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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교수의 가요 이야기

최고의 신민요 가수-김복희

참고: 아래 오디오 파일 중 첫번째는 '애상곡', 두번째는 함경도 아가씨임.

글 |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4-02-22 11:01

인기(popularity)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에 쏠리는 대중의 높은 관심이나 좋아하는 기운입니다. 인기에만 의존해서 오로지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가수와 배우들입니다. 아무리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스타라 하더라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덧없는 실바람이나 물거품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줄곧 다루고 있는 한국근대의 대표적인 가수들이 살아갔던 삶의 경과를 살펴보노라면 이러한 인기의 본체를 실감하게 됩니다.
 
인기의 상승은 독이요, 인기의 하강은 조바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가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지고 난 뒤 그 허탈감을 참지 못해서 삶을 비관하거나 절망에 빠져서 마약, 혹은 자살의 방법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인기란 품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인기가 높았건 낮았건 간에 비정한 세월은 모든 내용을 허무의 세계로 완전히 매몰시켜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1930년대 빅타레코드사가 간판 격으로 자랑하던 가수 김복희(金福姬, 1917∼?)의 경우도 바로 이 허무의 기슭에 매몰된 대중음악인으로 여겨집니다.

김복희의 생애는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구체적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나 다만 가수 자신의 인터뷰와 구술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 1917년 평남 안주 입석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12세에 부친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가정형편이 몹시 곤궁해지자 김복희의 어머니는 가족들과 평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복희는 동생의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평양의 그 유명한 기성권번으로 들어가 기생수업을 받고 기생노릇을 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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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기생학교 시절의 김복희

연광정을 지나 채관리(釵貫里)라는 곳에 세워져 있던 평양의 기생학교에는 화초병풍을 두른 방안에서 약 200여명의 어린 기생아씨들이 승무와 검무, 국악기 연주, 가창을 연습하는 소리가 담 밖으로 낭랑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김복희가 다니던 평양기생학교에는 선우일선(鮮于一扇)이 동갑나기 친구로 둘이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선배 왕수복(王壽福)이 이미 가요계로 데뷔해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친구 선우일선도 폴리돌레코드사로 불려가 인기가수가 되었던 시절이라 김복희의 경우도 은근히 그런 기대를 가슴속에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지요. 김복희의 나이 17세가 되던 1934년, 서울의 빅타레코드사 문예부장 이기세(李基世, 1889∼1945)의 집에 가 있던 평양기생 곽향란(郭香蘭)이 이기세에게 김복희의 뛰어난 가창능력을 추천했고, 이기세는 직원을 보내어 곧장 서울로 불러왔습니다.

이기세가 시험해본 김복희의 가창능력은 그 솜씨가 과연 부족함이 없었을 뿐더러 파르르 떠는 발성의 울림에서 기묘하게도 슬픈 여운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이기세는 시인 이하윤과 작곡가 전수린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어린 기생 김복희의 첫 음반이 반드시 성공리듬을 탈 수 있도록 신신당부했습니다.
 
이런 전후사정이 1935년 잡지 <삼천리>지에 실린 글 ‘거리의 꾀꼬리인 십대가수를 내보낸 작사 작곡가의 고심기’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전수린이 김복희의 첫 작품 <애상곡(哀傷曲)>에 대한 작곡을 먼저 했고, 가사는 작곡을 완료한 뒤에 시인 이하윤에게 의뢰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작곡가 전수린의 회고를 들어보시지요.
 
‘김복희의 <애상곡>은 실로 나의 고심을 짜낸 것입니다. 처음에 김복희가 노래를 우리 회사에 와서 부르는 데 그 노래를 들음에 그 몸집같이 휘청휘청 마치 능라도 수양버들 같아서 그만 그 목청조차 몸 스타일에 따른 듯 하겠지요. 그래서 그 성대를 들음에 간드러지고 늘어지고 흔들리는 것이 애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서 이 멜로디에 맞는 곡조를 지어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김복희의 노래와 맞춰보니 아주 적당하다고 보아서 내가 처음 뜻을 발표해 보았으나 되지 않고 해서 마침 이하윤 씨에게 작사를 청한 것입니다. 그 늘어진 곡은 조선의 정조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이 <애상곡>에 있어 그 처분처분 넘어가는 것을 대중이 퍽 좋아한 모양입니다마는 나로서는 나의 힘이 부족했더라도 장차 김복희가 불러낼 노래에는 더욱 그 묘한 점을 완전히 발표할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김복희의 첫 작품인 <애상곡> 가사를 맡았던 시인 이하윤은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순서인즉 작사도 먼저 되고 그 다음 작곡이 되고 그 후에 노래를 불러 주어야 옳을 터인데 이 <애상곡>은 아주 거꾸로 되었지요. 김복희의 목청을 듣고 거기에 맞을 곡을 지어주면서 이러이러한 의미에서 했으면 좋을듯하다고 하기에 내 생각해보아야 아무래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첫째 김복희가 입사해서 세상에 처음 알리는 것인 만큼 독특한 것을 내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구슬프게 가장 애상적인 그 목소리를 배합해서 짓노라고 매우 힘이 든 것이외다.
 
그 목소리는 보통의 목청이 아니고 갈피갈피의 눈물과 한숨이 섞인 듯 연약한 여자가 달빛아래 홀로 서서 검푸른 못을 들여다보는 그 미묘 신비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 날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작사한 것이나, 이것을 김복희의 목에 맞춰 몇 번이나 수정했던지 사실 나로서 힘든 작사의 하나이외다.
 
