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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연숙의 ‘내겐 너무 그리운 것들’

느닷없이 서울구경

글 | 이연숙 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7-08 10:19

 
누군가 내게 살면서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지금’ 이라고 대답한다. 딱히 돌아가고 싶은 시절도, 특별히 행복했던 순간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미국에서 살았던 1년은 조금 얘기가 다르다. 질문을 바꿔, 네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시기가 언제였냐고 물으면 나는 미국에서의 살 때 였다고 대답한다.

80년대에 김지영이 있었다고 하면 60년대에는 뒷자리에 숙자만 붙여 출생신고가 된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을 비롯한 보수적 관습이 팽배하던 시절에 나는 무려 편모가정에 장녀였던 것이다. 하여, 다른 집 애들이 잘못하면 야단 한번 치고 넘어가지만 너희들이 사고를 치면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니 행동거지를 각별히 조심하라고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거기에 여자아이였던 나는 엄마를 대신한 집안일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해야 했다. 잘하면 당연한 거고 못하면 질타와 굴욕을 감수해야하는 참으로 억울한 역할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결혼을 한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 주체적인 인생을 산다고 하기 보다는 주변의 시선에 의해 살아내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2012년, 남편의 연수 발령으로 식구가 모두 미국에 가게 됐다. 사람이든 환경이든 낯선 것에 적응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오래 걸리던 내가 그 곳에서는 희한하게도 모든 상황에 바로 적응이 됐다. 이곳에서처럼 긴장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이 오십 넘은 여자가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든 레깅스를 입고 다니든 맨발에 발가락 슬리퍼를 신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급속도로 용감해진 것도 그 때문 아닌가 싶다.
 
커뮤니티 스쿨에서 ESL과정을 다니면서 프로그램을 살펴보다가 무료강좌 몇 개를 등록했다. 영어를 잘했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다. 필요한 어휘를 눈치껏 알아차리는 정도로 베이킹, 드로잉, 라틴댄스 강좌에 참여했고 포토샵 강좌가 있는 캠퍼스는 거리가 멀어서 두 번 가고 그만 두었다. 대부분 이론보다는 활동을 위주로 하는 강좌였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강좌 즉, 쓰기 강좌는 강사가 친히 내가 있는 교실로 와서 내게 강의에 참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영어가 짧아 물어보지 못하고 그 다음 시간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라이팅 클래스에 참가했다.

첫 수업에 가서 보니 그 곳은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당시 나이로 최고 연장자는 95세 남성이었는데 아이패드에 필기를 한다며 강사가 추켜세웠다. 모든 사람들의 나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남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단발의 할머니도 있었고 젊은 시절 한국의 P사에 근무했었다는 백인 남성은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나는 반은 알아듣고 이해 못하는 반은 웃음으로 때우면서 결석 없이 수업을 이어갔었다.
 
그 곳에서 손님이 왔다. 말이 어눌해서이기도 했지만 특별히 개인적인 얘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 크리스티안에게서 지난 1월에 이메일이 왔다. 한국에서 입양한 41세가 된 딸과 한국에 가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당황스러움 보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4월이 될 거라던 출국 일정이 딸의 일 때문에 6월로 미뤄졌고 그동안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이 특별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고민이 됐다. 밖에서 만나 문화체험을 하고 한식으로 점심을 대접하는 정도로 끝나도 되는 건지, 집으로 초대해서 서툴지만 직접 조리한 한국음식을 경험하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 곳에 있는 동안 숙소를 제공해야하는 것인지 등이었다. 날짜가 닥치자 때 이르게 닥친 더위에 70대 중반으로 예상되는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여 집으로 초대해서 점심을 대접하는 것으로 결정했었다.

메일로 소통할 때와 실제 만났을 때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독일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억양도 센데다 말이 빠른 편이었다. 언뜻언뜻 들리는 단어와 표정, 그리고 음식준비부터 도와준 딸의 설명으로 그녀와 그녀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됐다.

그녀의 딸 사라는 41년 전에 한국의 용산 어느 골목에 버려진 것을 경찰이 보호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무렵 불임으로 입양을 결정했던 크리스티안은 국제 입양기구의 소개로 한국에 오게 됐고 사라와 만났다고 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태어났다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라가 작년부터 마음이 바뀌었다고 했다. 한국에 가서 자신과 생김과 피부색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한국의 공기와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고 했다는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집으로 초대한 후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는 하루 전날 딸이 발견됐다는 장소를 찾아갔었다고 말했다. 용산은 이미 너무 많은 변화를 겪은 뒤라 오래전 주소를 들고 찾아가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 장소에 갔을 때 그 곳에는 60대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더라고 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용산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모님 집을 떠나 신혼방을 꾸렸던 곳에서 다시 이사를 한 곳이라고 했다. 첫 번 째 집에서 오빠를 낳았고 두 번째인 용산에서 나를 낳았는데 방이 어찌나 좁은지 키가 178센티쯤 되는 아버지는 대각선으로 누워야 다리를 뻗을 수 있었다고 했다.

불현 듯 용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동에서 출발해서 남산 서울타워에 올랐다. 빙빙 돌아가다보니 서울이 모두 보였다. 관광을 공부처럼 하는 남편은 동네 모습과 자신이 알고 있는 한강다리를 맞춰보면서 역시나 꽤나 심각했다.
“저기쯤이 용산일텐데... 어? 저 건물은 뭐지? 전엔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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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남산타워 처음 와본다는 말을 열 번쯤 하고도 계속 하는 남편과, 내려올 때는 케이블카 대신 용산 쪽 길로 걸어가자고 했다. 걸으면서 후암동인줄 알았는데 다 내려와서 보니 다시 명동역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사라 얼굴이 떠올랐다. 오래된 골목길을 이리저리 찾아 올라가면서 사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버린 그 곳에 대한 증오였을까 아니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을까?

느닷없는 서울구경 탓이었는지 그 날, 남편은 초저녁부터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연숙 작가

63년생 토끼띠 평범한 주부이자 작가. 2009년 문예지 <좋은수필>로 등단하고 2014년 친정엄마와 가족, 그리고 자신의 성장기를 엮은 에세이 <엄마 덕분입니다>를 출간했다. 에세이 작가에 이어 소설가에 도전하고 있다.

등록일 : 2019-07-08 10:19   |  수정일 : 2019-07-0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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