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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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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추진력, 특유의 추진력으로 정치·경제·사회 개혁 이뤄

⊙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며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추진
⊙ 과거 적폐 청산 앞장서 …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청산 등 일사천리
⊙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사람이 걸어야 할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음) … 휘호로 즐겨 써
⊙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땐 대담한 승부수 던지는 승부사
⊙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으로 민주화 공헌 …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리더십과 스타십 겸비 … 사람 관리에 능한 인간중심적 리더십
⊙ 인재 발굴 능력도 발군 … 노무현 이회창 이명박을 정치권으로 불러내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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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14대)이 서거한 2015년 11월 22일은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그의 공과(功過)를 다시 생각해 보는 날이 됐다. 임기 말 외환위기,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를 맞으며 공이 상당 부분 퇴색했지만 군사정권을 종식한 32년 만의 문민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군부에 이르기까지 개혁과 민주화를 이뤄 냈고 선진국 위주의 국제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세계화에 한발짝 더 다가가는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김 전 대통령 서거 4일 후인 11월 26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는 〈김영삼의 공과 과, 금융실명제와 IMF 경제위기〉라는 제목으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재임시절 잘한 일’을 묻는 질문에 열거된 답은 1위가 ‘금융실명제 실시’(34.2%), 2위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21.3%), 3위가 ‘하나회 숙청과 정치군부 해체’(18.9%)였다. 또 ‘친일잔재 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11.2%), ‘세계화와 OECD 가입’(3.4%)이라는 답이 뒤를 이었다.
 
  2017년 2월 《김영삼 평전》을 펴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김영삼은 문민정부를 이끌며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척결, 역사바로세우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 등 파격적인 정치혁신을 추진했고, 격동의 현대사에서 대도무문을 걸어왔던 정치지도자”라고 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을 되돌아보면 하나같이 그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결단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징으로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등은 결단력이 부족하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고, 현재 적폐를 청산하려면 YS 같은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진보부터 보수까지 다양한 인재를 포용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갈등관계에 있는 세력까지 등용하는 통합정신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취임과 함께 개혁조치 발동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개혁을 표명했다. 그는 자신을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독재가 시작된 이래 32년 만에 탄생한 문민 대통령이며 내가 이끄는 정부는 32년 만의 문민정부”라고 규정하고, 사회 각 분야에 깊숙이 뿌리 박힌 군사문화 청산을 목표로 일련의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날 통행금지 구역이었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시민에게 개방하는 것으로 개혁조치를 시작했다. 군사독재 시절 권위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다. 3월 초에는 공안사범과 일반사범 4만여 명에 대해 특별사면과 감형, 복권을 단행하며 “문민시대의 출범과 함께 지난 30여 년간 쌓인 그늘을 말끔히 거두어 대화합 속에서 새로 출발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4월 9일에는 4·19혁명 33주년을 맞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수유리 4·19묘역을 참배하고 헌화하며 “4·19혁명은 3·1운동 다음가는 역사적인 의거로 재평가, 복원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사회 전반의 개혁조치는 공직자 재산공개와 사정, 부정부패와 각종 사회비리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공기업의 민영화와 통폐합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난 정치인·공직자·전현직 군수뇌 및 고위장성들이 잇달아 물러나거나 구속됐다.
 
  김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불리기도 하는 금융실명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도 그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노태우 정권에서는 여러 번 실시를 검토했을 뿐 경제위기와 준비 미비 등의 이유로 계속 유보돼 왔던 과제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후 6개월 만인 19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당시에는 긴급명령이라는 전격적인 방법 때문에 우려를 사기도 했고 며칠간 국내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국내경제는 금세 정상화됐고, 금융실명제는 지하경제를 위축시키고 정경유착 등 각종 불법 정치자금 조성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금융실명제는 이후 이어지는 각 분야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으로 불렸다.
 
 
  역대 최고 지지율 기록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당시 유세장은 인산인해였다.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 부정부패 척결 등 개혁 조치는 일부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국민 대다수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취임 초기(1993년 2~3분기)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83%에 달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지지율이다. 금융실명제 실시 시점인 1993년 8월에는 비공식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이 무려 90%에 달하기도 했다.
 
  각계 개혁이 한창이던 1994년 초 신년하례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개가 아무리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말을 남겼다. 기득권층의 반발 등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개혁은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높은 지지율은 개혁정책 외에 김 전 대통령의 탈권위주의적 행보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본인을 개그나 풍자의 소재로 삼는 것을 허용했고,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YS시리즈’가 유행했으며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유머집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 청와대 방문객 공식 오찬 식단을 칼국수로 정하는 소탈한 면모를 보여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과거사 바로잡기 앞장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 역사바로세우기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요 업적이다.
  개혁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에 나섰다. 군부독재 청산에 나서는 한편 4·19, 5·18, 12·12 등 현대사 각종 사건에 대해 재평가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첫 번째로 실행한 것은 육사 내부 파벌로 군부독재의 중심으로 불렸던 ‘하나회’ 숙청 작업이다. 하나회는 김영삼 정부 초기에도 군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등 군부독재 적폐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취임 직후인 1993년 초 육사 출신들이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분열돼 물리적 충돌을 빚는 사건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하나회 명단이 공개됐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당시 내걸었던 슬로건인 ‘군정 종식’의 일환으로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행했다. 일주일 사이 40개의 별이 떨어졌을 정도로 하나회는 힘을 잃었다.
 
