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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주의자 박동운 교수의 대한민국 가꾸기

[위대한 7인의 정치가 3]덩샤오핑, 굶어죽는 나라 중국을 G2로 이끌다

<국가와 세계를 바꾼 위대한 7인의 정치가>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세 가지다. 첫째, 나라와 국민은 뒷전에 두고 오로지 ‘편 가르기’에 여념이 없는 대부분의 한국 정치가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둘째, ‘거꾸로 가는 정책만 고집하여’ 잘 나가는 한국경제를 침몰시키고 있는 현 정부와 청와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경종이란 바로 7인의 정치가들의 위대한 통치철학이다. 셋째, 언젠가 오게 될 통일을 염두에 두고 통일된 한국의 정치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7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4-16 09:35

일찍이 중국을 ‘잠자는 사자’로 표현한 나폴레옹은 중국이 깨어나면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놀드 토인비도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나폴레옹과 토인비의 예언대로, ‘중국 굴기’는 지금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중국 굴기’의 원동력은 덩샤오핑(1904∼1997)의 개혁·개방 정책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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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당시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과 카터 미 대통령의 1979년 1월 정상회담. 사진=조선DB

덩샤오핑의 삶은 그 자체가 중국 역사여서, 길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낀다.
 
중국은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후 열강(列强)들의 각축장이 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봉건주의 억압에 항거했고, 애국지사들은 구국의 길을 찾았다. 덩샤오핑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1920년 16살에 근공검학회(勤工儉學會)를 통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프랑스에서 공부는 하지 못하고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는 1926년에 프랑스를 떠나 사회주의 성지(聖地) 모스크바로 갔다가 그해 말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중국 굴기(崛起)’의 원동력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덩샤오핑은 국내 사회주의 혁명운동에서 군인으로 활동했다. 국공합작(1924∼1927)이 결렬되자 덩샤오핑은 ‘홍(紅)7군’을 창설하여 국민당 장제스와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홍7군을 이끌고 국민당 군대와 싸우면서 1931년에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앙 홍군과 합류했다. 이후 그는 마오쩌둥과 숙명적인 관계를 맺어갔다. 중국공산당은 초기에 소련파(유학파)와 국내파 간에 권력 싸움을 벌였는데 국내파 마오쩌둥이 패배했다. 소련파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편에 섰다는 이유로 1933년에 1차 실각을 당했다. 프랑스 유학 동기생의 도움으로 그는 곧 복권되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투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당에 밀려 ‘대장정’에 올랐는데, 그 과정에서 준의(遵義)에 입성했다. 공산당은 준의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국민당에 밀리게 된 원인을 분석했다. 이 회의에서 ‘농민이 중국 혁명의 중심’이라는 마오이즘이 인정받게 되어 중국식 사회주의가 탄생했다. 유학파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지지함으로써 중공 권력의 최상부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자 공산당과 국민당 간에 대규모 내전이 일어났고 결과는 공산당의 승리였다. 1949년 10월 1일, 드디어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경제 건설을 위해 제1차 5개년계획을 도입했다. 이 계획이 성공하자 마오쩌둥은 1957년에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대약진운동은 대실패로 끝나 굶어죽은 사람이 3천만∼4천만 명에 이르렀다. 이 때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의 후유증 치유를 위해 열린 회의석상에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제시했다. 이 말은 본래 덩샤오핑의 고향 쓰촨성의 속담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의 줄임말이다. ‘흑묘백묘론’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으로, 덩샤오핑의 통치철학이 됐다. 이 말은 덩샤오핑이 집권 다음해인 1979년에 미국을 방문하여 중미수교가 체결된 직후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이 물러나고, 류샤오치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류샤오치는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오쩌둥이 손수 쓴 ‘사령부를 공격하라’는 대자보가 북경대에 등장했다. 대자보는 ‘당내에 마오쩌둥을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 외에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등을 수반으로 하는 또 다른 자산계급 사령부가 있다’고 선동했다. 결론은 혁명으로 이들을 타도하자는 것. 1967년에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규탄하는 대회가 열렸다. 류샤오치는 ‘당내 제1 주자파(走資派)로, 덩샤오핑은 제2 주자파’로 몰려 각각 자신의 집에서 연금 당했다. 이어 마오쩌둥은 홍위병(紅衛兵)으로 불린 학생 집단을 부추겨 자기 자신만을 제외하고, 보호막 뒤에 숨어있는 공산당 지도부를 전복하도록 사주했다. 덩샤오핑은 장시성 난창시에서 3년 반 가까이 유배생활을 했다. 그의 두 번째 실각이다. 마오쩌둥의 지위를 위협한 류샤오치는 하남성 개봉(開封)으로 유배되어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었다.
 
