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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주의자 박동운 교수의 대한민국 가꾸기

조국 교수가 ‘구역질나는 책’이라고 폄하한 이영훈 교수를 이야기한다

‘일본군 위안부’ 이슈를 놓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종족주의’(주: ‘종족주의’의 뜻은 뒤에서 밝힘)에 사로잡힌 문재인 대통령의 주장만 따를 것이 아니라 실증을 바탕으로 한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칼럼을 쓴다.

글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8-09 11:44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현재 서울대 법대 교수로 복직하여 법무부장관으로 내정된 상태. 이하 ‘조국 교수’라 칭함)이,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이하 ‘이영훈 교수’라 칭함) 등이 최근에 펴낸 『반일 종족주의』를 ‘구역질나는 책’이라고 폄하하여 대한민국이 꽤나 시끄럽다. 

조국 교수는 그동안 몇 가지 기언(奇言)을 남겼다. 두 가지만 든다. 조 교수는 정계를 넘나드는 교수를 ‘폴리페서’라고 맹비난해 놓고도 자신은 ‘앙가주망’이라고 미화했다. 그런데 ‘앙가주망’에는 반드시 ‘저항정신’이 내포되어야 하는데 조 교수는 청와대 권력의자에 앉아 그런 말을 했으니 ‘상식’에도 못 미치는 말을 한 셈이다. 조 교수는 ‘죽창가’를 부르는 사람은 ‘반일(反日)’이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친일(親日)’이라는 식(?)의 이분법을 적용하여 대한민국을 둘로 갈라놓았다.
 
이 칼럼에서는 조국 교수가 그토록 폄하한 이영훈 교수가 한 때 운동권 출신 학자였다가 자유주의 학자로 변신하여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경제학자와 역사학자로서 이룩한 학문적 성과, 대한민국을 좌파의 지배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현재 전력투구하고 있는 ‘앙가주망’ 정신, 그리고 『반일 종족주의』에 나타난 위안부 진상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출판물을 통해 객관화된 ‘사실(fact)’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끝에 참고저서를 첨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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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운동권 출신 학자에서 자유주의 학자로 전환하다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정부는 한국경제가 ‘모라토리움(대외 지불 불능)’ 위기를 맞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를 이영훈 교수는 일본행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들었다. 방송을 들으며 그가 느꼈던 감회다. “담화를 접하는 순간 ‘우리나라가 다시 식민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울컥했다. …. 그 경제위기를 계기로 나는 자유주의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영훈 교수는 자신을 ‘운동권 학자’라고 표현했다. 
“1970년 대학에 입학한 나에게, 어느 운동권 선배는 고맙게도 읽어야 할 50권의 리스트를 전수했다. 이 정도는 읽어야 한몫의 지식인이 될 수 있다는 당부가 곁들여졌다. 그 책들을 읽고서 나는 세상의 진리에 통달했다는 느낌을 가졌다. …. 그런 가운데 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이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 1978년 대학원에 입학해 1985년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나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대개 그런 수준에 머물렀다. …. 7년간의 대학원 생활 동안 나를 지도한 안병직 교수는 당시 한국에서 대표적인 마오쩌둥(毛澤東)주의자였다. …. 안병직 교수는 1960년대 이후 대학에서 자생한 사회주의 그룹으로서 주로 일본의 마르크시스트를 통해 마오쩌둥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수용했다.”
 
이 교수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바탕을 두고 18∼19세기 농민의 존재 형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18∼19세기 이래 농민층이 부농과 빈농의 두 계층으로 분열되었다”는 김용섭 교수의 주장은 ‘실증적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계기로 이 교수는 ‘자립적 소농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면서 ‘실증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실증주의로 마르크스주의를 넘게 되었다’고 썼다. 그 후 ‘실증주의’는 이영훈 교수의 학문 연구에서 주춧돌이 되어 왔다. 또 이 교수는 “1993년 무렵에는 운동권 출신 학자로서의 꼬리표도 완전히 뗐다”고 썼다. 당시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가 발표한 “1980년 광주에서의 유혈 참극에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한 성명서를 보고 교수협의회에 “주저 없이 탈퇴서를 제출”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이영훈 교수는 “IMF위기가 시장경제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고, 그 때부터 제대로 된 경제학자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썼다. 이 무렵 이 교수는 후쿠야마(주: 『역사의 종말』을 쓴 스탠퍼드대 교수) 교수의 강의를 듣고 또 저서 『트러스트』를 읽고 나서 이렇게 썼다. 
“후쿠야마와 나는 동갑이었다. 그런데 그는 세계의 지성이었고 나는 고작 후진국의 초라한 딸깍발이었다. 내게 그러한 수치심을 안겨 준 것은 내가 대학시절에 수준 높은 교양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교수는 자유주의자로 변신했다.
 
