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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트레커 이경섭의 ‘남자의 길’

7일의 봄날, 올레를 걷고 인생을 보았다_5

글 | 이경섭 아마추어 마라토너·트레커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4-23 10:13

아침부터 고봉밥이다. 식사 시간도 30분이나 서둘러 주셨다. 비 예보가 있다고 게하 사장님이 편의를 봐주신 거다. 북어콩나물국을 메인으로 뱃속을 든든히 채웠다. 주인장은 햇빛에 그을려 피부가 벗겨지려 하는 내 얼굴을 보고 선크림까지 챙겨줬다. 트레킹을 준비하며 이번 기회에 대충 살아보고자 선크림과 면도기 등을 챙기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니 바다 햇빛에 얼굴이 쓰라렸던 참이다. 커피까지 덤으로 챙겨주니 감사를 떠나 이젠 미안할 지경이다. 받은 마음을 바리바리 모아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야외운동을 하면서 습관처럼 늘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이번 트레킹 준비를 하면서도 확인해 보니 최소 3일은 비 예보가 있었다. 다행히도 비와 함께하는 트레킹이 싫지 않다. 사실 즐기는 편에 가깝다. 2년 전 여름, 스코틀랜드 West Highland Way라는 트레킹 코스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쪽 날씨는 비가 오든지 혹은 올 것 같은 날씨뿐이다. “나쁜 날씨는 없다. 나쁜 옷차림이 있을 뿐”이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다.
 
마찬가지로 비 내리는 3일쯤이야 해가 나지 않는 날씨의 하루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판초 우의와 스패츠를 준비했다. 다만 등산화만 덜 젖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전날까지 숙소에 도착하면 비가 오거나 가벼운 비만 와서 준비한 우의를 사용하지 못했다. 오늘은 폭우 예보가 있어 제법 기대됐다.
 
트레킹 5일이 되니 배낭무게나 걷는 일정이 자연스러워진다. 아침에 시작해서 만나는 제주의 아침 해안로는 언제나 좋다. 인적이 거의 없으니 독점하는 호사를 누린다. 제주에 살고픈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몇 억원이라는 한강 조망 아파트와도 비교가 안된다.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배고픈다리’를 만났다. 고픈 배처럼 밑으로 쑥 꺼진 모양이라 붙여진 명칭이다. 만조로 다리가 물에 잠겨 있다. 다른 길을 찾아봐도 안 보이고 지나가는 차도 없다. 방법이 없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건너기로 했다. 다행히 길이 미끄럽지 않고 물살도 세지 않았다.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아 봤다. 이정표를 보니 3코스가 2km 정도 남았다. 부족함 하나 없는 충만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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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다리’. 중간은 제법 종아리까지 물이 차서 신발을 벗고 건너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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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해변을 지나 3코스 종착점이자 4코스 시작점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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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런 우거진 나무흙길이 좋다. 바다만 보이는 것보다는.


금세 3코스 종착지인 표선 해비치 해변에 도착했다. 참 이상하다. 안 보이는 게 더 이상한 스탬프 확인자리가 도통 안보여 한참을 헤맸다. 여기쯤이란 걸 몰랐다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이런 일은 제법 있다.
 
스탬프를 찍고 나면 기분이 참 좋다. 마무리를 지은 것 같다. 그 길이나 이 길이나 차이가 없겠지만,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다. 눈을 뜨고 하늘도 보고 바다도 다시 보고 내가 걷는 길 이외의 주변 경관도 보인다.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아침 일정인 4코스를 시작했다. 바닷길이 참 감동이었다. 바다는 같은 바다여도 저마다 감흥이 다르다. 제주 북쪽 바다보다 동쪽이, 동쪽보다 서귀포의 남쪽 바다가 더 감동적이다. 바다를 끼고 지나는 숲길이 너무 예쁘다. 바다를 끼고 만든 너덜길과 숲길에 많은 정성이 느껴졌다. 올레꾼들이야 아무 생각 없이 걷겠지만 직접 길을 만든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늘 일정은 4코스(표선~남원 19km)와 5코스(남원~쇠소깍 다리 13.4km)다. 4코스는 전 코스가 거의 바다를 끼고 걷는 해안도로 혹은 너덜길로 정성이 많이 들어간 예쁜 숲길이다. 트레킹 중 1코스 외에는 올레꾼을 본 적이 없다. 혼자 떠난 트레킹에 올레꾼도 없자, 길을 홀로 전세낸 것 같아 호사스럽고 풍족하다. 누군가는 쓸쓸하고 외롭게 볼 수도 있으나 길을 걷는 당사자는 전혀 아니다. 이런 트레킹은 선물 같다.
 