덩샤오핑이 2차 실각에서 벗어나게 된 과정은 흥미롭다. 공산당 헌법에 마오쩌둥 후계자로 명기된 린뱌오(林彪)가 급히 권력을 빼앗으려고 1971년에 마오쩌둥을 살해하려다 미수로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범행이 발각되자 린뱌오는 비행기를 타고 도망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유배 중이던 덩샤오핑은 1972년에 린뱌오의 범죄 행위를 알고 몹시 격분하여 마오쩌둥에게 자기의 견해를 편지로 써서 보냈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의 편지를 읽고 1972년 8월 14일에 사면 지시를 내렸다. 덩샤오핑이 2차 실각에서 풀려났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에게 피폐해진 중국 경제를 맡겼다.
 
덩샤오핑은 곧 3차 실각을 당하고 만다. 그 이유는 마오쩌둥이 결정한 ‘신성불가침이라는 원칙’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1976년 1월 8일에 저우언라이가 사망했는데 장례식장에서 조사(弔辭)를 읽은 것을 마지막으로 덩샤오핑의 모습은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3차 실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1976년 9월 9일에 죽은 것이다.
 
마오쩌둥 사후 4인방과 덩샤오핑 간에 권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국방장관 예젠잉이 이끄는 쿠데타의 도움으로 덩샤오핑은 4인방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덩샤오핑은 드디어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권력을 잡았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가 열렸다.
 
덩샤오핑,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리콴유로부터 시장경제를 배우다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에 권력을 잡기 직전 4인방과 피 말리는 권력투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중국을 변화시키고자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적 경제개발 프로그램을 리콴유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둘러본 덩샤오핑은 리콴유가 이룩한 성과를 극찬했다. 이를 놓고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중국은 우리가 과거에 그들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덩샤오핑이 1970년대에 싱가포르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서구의 다국적기업들이 진출하여 창조해놓은 부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덩샤오핑은 아마도 빗장을 열지 않았을 것입니다.” 리콴유는 또 ‘시장경제의 원리’도 얘기했다고도 썼다.
 
“나는 덩샤오핑에게 공산주의 시스템은 모든 구성원이 자기 자신과 가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고 할 때에만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구성원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그런 때라야만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못 가진 사람들과 가까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시스템을 기반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덩샤오핑은 싱가포르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그는 작은 나라 싱가포르가 이룩한 눈부신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시장경제’이고, 서구의 다국적 기업을 통한 엄청난 해외직접투자 유치의 원동력은 ‘경제개방’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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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시 시내에 있는 덩샤오핑(鄧小平) 초상화. 사진=조선DB
 
 
덩샤오핑의 통치철학은 ‘흑묘백묘론’
 
덩샤오핑은 권력을 잡자마자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덩샤오핑은 시장경제 원리가 바탕이 되는 농가청부제, 개체호, 향진기업 등을 도입하여 농업부문에서 시장경제를 실험했다. 1978년에는 한 때 전쟁을 벌였던 일본과 중일우호조약을 맺고, 1979년 1월에는 미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여 미국으로부터 관세최혜국 지위를 얻어냈다. 이렇게 하여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위한 발판을 갖춰갔다. 이어 농업부문에서 시장경제 실험이 성공하자 개혁개방의 상징인 경제특구를 설치했다. 특구설치는 ‘점 개방→선 개방→면 개방→전방위 개방’ 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은 대외개방이 이뤄졌다.
 