실증주의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학문적 업적을 쌓다
 
2008년 이영훈 교수는 교과서포럼이 펴낸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편집 책임을 맡았다. 그는 “지난 60년간 남한과 북한의 판이한 역사를 놓고 볼 때 인간의 본성인 자유와 이기심이 인간 역사의 발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안교과서를 펴냈다. ‘교과서포럼 일동’ 이름으로 쓴(주: 편집 책임자 이영훈 교수가 썼다고 봄) ‘책을 내면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책은 “철저한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집필되었고, “‘우리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설정했고,” “대한민국이 태어나는 역사적 과정에 … 국가가 인간의 삶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기에 적합한, 지금까지 알려진 한 가장 적합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었다.” 이 역사 교과서는 ‘철저하게 실증주의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이영훈 교수는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후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라고 말했다가 곤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공주대 중·고등학교 교사 연수 프로그램 강의에서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라고 말했다가 교사들로부터 “어떻게 어린 학생들에게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고 가르치라고 하느냐”며 질책을 당한 것이다. 또 서울대 사회학과 한 대학원생이 연구실로 찾아와 이 교수를 비판한 글을 놓고 가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라고 훈계도 했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라는 말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나왔고,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신봉한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를 포함해 어느 자유주의자도 ‘이기심은 좋은 것이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은 애덤 스미스처럼 ‘친절, 박애, 희생정신보다는 이기적 본능’이 인간에게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볼 뿐이다. 한 예로, 목숨을 걸고 아프리카 오지(奧地)에서 전도하는 선교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다음은『국부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대목이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업자나 빵집 주인의 착한 마음씨 덕분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덕분이다.” 
생각해 보시라. 정육점 주인, 양조업자, 빵집 주인이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구태여 일할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경제학도로서, 이영훈 교수가 10여 년에 걸쳐 집필한 『한국경제사 Ⅰ, Ⅱ』는 한국경제사 분야의 고전(古典)으로 평가되고도 남는다고 본다. 이 저서는 이미 전경련으로부터 ‘자유시장경제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 저서는 Ⅰ권 719쪽, Ⅱ권 659쪽, 합쳐 1,378쪽에 이르는 대작이다. 이 책은 이영훈 교수의 연구 방법인 ‘실증주의’가 철저하게 바탕이 되고 있는 명저다. 이 책이 얼마나 ‘철저하게 실증을 바탕으로’ 쓰였는가를 보여주는 예를 든다. 이 책의 제11장은 201쪽에 걸쳐 ‘1963년 고도성장부터 1997년 외화위기까지’를 다룬 것인데, 대부분 ‘인용’ 쏘스를 밝힌 각주가 무려 213개나 포함되어 있다.
 
좌파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승만 학당’을 운영하다
 
이영훈 교수는 <이승만 학당>과 <이승만 TV>를 운영하고 있다. <이승만 학당>의 운영 취지는 교장인 이영훈 교수의 ‘인사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은 자유인의 공화국이다. 해방 후 많은 사람이 좌우합작을 해서라도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 반대하였다. 공산주의와 타협하면 머잖아 공산주의의 나라가 되는 것은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생기지 않거나 다른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 중심제 정부형태의 수립, 농지개혁의 실시, 공산 침략전쟁의 방위, 한미군사동맹의 체결, 국가경제 기초공업의 건설 등, 그의 건국 공적은 청사에 길이 빛난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우리 역사의 진면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많은 오해와 편견이 무방비 상태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자유인의 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장래도 밝지 않다. 본 학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철학, 독립운동, 건국업적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널리 국민적 교양으로 전파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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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을 쓰기 위해 나는 이영훈 교수 등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를 읽었다. 이 책은 이영훈 교수 등이 운영하는 ‘이승만TV’가 2018년 1월부터 45회에 걸쳐 <위기 한국의 근원: 반일 종족주의>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라는 두 제목으로 방영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들이 다룬 주제는 “20세기 전반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역사와 관련하여 한국인이 가지는 통념에 관한 것”인데, 본 칼럼은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21∼23장’을 주 텍스트로 삼아 이야기 한다.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의 ‘프롤로그’에서 한국을 “거짓말의 나라”로 규정했다. 그 내용은 “거짓말 하는 국민, 거짓말 하는 정치, 거짓말하는 학문, 거짓말의 재판, 반일 종족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반일 종족주의’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언급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습니다.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 이웃 일본을 세세(歲歲)의 원수로 감각하는 적대 감정입니다. 온갖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것은 이 같은 집단 심성에 의해서입니다. 바로 반일 종족주의 때문입니다.”
 
실증을 바탕으로 ‘일본군 위안부’ 진상을 밝히다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 3부에서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일본 위안부’ 문제를 실증을 바탕으로 심도 있게 다뤘다. 1991년에 김학순이란 여인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하자 뒤이어 170여 명이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나섰다. 그들은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일본 수상이 몇 차례 사과를 하고 보상을 시도했지만 원 위안부와 그들을 지원한 단체는 거부했다. “한국 내에서조차 그에 관한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청산한다는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파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 정부가 이에 반발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인용은 한일 무역마찰의 등장 배경이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문재인 대통령의 주장만 따를 것이 아니라 이영훈 교수의 실증을 바탕으로 한 주장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많은 내용 가운데 몇 가지를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한다.
 