출발한 지 3시간쯤 되자 안내문이 나타났다. 중간 스탬프 자리가 변경됐다는. 왜 바꾼지는 모르겠으나 500m쯤 더 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 정도 걸어도 보이지 않아 현지인에게 물어봤다. 스탬프는 코앞에 있었다. 그런데 지척에 두고 못찾는 사람들이 나뿐만은 아닌 듯하다. 4코스 종착점 안내소 직원이 절반 이상은 이곳 확인을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스탬프 자리의 간세는 눈에 띄게 파란색으로 칠해두는데 이곳은 그냥 나무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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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못찾은 중간스탬프다. 눈앞에 두고도 두 세번을 왔다 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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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들꽃이 지천이다.

바닷길은 비슷하나 지루하지 않다. 제주마을을 지나 걷다 보니 태흥포구에 이르렀다.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예전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전형적 식당이다. 가격만 비싸고 맛이나 정성은 보이지 않았다. 메뉴로 고른 뚝배기 해물탕 역시 실망스럽다. 그냥 한 끼 때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식후 커피 한잔을 마시자, 드디어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보만큼 폭우는 아니었다. 그냥 맞기에는 많이 쏟아질 듯 해 준비해온 판초 우의와 스패츠를 꺼냈다. 판초 우의를 입고 빗방울을 헤쳐가면 눈길에 아이젠을 신은 것처럼 당당해진다. 비는 저녁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걷기 딱 좋을 정도로 내렸다.
 
빗길을 즐기다 보니 4코스 종착점에 도착했다. 남원올레탐방 안내소에서 잠시 정비를 하고 바로 5코스에 들어갔다. 5코스 역시 4코스와 비슷한 전경이 펼쳐졌다. 빼어난 해안절경도 지났고 도로가에 사진전도 있었지만 올레꾼은 무심하게 바다를 스쳤다. 나 역시 생각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저 길을 보며, 길을 따라 걸을 뿐이다.
 
5코스의 중간 스탬프 자리는 동백나무 군락지다. 이곳은 한 할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 황무지에 한 두 그루를 심은 게 지금의 울창한 숲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3일차 이후부터는 길을 잃는 경우가 잘 없는데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걷긴 했나 보다. 필요한 걸 찾지 못했다. 중간 스탬프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도리어 “그게 뭐하는 거냐”고 반문한다. 왜 나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옆에 있어도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그런 것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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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코스 종착점이자 5코스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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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 옆으로 사진전이 열렸다. 물론 나는 스치듯이 지나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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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앞 정원에서 주인장의 노고가 느껴졌다.

이곳을 지나 한적한 시골길을 마냥 걸었다. 오늘의 종착점이 게하가 보였다. 넓은 암반이란 뜻의 넙빌레 지역에 있는 숙소다. 비가 와서 더 외져 보이고 식당이나 편의시설은 일절 없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를 맞으며 식사를 하러 가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려 했는데 내 몰골이 그래 보였는지 먼저 이야기를 꺼내준다. 여기는 조리 시설이 없고 컵라면만 있단다. 아침 식사에 나오는 식빵정도는 줄 수 있다고 했다. 컵라면을 천원에 구입하고 식빵 세 조각을 잼과 먹으니 한 끼 식사가 됐다. 뭐, 이런 날도 있는 있는 거다.
 
대신 숙소는 만족스럽다. 6인실을 혼자 사용했다. 불을 켜고 싶으면 켜고, 끄고 싶으면 끄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호사인데. 샤워하고 내일 숙소를 예약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건 단 이틀뿐이다.
 

제주 올레 트레킹 5일차
기록 | 48,689보, 37.28km
경비 | 총 45,000원
점심(뚝배기해물탕) 19,000원
저녁(컵라면 외) 1,000원
숙박 25,000원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경섭 아마추어 마라토너·트레커

수십 년간 마라톤과 수영으로 체력을 다진 아마추어 트레커. 걷고 뛰기를 좋아해 매년 3~4회씩 국내외 트레킹 코스에 도전하고 있다.

등록일 : 2019-04-23 10:13   |  수정일 : 2019-04-2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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