이 결과 중국은 세계의 자본을 ‘블랙홀처럼’ 끌어들였다. 2017년 현재 중국에 유입되어 쌓인 해외직접투자 저량(貯量, stock)은 무려 1조 5천억 달러에 이른다. 이 많은 해외자본이 그동안 중국의 싼 임금, 싼 토지임대료와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결과 중국은 1970년 이후 세계 역사상 최고인 연평균 6.98%에 이르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굶어죽는 나라에서 경제규모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의 통치철학은 ‘흑묘백묘론’이다. ‘흑묘백묘론’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 살게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정계를 떠나 2년이 지난 88세의 덩샤오핑은 1992년 2월에 광둥성, 상하이 등 남부지방을 순회하면서 자신이 도입한 개혁·개방 정책의 결실을 돌아보면서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남겼다. 두 가지를 소개한다.
 
“개혁·개방만이 중국의 유일한 살 길이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 물러나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은 사회주의도 가져다 쓸 수 있는 것들이다.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덩샤오핑은 1970년대 어느 해에 자유주의자 하이에크를 찾아가 중국이 굶어죽지 않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이에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토지를 사유화하십시오.” 덩샤오핑은 하이에크의 답변에서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배웠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젊은 시절 프랑스 유학생활을 통해 자본주의를, 소련으로 옮겨가서 사회주의를 경험했다. 이런 배경 탓에 그는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1992년에 공산당 정식 강령으로 채택했다. 한 마디로, 덩샤오핑은 ‘가난 극복’이라는 비전을 갖고 이를 실현한 정치가다.
 
중국은 현재 세계 1위의 수출국가
 
중국은 덩샤오핑이 개방한 1978년에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3%, 미국은 24.6%로 1위였다. 그러한 중국이 고도성장의 결과 현재는 경제규모 G2로 부상해 있다. 2030년 이전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G1이 되리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1978년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23달러였는데 고도성장의 결과 2016년 7,963달러로 빠르게 증가했다. 중국은 현재 세계 1위의 수출 국가이고, 수출 ‘1위 품목’ 수에서 1,693개로 세계 1위다. 중국은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기업 수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중국 경제의 현주소를 모두 이야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덩샤오핑은 ‘가난 극복’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굶어죽는 나라 중국을 G2로 이끈 정치가다. 이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을 자신의 통치철학으로 삼아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성공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는 ‘시장경제’가 바탕이 되었다. 덩샤오핑은 20세 전후에 프랑스에서 자본주의를,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경험했고, 권력투쟁 와중에도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시장경제의 위력을 확인했다. 덩샤오핑의 통치에 힘입어 중국은 굶어죽는 나라에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덩샤오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우리에게는 이미 시장경제가 자리 잡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거꾸로 가는 경제정책’, 곧 ‘사회주의정책’을 펴서 한국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빠뜨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리 잡고 있는 시장경제가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자리가 창출되고 소득이 증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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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 저 | 북앤피플 | 420쪽 | 2만 3,000원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1941년 광주 출생, 광주제일고‧전남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업. 美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 받음.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미국에서 경제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1979)를 읽고 ‘시장경제’에 빠져들었고, ‘시장경제’ 강의를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교수로 인정받고 있다.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적잖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처리즘: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는 마거릿 대처의 삶과 정치를 연구·정리한 중요한 저작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외에도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갖고, 『좋은 정책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 『성경과 함께 떠나는 시장경제 여행』, 『노동시장 개혁은 슈뢰더처럼, 대처처럼』, 『7인의 위대한 정치가』 등 자유시장경제를 널리 알리기 위한 책들을 30여 권 집필했으며, 지금도 어느 작업실에서 다음 책 집필에 혼신을 쏟고 있다.

등록일 : 2019-04-16 09:35   |  수정일 : 2019-04-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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