*『보건사회통계연보』는 1966년까지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여인을 위안부로 규정하여” ‘한국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 미국군 위안부’ 등 “우리 안의 위안부” 자료를 발표했다. 
*6·25전쟁기에 ‘일본군 위안부’를 그대로 복제해 놓은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1950년대에 실재한 ‘한국군 위안부’는 규모가 작았으나 전국의 모든 도시에는 ‘민간 위안부’(사창가)가 있었다.
*해방 후 ‘우리 안의 위안부’를 가장 길게 대표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미군 위안부’다. ‘미군 위안부’는 1990년대까지 ‘위안부’라는 말로 공식적인 행정용어로 사용되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것은 1937년인데,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1870년대 일본이 시행한 공창제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공창제도가 1916년에 조선에 이식되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에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했다. 위안부는 대개 병사 150명당 1명의 비율로 충당되었고, 위안소는 근 28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주둔하는 거의 모든 지역에 설치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제는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군 위안소는 민간의 공창제와는 달리 운영수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민간의 공창제에 비해 군 위안부제는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이었다. “대개 병사 150명당 위안부 1명이었으니 병사의 위안소 방문을 월 1회로 잡을 경우 위안부의 노동 강도는 하루 5명이었다.” 1937년 오사카 유곽의 창기 하루 유객 수 2.5명에 비해 노동 강도가 높았다.
*‘일본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두 가지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는 1983년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가 쓴 책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거짓말로 밝혀졌다. 또 하나는 원 위안부들의 증언에서 비롯되었는데, 원 위안부들이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을 받아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일본을 훈계하는 독립운동의 지사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강제연행설을 부추겨 온 또 하나의 거짓말은 여자정신근로대(女子挺身勤勞隊)와의 혼동이다. …. 위안부와 정신대는 별개의 것이다. 정신대는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하는 것을 말한다. …. 이 법이 조선에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 다만 관의 권유와 알선으로 접객업의 여성이나 여학생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평야의 군수공장이나 인천의 조병창에서 두어 달 근로한 사례는 있다.”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는 “약 3,6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터무니없이 과장되었다.
*1941년 12월 미국과의 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은 조선총독부에 여인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주선업의 전국적 시장망이 작동하여 약 800명의 여인을 동남아로 송출했다. …. 2년 뒤 1944년 8월경 20여 명의 위안부가 미군의 포로로 잡혀 심문을 받았다.” 미군 심문기록의 일부를 인용한다. “위안부란 일본군에 부속된 직업적 창녀들이다. …. 그녀들의 생활은 비교적 사치스러웠다. 식료와 물자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생활은 좋았다.” 
*“일본군 위안부는 과연 성노예였던가?” 이영훈 교수는 이렇게 썼다. “문제의 핵심은 위안부들에게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었나 하는 점입니다. ….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포로 위안부에 관한 미군의 심문기록이 지적하고 있듯이 1943년 동남아의 일본군은 전차금을 상환하거나 계약기간을 채운 위안부의 귀향을 허락했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이영훈 교수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모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저는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였다면 해방 후의 민간이나 기지촌의 위안부는 그보다 훨씬 가혹한 성노예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어느 쪽이든 성노예설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성노예설을 주장하는 운동가나 연구자들의 무지와 편견에 대해서입니다. 그들이 진정 인도주의자라면, 그들이 진정 여성주의자라면, 그들은 해방 후의 한국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 미국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그들이 성노예였음을 주장하면서 한국 남성이나 국가나 미국군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빈곤계층의 여인들에 강요된 매춘의 긴 역사 가운데 1937∼1945년의 일본군 위안부제만 도려낸 가운데 일본 국가의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그들은 인도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아니 난폭한 종족주의자였습니다.”
    
참고 저서
1. 이영훈, 「소걸음으로 돌아 자유주의에 이르다」, 복거일 편저(2013),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 FKI미디어.
2. 교과서 포럼 지음(2008),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기파랑.
3. 이영훈(2016), 『한국경제사 Ⅰ, Ⅱ』, 일조각.
4. 이영훈 외(2019),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1941년 광주 출생, 광주제일고‧전남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업. 美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 받음.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미국에서 경제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1979)를 읽고 ‘시장경제’에 빠져들었고, ‘시장경제’ 강의를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교수로 인정받고 있다.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적잖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처리즘: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는 마거릿 대처의 삶과 정치를 연구·정리한 중요한 저작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외에도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갖고, 『좋은 정책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 『성경과 함께 떠나는 시장경제 여행』, 『노동시장 개혁은 슈뢰더처럼, 대처처럼』, 『7인의 위대한 정치가』 등 자유시장경제를 널리 알리기 위한 책들을 30여 권 집필했으며, 지금도 어느 작업실에서 다음 책 집필에 혼신을 쏟고 있다.

등록일 : 2019-08-09 11:44   |  수정일 : 2019-08-0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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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정  ( 2019-08-10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1
돈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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