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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트레커 이경섭의 ‘남자의 길’

7일의 봄날, 올레를 걷고 인생을 보았다_6

글 | 이경섭 아마추어 마라토너·트레커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4-26 10:21

불현듯 첫 직장에 입사한 때가 떠올랐다. 모든 업무가 서툴고 익숙치 않던 그 때. 당시는 수작업으로 일했다. 전산 프로그램은 당연히 없었다. 서류를 일일이 펀칭해서 커버철을 만들어 보관했던 호랑이 담배 태우던 시절. 출근해서 퇴근까지 각종 서류철을 정리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이 단순작업은 묘한 뿌듯함을 줬다. 트레킹이나 마라톤도 비슷한 것 같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성실하기만 하면 되는, 단순 작업과 같은 기분이다.
 
성실하게 걸은 지, 6일째 되는 날. 아침을 맞이한 숙소는 지어진 지 제법 된 곳으로 개인이 관리하기에는 면적도 너무 넓었다. 내부는 조금 부실해 보일지언정 외관만큼은 사진 찍기에 훌륭한 곳이다. 비가 완전히 그쳐 공기가 깨끗하다. 멋진 배경의 바다와 숙소, 상쾌함까지 더해진 최상의 컨디션을 핸드폰 카메라로는 온전히 표현이 불가능하다. 지금의 기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사진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5코스 종착점까지는 오늘도 3~4km 정도 더 가야 했다. 어제처럼 배고픈다리를 무사히 건너고 만조 바다를 우회한 일을 제외한다면 늘 비슷한 길이다. 비온 다음날인지라 아침 바다가 유달리 멋있었다. 같은 바다가 매일 달라 보일 수 있구나 싶다. 멀리 한라산도 보인다. 1시간쯤 지나자 어제 못채운 5코스의 종착점에 도착했다.
 
쇠소깍 다리를 건너자 6코스가 시작됐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풍광이었다. 다리에서 쇠소깍까지 효돈천을 따라 걷는 산책길에 나도 모르게 연신 셔터를 눌렀다. 말로만 듣던 아름다움이 실제로 보니 그 이상이었다. 쇠소깍은 담수와 해수가 만나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 이름지어졌다. 명승지답게 이른 시간임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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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돈천에서 바라본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지점의 쇠소깍.

오늘의 본격 일정은 6코스(쇠소깍 다리~서귀포 제주올레여행자센터 11Km)와 7코스(서귀포 제주올레여행자센터~월평 아왜낭목 쉼터 17.6Km)이다. 6코스는 서귀포시에 들어서기까지 거의 전 코스가 바다를 끼고 걷는 산책길이다. 지난 연재에도 언급했듯이 이쪽 바다 산책길을 포함한 올레길 풍광은 단연 최고인 듯하다. 유명 호텔이 밀집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칼호텔 근처 길은 지도 검색과 달리 진행되는 올레길이다. 지도에 표시된 바로는 칼호텔 앞 바닷길이 있는데, 실제로는 호텔을 크게 우회하여 도로길을 지나 다시 합류하게 되어 있다. 올레꾼들이 호텔 앞길을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란다. 이유를 확인하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길을 막아서 소정방 폭포, 정방 폭포를 못보고 지나쳤다. 예전에 가보긴 했지만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길을 걷다가 유료입장 안내가 나왔다. 박물관·미술관이면 이해가 될 텐데 자연경관 감상에 왜 돈을 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심히 못마땅하다.
 
일정이나 체력이 허락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제주 남쪽 올레길을 추천한다. 추천하고픈 구간이 많은 곳이다. 계속 걷는 올레꾼 입장에서 이 길이나 저 길이나 비슷하게 보이고 덤덤해지기 마련인데 이쪽 경관은 그렇지 않다. 유독 돋보이는 곳이다. 특히 6코스 해안 올레길과 주변은 못마땅한 감정마저 잊게 만들었다.
 
중간 스탬프 자리인 소라의성. 폭포와 파도가 만나는 곡선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란 설명이 절대 과하지 않게 느껴졌다. 산책길에서 본 주상절리 절벽과 멀리서 조망할 수 있는 섬들, 검은 암초에 있는 바다새를 포함해 참 볼 게 많은 풍성한 길이다. 구두미 포구에서 보는 바다조명도 훌륭하다. 백두산 천지를 축소해 놓은 모습과 같다는 소천지까지 지나는 곳마다 좋은 풍광이었다. 명성만큼 관광객들도 많다.

