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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교수의 가요 이야기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전한 고복수의 타향살이

오디오 1. 고복수가 불렀던 '타향살이'의 원곡 '타향'
오디오 2. 고복수의 대표곡 '짝사랑'

글 |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4-04-11 오전 10:18:00

때로 한 편의 시작품보다 유행가 가사가 더욱 절실한 느낌으로 가슴속에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좀 더 나은 삶을 향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땀 흘리는 인간의 삶은 온갖 힘겨운 부담과 피로가 덧쌓여서 한날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난 시절은 험난했습니다. 봉건왕조의 우울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시점에서 우리 겨레는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새로운 질곡에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그 제국주의는 고무신과 안경, 혹은 석유와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명종(自鳴鐘)의 얼굴로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유혹이자 바닥 모를 늪이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슬금슬금 불안의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삶의 중심과 갈피를 모조리 잃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도 전에 가혹한 수탈과 모진 유린이 시작되었지요. 자고 나면 밝은 아침이 와야 마땅한데 광명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고, 눈앞엔 여전히 고달픈 암흑천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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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고복수의대표가요'타향(타향살이)'
(우) 고복수의대표가요'사막의한'

바로 이 무렵에 고복수(高福壽, 1911∼1972)가 처연한 성음으로 불렀던 <타향살이>와 <사막의 한>은 바로 이러한 세월의 암담함을 상징적으로 빗대어 표현했던 노래였습니다. 두 곡 모두 뛰어난 작사가 김능인(金陵人, 1911∼1937) 선생과 작곡가 손목인(孫牧人, 1913∼1999) 선생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지요. 세상에서는 이 대단한 가요작품을 만들어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달래주었던 훌륭한 작사가, 작곡가, 가수 셋을 일컬어 ‘손금고(孫金高) 트리오’라고 불렀습니다.

가수 고복수는 1912년 경남 울산 하상면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기계국수집을 운영하는 영세한 상인이었습니다. 유달리 음악을 좋아했던 고복수는 교회합창단에 들어가 각종 악기를 익혔고, 뒷동산에 올라가 저물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교사들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을 배웠지요. 이 솜씨를 인정받아서 울산실업중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복수의 나이 18세 때에 경남 울산에서 전국가요콩쿨 예선에 출전하여 뽑혔고, 부산공회당에서 열린 콩쿨대회에서 1등을 하긴 했지만 서울로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가수로서 출세를 꿈꾸던 청년 고복수에겐 이것저것 물불을 가릴 틈이 없었지요. 마침내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장롱에서 60원을 몰래 꺼내어 달아났고, 1933년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서울 본선에서 기어이 2등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고복수의 나이 22세였습니다.
 
 검정두루마기에 하얀 장갑을 끼었던 시골뜨기 청년 고복수의 삶은 이로부터 활짝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콜럼비아사는 웬일인지 고복수에 커다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때 작곡가 손목인이 고복수를 오케레코드사 전속으로 재빨리 인도해서 계약을 맺었는데 쌀 한 가마니에 5원하던 시절에 고복수는 계약금 1.000원, 월급 80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겠습니까?

그리하여 1934년 오케레코드사로 옮겨간 고복수는 자신의 최고출세작이자 우리 민족의 고전적 가요라 할 수 있는 <타향>으로 엄청난 히트를 했고, 잇따라 <사막의 한>이 또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사막의 한>은 경쾌한 템포의 노래이지만 <타향>처럼 망국의 설움을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에 실어서 표현했습니다. 나중에 <타향살이>로 바뀐 노래 <타향> 음반의 또 다른 면에 수록된 노래는 <이원애곡(梨園哀曲)>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한 내용이었지요. 이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은 발매 1개월 만에 무려 5만장이나 팔렸고 단번에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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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의'타향(살이)'가사지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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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걸작집LP음반표지

나날이 인기가 쇄도하자 레코드사에서는 제목을 <타향살이>로 바꾸고 위치도 B면에서 A면으로 옮겨 다시 찍었습니다. 쓸쓸한 애조를 머금은 소박한 목소리, 기교를 섞지 않는 창법이 고복수 성음의 특징이었습니다. <타향살이>는 한국가요의 본격적 황금기를 개막시킨 첫 번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만주 하얼빈(哈爾賓) 공연이나 북간도 용정(龍井) 공연에서는 가수와 청중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르다 기어이 통곡의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공연 전에 이 노래에 대한 소식을 결코 알려준 적이 없었지만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조용히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고복수는 청중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의해 4절이나 되는 이 노래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불렀다고 하니 그날 극장의 뜨거웠던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용정공연이 끝난 뒤에 무대 뒤로 고복수를 찾아온 30대중반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부산이 고향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고향집 주소를 적어주면서 혹시라도 부산 쪽 공연을 갈 일이 있을 때 부모님께 자신의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고복수에게 타향살이의 애끓는 신세한탄을 하던 그 여인은 격해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비통한 소식을 들은 고복수는 자신이 마치 그 여인을 죽음터로 몰아넣은 듯한 죄책감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옆에서 고복수의 어깨를 안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서 가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성심성의껏 <타향살이>를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날의 공연은 가수와 관객들이 하나가 되어서 혼연일체(渾然一體)의 눈물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케레코드사의 이철(李哲, 1903∼1944) 사장은 무려 2.000원이란 거금을 전속축하 격려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당시 소학교 교사의 월급이 42원이었으니, 이 규모는 참 대단한 액수라 하겠습니다. 고복수는 이 돈을 들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려 울면서 너그러운 용서를 빌었습니다. 돈을 훔쳐 달아난 아들에게 괘씸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지만 고복수의 부친은 가수로 크게 성공해 돌아온 아들이 내심 너무나 흐뭇했습니다. 광대의 길을 선택하겠다면 아예 부자간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노여움을 표시했던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특별히 송아지를 잡아서 아들을 격려하고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날의 광경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흥겨웠던 모꼬지였을까요?  

