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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의 못다한 이야기

낙엽과 쭉정이

글 | 엄상익 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5-29 09:32

십 년 전쯤이라고 기억이 된다. 고등학교 시절 알던 1년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한 번 보자는 것이다. 그와 별로 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교 시절 상급생인 그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와 일류호텔 중국음식점에서 마주 앉았다. 그가 좋은 음식을 시켜 점심을 사면서 말했다.

“내가 아팠어. 이제부터는 내가 마음에 담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 죽기 전에 밥을 한 번이라도 사기로 했어. 그래서 모신 거야.”

내가 그의 가슴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좋은 걸 배웠다. 그 후 나도 조금씩 실천해 보려고 노력했다. 육군 대위 시절 전방에서 모시던 사단장을 40년 만에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인자하고 마음이 따뜻하던 장군이었다. 그는 이미 팔십대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저녁을 사드렸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세월은 내 몸에서도 부품들을 산화시키기 시작했다. 뻘건 녹물이 흘러나왔다. 우울해져서 스스로 친구들과의 연락을 차단했다. 파뿌리 같은 허연 머리에 종이를 접었다 놓은 것 같은 주름진 늙은이들이 모여 의미 없는 정치나 골프를 화제에 올리는 모임은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랬었다. 어느 순간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방을 가득 채운 새장 속의 새들과 지냈다. 젊어서부터 아버지는 새를 좋아했다. 새빨간 갓난아기 같은 어미 잃은 새끼새를 솜 위에 눕혀 놓고 돌보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계란죽을 묻힌 으깬 좁쌀을 면봉에 묻혀 어린 새에게 먹이라고 했다. 어린 새에게서 하얀 솜털이 나고 이윽고 날기 시작해서 내 어깨에 내려 앉는 순간 나는 생명과 사랑을 느꼈었다. 

나는 혼자 새와 살던 아버지의 그 나이를 어느새 훌쩍 넘겼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도 스스로 만든 조용한 황혼을 마주하고 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친구들과의 만남도 가급적 피했다. 친구들도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마음이 바뀌었다. 인간관계의 그물 속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이 삶일 수도 있었다.

오래된 친구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자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몇몇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는 무심한 그들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친구가 전화를 받지 못하고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가끔 자네 생각을 하네. 난 뇌종양수술을 받았어. 의사는 수술 결과에 대해 애매한 말만 하네. 사람 사는 거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구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가끔 이렇게 소식이나 전합시다. 시간이 되면 한 번 보고 싶지만’

금융그룹의 부회장으로 호방한 성격에 활동적이던 그였다. 마음먹고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실하게 살던 고교시절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기도 했다. 전화기 저쪽에서 힘이 빠진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암으로 방광을 들어내고 신장도 한쪽 없앴어. 지금은 투석을 받고 있는데 내가 투석을 받으려고 사는 건지 살라고 투석을 받는 건지 모를 정도야. 연락을 줘서 고마워.”

이번에는 좋아하던 가까운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요즈음 내 몸이 볼트와 낫트가 헐거워진 고물 자동차 같아요. 이렇게 힘겹게 굴러가다가 어느 날 엔진이 정지되듯 심장이 멈추면 죽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엄선배 사무실 근처에 지나는 길에 꼭 들릴 테니 맛있는 점심을 사세요.”

내가 다가가니까 그들이 좋아했다. 그들도 아프고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사람들을 밀어버리고 혼자 고독해 하는 게 나의 인생이기도 했다. 백살을 산 김형석 교수가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이 육십대 중반에서 칠십대 중반이라고 했다. 그 말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아직 윤기가 남아 있는 낙엽이 초가을에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는 수도 있다.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버티는 쭉정이보다 그렇게 갈 때 먼저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엄상익 변호사


등록일 : 2019-05-29 09:32   |  수정일 : 2019-05-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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