서귀포시로 들어가는데 안내 표시판에 ‘작가의 산책길’이라고 써 있다. 소암기념관에서 이중섭미술관까지의 길인데 제법 의미가 있는 길이다. 이중섭미술관과 거주지를 지나서 제주 올레여행자센터에 도착했다. 이곳은 완주자에게 증서를 수여하고 올레꾼을 위해 숙소와 식당도 운영하는 유일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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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와 파도가 만난다는 소라의성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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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암초에 백색의 바다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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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를 닮았다는 소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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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안내표와 같이 있는 조형물. 정성이 느껴진다.

점심은 여행자센터 옆에 있는 밥집에서 먹기로 했다. 현지인들이 만만히 갈 것 같은 곳이다. 어제 점심은 별로였고 저녁은 컵라면을 먹었다. 아침까지 토스트를 먹었으니 집밥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치찌개에 막걸리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오후 일정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센터 앞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완주증서를 주고 자축하는 듯했다. 막걸리도 한 잔 했겠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7코스를 시작하고 칠십리시공원이 나타났다. 평일이어선지 사람이 적었다. 공원 중간쯤 폭포가 보였다. 천지연 폭포라고 했다. 나름 괜찮은 폭포다. 조금 더 걷자 삼매봉이 보였다. 이름만 봉이지, 언덕 수준이다. 이러한 제주의 오름이 좋다. 아무리 낮다 해도 찾아보면 실망시키지 않는 조망이 늘 있다. 세 개의 섬들이 멀리서, 가까이서, 이런 저런 각도에서 같은 바다에 다름을 선물한다.
 
6, 7코스는 알려진 명소가 유달리 많다. 그중에서도 외돌개를 만났다. 누가 붙인 명칭인지는 모르겠으나 보는 순간 딱 외돌개구나 싶었다. 바다와 만나는 곳은 제법 웅장한 절벽과 주상절리가 감탄을 자아낸다. 해안도로에 들어서자 풍성한 유채꽃, 1년 느린 우체통, 하루 두 번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썩은섬(서건도) 등이 보였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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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코스 시작점인 제주올레여행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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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리시공원에서 바라본 천지연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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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코스의 명소 외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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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코스의 경관은 지루할 틈이 없다.

멀리서 보이는 강정포구, 말 많은 해군기지도 보였다. 강정천에 들어서자 주변이 색달랐다. 뉴스에서 본 시위 현장도 그대로였다. 시위대가 떠나고 현장은 방치되어 을씨년스럽다. 비닐하우스도 관리가 안 되어 지저분했다. 사람 마음 떠난 곳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이렇게 폐허가 된 곳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대상이 없는 증오감도 느껴졌다. 트레킹 코스 중 가장 지저분하고 걷기 싫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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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포구. 오른쪽에 해군기지가 살짝 보인다.

강정초등학교 방향에서 숙소를 찾았다. 내일이면 끝난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반주를 생각하며 식당에 들어섰다. 아뿔싸, 안주가 될 만한 식사는 1인분이 안 된단다. 별 수 없다, 모처럼 호사를 부리는 수밖에. 흑돼지두루치기 2인분에 소주를 마셨다.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오늘도 숙소는 6인실인데 홀로 사용하게 됐다. 하루만 더 걸으면 다시 일상이다. 무지 아쉽다. 며칠뿐이지만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다. 밥 먹고, 술 먹고, 걷고, 자고. 계속 이런 삶이 허락됐으면.
 

제주 올레 트레킹 6일차
기록
| 46,036보, 33.55km
경비 | 59,000원
점심(김치찌개) 10,000원
저녁(흑돼지두루치기) 24,000원
숙박 25,000원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경섭 아마추어 마라토너·트레커

수십 년간 마라톤과 수영으로 체력을 다진 아마추어 트레커. 걷고 뛰기를 좋아해 매년 3~4회씩 국내외 트레킹 코스에 도전하고 있다.

등록일 : 2019-04-26 10:21   |  수정일 : 2019-04-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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