고복수의 대표곡들로는 <휘파람>, <그리운 옛날>, <불망곡>, <꿈길천리>, <짝사랑>, <풍년송>, <고향은 눈물이냐> 등입니다.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고토와 민족의 근원을 다룬 내용들입니다.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도 원래는 <갈매기 항구>란 노래로 고복수 취입예정이었는데, 흔쾌히 이난영(李蘭暎, 1916∼1965)에게 양보를 해서 만들어진 가요곡입니다. 만약 <목포의 눈물>을 고복수가 불렀다면 어떤 효과가 나왔을까요? 이난영 만큼의 폭발력은 기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한자말 물각유주(物各有主)의 깊은 뜻처럼 노래도 물건도 제각기 임자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짝사랑>에 등장하는 노랫말 ‘으악새’는 억새라는 식물인지 왁새라는 이름의 조류인지 한때 세간에서 흥미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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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의대표가요'짝사랑'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아 단풍이 휘날리오니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穹蒼)을 헤매이는 서리 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 후유 한숨집니다
 
-<짝사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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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황금심부부

 고복수는 빅타가극단의 인기가수 황금심(黃琴心, 1912∼2001)과 사랑의 불이 붙어 마침내 부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복수의 나이는 31세, 황금심은 불과 19세였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았던 부부는 항상 다정하고 애틋한 부부애를 과시하며 살았지만 삶의 불운과 고통은 자꾸만 겹쳐졌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온갖 고생을 이겨낸 고복수 황금심 부부는 여러 험한 일들을 헤치며 혹독한 시련과 고달픔을 이겨내었습니다.
 
가수 고복수의 삶은 어쩐 일인지 액운과 불행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에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평남 순천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던 일, 악극단경영과 운수회사의 잇따른 실패는 늙은 가수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지치도록 했습니다. 기어이 싸구려 해적판 전집물(全集物)을 들고 도서외판원이 되어서 서울시내 다방을 전전하며 “저 왕년에 <타향살이>를 불렀던 가수 고복수입니다”라면서 그 특유의 눈물 섞인 목소리를 내었던 슬픈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늙은 가수는 1955년 8월8일 서울 명동의 시공관(市公館)에서 열린 고복수 은퇴공연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수생활 26년 만에 얻은 것은 눈물이요, 받은 것은 설움이외다” 당시 우리의 척박했던 문화적 토양과 환경은 이처럼 훌륭했던 민족가수 한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택시회사도 운영했고, 영화제작에도 손을 대었으며, 음악학원도 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업이 순조롭게 펴나지 못했습니다. 고복수가 운영했던 동화음악학원(同和音樂學院) 시절, <동백아가씨>의 가수 이미자(李美子)와 <대전부르스>의 가수 안정애(安貞愛)를 배출시킨 것은 하나의 커다란 업적이자 성과라 하겠습니다.

<타향살이>로 민족의 대표가수가 된 고복수는 작곡가 손목인에게 평생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고복수는 병상으로 문병 온 손목인에게 “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하고 흐느끼며 껴안고 울었습니다. 가수 고복수는 1972년, 그의 나이 회갑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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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고복수은퇴공연신문광고
(우) 고복수은퇴공연을마치고가요계선후배들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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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고복수의 근영
(오) 고복수노래비(울산시소재)
1991년, 고복수의 고향 울산에서 제4회 고복수가요제가 열리던 날, 울산의 북정동 동헌(東軒) 앞에서 ‘고복수노래비’가 제막되었습니다. 노래비에는 대표곡 <타향살이>의 전문이 새겨져 있었고, 고복수 특유의 그 슬픔을 머금은 애잔한 목소리가 한 마리 나비나래처럼 파들파들 떨면서 가수의 고향하늘로 울려 퍼졌습니다. 

오늘은 고복수의 이처럼 고단했던 생애를 생각하며 한국가요사에서 이젠 불후의 고전적 명곡이 된 <타향살이>의 애잔한 곡조를 여러분과 함께 흥얼거려 봅니다. 1927년까지 만주로 쫓겨 간 이 땅의 농민들은 무려 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관서관북(關西關北) 지역의 험준한 산악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1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한국근대사의 처참했던 역사적 사연과 배경, 그리고 상처와 고통들을 생각하면서 <타향살이>를 잔잔히 불러보면 어떨까 합니다. 다정한 친구와 더불어 한 잔 술이 앞에 놓여있다면 더 좋겠지요? 옛 노래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읊조리듯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가요해설가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시집 <물의 노래> <발견의 기쁨> <묵호> 등 14권 발간.
가요에세이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등 각종 저서 50여권 발간.
신동엽창작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경북문화상, 금복문화상 등을 받음.
대구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 프로의 MC로 활동.
현재 미국 워싱턴DC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 라디오에서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 프로를 매주 전화녹음으로 방송 중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전국회장
현재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등록일 : 2014-04-11 오전 10:18:00   |  수정일 : 2014-04-1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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