  이후 12·12에 대한 재평가도 시작됐다. 검찰은 1995년 11~12월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각각 거액 수뢰 혐의와 반란주도 혐의로 구속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12·12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한 국민의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지면서 김영삼 정부는 1995년 말 5·18특별법을 제정하고 5·18 및 군부 과잉진압에 대해 재평가했으며, 1980년 당시 신군부 핵심인사들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를 적용해 구속기소했다.
 
  이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은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건물을 완전히 철거해 일제 잔재를 청산했다. 이를 두고는 과잉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비판도 있다. 이처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친일청산·군사쿠데타 성격규정·광주민주화운동 성격규정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타고난 정치인이자 승부사
 
1993년 8월 12일 오후,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긴급 재정명령’을 발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타고난 승부사’다. 정치인의 최우선 덕목인 결단력과 추진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특히 상황을 읽고 판단하는 능력과 위기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반전시키는 순발력과 돌파력이 돋보인다고 주변 사람들은 평가한다. 흔히 김 전 대통령의 과(過)로 불리는 3당(민정당·민주당·공화당) 합당 역시 김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 승부수였다. 정치에 관한 한 ‘동물적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가 과장이 아닐 정도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김호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영삼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김 대통령은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때는 항상 대담한 승부수로 일관해 왔다. 모든 문제를 정공으로 대응해서 목적을 관철해 온 것이 그의 리더십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승부사가 기습전략을 선호하듯 그도 전격적인 조치로 리더십의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노력한다. 승부사가 관중의 박수갈채를 의식하듯 승부사형 지도자는 대중여론을 의식해 행동한다. 과거 40대 기수론, 단식투쟁, 민추협 결성, 3당 합당, 금융실명제 기습실시 등이 그 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공격성과 개혁성은 있었지만 여론을 업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통치이념과 개혁정책을 접목해 성공할 수 있었다.” 승부사적 성향이 개혁을 위해 바람직한 면도 많지만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사람관리, 건강관리도 철저
 
  정치인의 주요 덕목 중 하나가 리더십인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사람관리를 매우 중시하는 리더십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부친 김홍조 옹이 멸치어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주변인들에게 명절선물로 멸치박스를 보냈는데 여야나 정치적 대립과 관계없이 멸치선물을 보냈다. 웬만한 정치권 인사들은 ‘YS멸치’를 안 받아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를 따르는 정치 지망생들이 늘 주변을 에워쌌다.
 
  김 전 대통령은 리더십과 스타십을 겸비한 보기 드문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특히 인재를 보는 통찰력과 안목이 뛰어나 이후 정치권을 좌지우지하는 인재들을 대거 발굴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수 또는 대통령일 때 발굴해 낸 인물이 노무현 전 대통령, 이회창 전 신한국당 총재,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총선에서 영입해 정계에 입문했고, 이회창 전 총리를 1996년 총선 당시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바로 여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는데, 당시 민자당 총재이며 공천권자였던 사람 역시 김 전 대통령이다. 이 밖에 손학규, 이재오, 김문수, 정의화, 김기춘 등을 정치권으로 영입한 인물이며 김무성, 서청원 등 민주계의 정치적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개인적인 정(情)을 중시하다 보니 임기 후반부에 아들(김현철) 등 측근 관리에 실패했다는 평도 있지만, 인재를 보는 안목만은 탁월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은 운동 등 자기관리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1980년대 민주화투쟁 당시엔 민주화 동지들과 함께 등산을 하는 민주산악회를 조직해 뜻을 모으면서 건강도 유지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평생 식사관리와 조깅, 등산 등으로 건강을 관리해 단식투쟁을 해도 사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정치깡패와 대치하는 등 물리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대처하곤 했다. 재임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함께 새벽 조깅을 하기도 했는데, 빌 클린턴 대통령보다 20여 세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속도와 페이스로 조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때
 
  현재 혼란한 정국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단력과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인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시민사회를 정치 무대에 제대로 정립시켰다”며 “정치적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방향으로 정치적 결단을 내린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군부의 권력 개입을 차단하고 정치자금법을 통과시키는 등의 성과를 이뤄 냈다”고 강조했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가 변화를 끌어내고 변화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야당 지도자들은 김 전 대통령의 결단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이미 중국 및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했고, 측근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6-16 17:32   |  수정일 : 2017-06-1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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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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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광  ( 2017-06-19 )  답글보이기 찬성 : 6 반대 : 1
김영삼과 김대중의 차이.... 두분 모두 정치하느라 바삐 사시기도 했지만 이쁜여자를 보면 물리칠수 없으셨지요. 그리하야 두분 모두 혼외자식을 두셨는데..... 김영삼씨는 나중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혼외자를 호적에 올려주어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해 주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에다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 김대중씨는 생물학적으로 혼외자가 친자임이 확인 되었는데도 끝끝내 부인하고 외면해 버렸습니다. 자신도 진짜 성이 윤씨인지, 제갈씨인지 분명치 않은 불우한 탄생을 했으면서도....김영삼씨가 순수한 소년 같았다면 김대중씨는 그 누구도 속을 알수 없는 닳고 닳은 고등 사기꾼...
HONGMOOCHANG  ( 2017-06-19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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