도 만났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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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이 그날 찍은 사진이라고 최씨는 주장했다.
 그러나. 후에 한국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함명수 제독은 위 사진이 인천상륙작전 개시일인 9월15일 찍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진에 보이는 두 미육군장교는 9월초에 이미 인천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 제독과 그의 선배 이성호 제독은 ROKPC 703호 함정으로 클라크 팀을 지원했다. 이 제독도 후에 해군참모총장이 된다.)
위 사진에서 미육군 군복을 입고있는 한국인은 얼굴 한쪽만 보여서 그게 최규봉(당시 28세)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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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의 2주동안 클라크 팀을 도와준 한국인 지원자들과 찍은 사진이다. 최규봉은 이 유명한 사진에 자기가 들어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른쪽으로부터 클라크 대위, 한 사람 건너 계인주 대령과 연정 중령이다. 최씨가 클라크와 같이 찍은 게 확실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클라크 대위는 수기에서 오직 자기와 연정 중령 그리고 계인주 대령만이 상륙작전 시작 직후 작은 통봉배를 타고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있는 함정을 찾아가 그 배에 탔다고 수기에 적었다. 이 부분에 대해 그가 쓴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클라크는 망원경으로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 있을 기함(旗艦) 마운트 매킨리 호(號)를 찾아냈다. 그리고 통통배를 타고 연정, 계인주와 함께 기함 쪽으로 접근해갔다. 기함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그의 해군 장교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거대한 매킨리호 함상에서 누군가가 메가폰을 입에 대고 "접근하지 말고 정지하라!"고 소리쳤다. 매킨리호에서는 클라크 등이 타고있는 디젤엔진 통통선을 적의 자살특공 선박으로 의심한 것 같았다.
 
클라크는 통통선 선장(李씨로만 밝혀짐)에게 엔진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기함으로부터 소형 상륙정 한 척이 접근해 왔다. 거기에 탄 해군소위가 기관단총을 클라크 대위에게 겨누었다. "누구냐?" 소위가 물었다. "나는 미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다. 사람 다치기 전에 총을 치워라!" 클라크가 대꾸했다. 소위는 기함으로 돌아가 함장에게 미해군 대위라는 자가 이상하게 생긴 작은 발동선에 타고 있다고 보고했다. 함장이 "그 자가 우리 해군 장교라는 걸 어떻게 믿을수 있나?"고 묻자 소위는 "우리 해군 장교모자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클라크가 먼저 기함에 승선, 신분이 확인되자 통통배에 남아있던 두 한국군 장교 연정과 계인주도 매킨리호에 올라갈수 있었다.
 
매카앗서 장군은 팔미도 등대 불켜는 것 몰랐다
 
클라크 수기에는 자기 혼자 또는 연정과 계인주를 데리고 함상에서 매카앗서 장군을 만다는 말이 없다. 만일 만났다면, 수기에서 반드시 언급했을 것이다. 일개 해군 대위가 전설적인 5성 장군 매카앗서를 만났다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그런데도 수기에 전혀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가 장군을 직접 대면한 일이 없다는게 나의 판단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의 판단을 뒷받침해 준다. 사실은 매카앗서 장군도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고, 오직 클라크 대위의 직속 상관들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65년에 출판된 매카앗서 장군 회고록 "Reminiscences"(회고)를 보면,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비밀이 적에게 누설되지 않았음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썼을 뿐, 팔미도 등대 얘기는 한마디도 없다.
"저 멀리 바다 위에서 불이 하나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인천항구로 들어가는 길목인) 비어수로에 항해등이 켜져 있었다. 적은 우리에게 완전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적은 항해등도 끄지 않았다."
 
또 상륙 당일 장군을 바로 옆에서 취재한 미국 종군기자 칼 마이던도 TIME지(1950년 9월25일자)에 이렇게 썼다. "인천 항구쪽에서 깜박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도일 해군 제독이 매카앗서 장군에게 "적이 (고맙게도) 항해등까지 켜놓았군요"라고 말하자 장군은 "(그 놈들) 예의 한번 바르군"이라고 말했다." 장군이 타고 있던 군함에서 팔미도 등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등대불이 항해등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권위있는 한국전쟁사로 유명한 In Mortal Combat (John Toland 씀) 187쪽에도 매카앗서 장군은 팔미도 등대 점등 보고를 받은 바가 없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매카앗서 비평서인 MacArthur: The Naked Emperor (벌거벗은 황제 매카앗서)에도 매카앗서는 details(지엽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는 지휘관이라고 말하고, 팔미도 점등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최규봉은 그 바쁜 상륙작전 첫날 그것도 오전 10시경에 자기가 다른 5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매카앗서 장군을 함상에서 만났고, 소원이 뭐냐고 해서 팔미도에 게양된 미국국기를 선물로 달라고 했더니 장군이 허락하더라고 주장했다.
 
최씨가 매카앗서 장군을 면전에서 만난 일이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가 장군의 키가 175cm에 불과했다고 월간조선 기자에게 말한 것이다,(2003년 9월호 월간조선) 그러나 장군의 키는 6 feet 즉 182cm여서 아이젠하워 대통령보다도 5cm가 더 컸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대하여
 
2016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면 클라크 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임병래와 홍시욱을 포함한 한국인 17명이 모든 첩보활동과 전투를 도맡아 했으며, 팔미도 등대 점등도 한국인들만 9월 14일 밤 팔미도에 들어가서 인민군과 싸워 이기고 등에 불을 킨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니까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리면 클라크 대위 같은 진짜 영웅들을 잊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준비작전의 최고지휘자는 유엔군 최고사령부가 직접 보낸 클라크 대위였다. 그는 그의 한국인 전우 연정이나 계인주와는 달리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선전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인천에서 2주 동안 적어둔 일기를 50년 동안 벽장에 넣어두고 출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고한 후 가족이 그 수기를 기억하고 그가 별세한지 2년 후 겨우 햇볕을 보게된 것이다. 이런 겸손한 영웅의 솔직한 일기가 책으로 발간된 것이 바로 The Secrets of Inch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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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Arthur Memorial 본관 정문에서 필자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9-15 13:09   |  수정일 : 2017-09-1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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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유 재미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조화유 (曺和裕 / W.Y. JOH)

경남 거창 출생. 부산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Western Michigan University 대학원에서 韓美관계사를 연구한 뒤 미국에 정착했다.

도미 전 응시한 TOEFL에서 어휘 및 작문 부문 세계 최고점수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엔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흉일”이 당선, 문단에 데뷔했다. 1998년 문학작품집 “이것이 정말 내가 쓰고 싶었던 글들이다”를 냈고, 2010년엔 두 번째 작품집 “전쟁과 사랑”을 출간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 “다대포에서 생긴 일”은 한국비평문학회가 “2003년의 문제소설”로 선정하였고, 이 소설을 직접 영어로 다시 쓴 Heaven Knows What Happened at Dadaepo는 amazon.com에서 eBook으로도 나왔다.

미주동포들을 위해 쓴 “미국생활영어” 전10권은 1990년대 조선일보사가 “이것이 미국영어다” 전10권으로 재출간, 국내에서만 100만부 이상 보급되었고, 중국, 대만, 일본에서도 각각 그 나라 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1996~7년에는 “레미제라블” “파리의 노틀담”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어스 씨이저” “왕자와 거지” 등 세계명작을 한영대역 만화로 재구성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 워싱턴 교외에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메일 johbook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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