그래서 연습을 마치고 취입해서 테스트 판을 듣고 좋다고 해서 거리거리 악기점에서 구슬프게 빼는 <애상곡>은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김복희는 자기의 묘성(妙聲)을 완전히 아직은 발해보지 못한 줄로 압니다. 그 목소리에 알지 못할 깊은 점은 언제나 풀릴 런지 앞으로 나올 것을 주목치 않을 수 없습니다.’
 
평양기생출신 가수 김복희의 첫 데뷔 작품 <애상곡>의 노래는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김복희의 음색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내지르는 가운뎃소리를 중심으로, 그 소리를 다시 한 맺힌 슬픔으로 비비며 껴안는 또 다른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나부기는 버들가지 같기도 하고, 가을날 적막한 숲에서 혼자 지저귀는 꾀꼬리의 하염없는 흐느낌 같기도 합니다.
 
어린 기생의 가창(歌唱)에서 어찌 이렇듯 한과 슬픔과 삶의 고뇌가 함께 어우러진 깊은 배합의 울림이 빚어져 나오는 것일까요? 당시 언론에서는 김복희 가창의 특색을 ‘북국적인 침착과 풍부한 성량’으로 손꼽았습니다. 빅타레코드사에서는 인기가 높고 음반판매량이 많은 김복희를 ‘금간판’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김복희의 노래는 출반되자마자 장안의 큰 화제와 인기를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지식인 계층에서 김복희의 노래에 깊이 몰입된 가요팬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김해송과 혼성듀엣으로 불렀던 노래 <명랑한 양주>란 노래는 장안의 화제를 모았습니다.
 
얼굴이 고와서 계집입디까
조밥에 된장을 먹으면 어때
아들 딸 잘 낳고 바느질 잘 하는
그러한 여자가 실상 좋더군
 
덩치만 크다고 사내랍디까
땅딸보 몸집에 곰보면 어때
소리나 잘 하고 마음도 구수한
그러한 사나이가 한결 좋더군
 
입성을 잘 입어 마누랍디까
속세배 치마를 입으면 어때
봉자질 잘 하고 마전질 잘 하는
그러한 여인네가 마냥 좋더군
 
-<명랑한 양주> 전문
 
배우와 가수를 겸했던 복혜숙의 평에 의하면 김복희는 미인형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 김복희는 재색을 겸비하고 성음이 뛰어난 기생출신 가수로 보이며 마침내 인기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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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 빅타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어서 이후 5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려 87편의 가요곡을 발표합니다. 그러다가 김복희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인 1939년 4월에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기었고, 포리도루에서는 5개월 동안 11편의 가요곡을 발표하다가 이후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면서 잊어진 가수가 되었습니다. 가수로서 마지막 발표곡은 포리도루에서 1939년 10월에 발표한 <엇저면 그럿탐>으로 확인이 됩니다. 가요계에서 가수로 활동했던 시간은 도합 5년가량입니다.

김복희 노래의 특색은 <하로밤 매진 정>, <날 다려가오>, <탄식하는 술잔>, <연지의 그늘>, <농속에 든 새> 따위에서도 느껴지는 바와 같이 삶의 고통 속에서 헤매는 기생의 하소연과 탄식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음정이 환하고 성량이 크게 느껴지지만 한편 부드러운 맛이 있어서 그에게는 무슨 곡조를 주더라도 실패가 적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김복희 노래를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신민요(민요)가 21편, 속요 1편, 주제가 1편, 째즈쏭 1편, 기타 모두는 유행가 장르에 속합니다.
기생학교 시절에 갈고 닦은 성음인지라 역시 신민요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다음 노래는 김복희가 발표한 신민요 <함경도 아가씨>입니다,
 
명사십리 단두바위에 석굴 따는 아가씨야
신고산이 우루 우루루 멋들어진 콧노래에
갈매기도 흥에 겨워 닐리리야 춤추누나
해당화는 시들지라도 아가씨는 늙지 마오
 
길주명천 두메산골에 베를 짜는 아가씨야
치마 춤에 멀구 다래는 누굴 주려 감췄느냐
싱글싱글 웃음 주는 떠꺼머리총각에게
물그릇은 줄 지라도요 손목을랑 조심하오
 
삼수갑산 주막거리에 그네 뛰는 아가씨야
치렁치렁 드린 머리채 갑사댕기 풀어질라
민며느리 삼년 석 달 울고 오던 큰 애기도
아리아리 살금 내 주리 스리스리 바람났소
 
-<함경도 아가씨> 전문
 
박화산 작시, 이기영 작곡으로 1939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북관지역(北關地域)의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바닷가에서 굴 따는 처녀, 산촌에서 길쌈하는 처녀, 농촌마을에서 그네 뛰는 아가씨를 표상으로 하여 한국인의 전통적 삶과 아름다운 생활풍속을 정겨움과 사랑스러움이 듬뿍 느껴지는 필치의 분위기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너무도 생기로운 북방정서(北方情緖)를 이 노래에서 경험해볼 수 있지요. 이보다 4년 앞서 발표되었던 신민요 <제주아가씨>도 <함경도 아가씨>와 유사한 내용입니다. 제주도를 테마로 한 노래로서는 매우 희귀한 초창기 작품으로 기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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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의 노래 '내 고향 칠백리' 가사지

김복희 노래에 가사를 보내준 작사자는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명단을 보면 이하윤, 김벽호, 이고범, 조영출, 전수린, 김동운, 유도순, 이현경, 이하윤, 강남월, 오관자, 고파영, 김팔련(김동환), 고마부, 홍희명, 박화산, 유춘수, 김포몽, 이부풍, 조벽운, 김송파, 강해인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 고마부의 노랫말이 9편, 박화산, 고파영이 각 4편입니다. 함께 활동했던 작곡가로는 전수린, 김교성, 김준영, 나소운(홍난파), 탁성록, 김저석, 김면균, 형석기, 문호월, 이기영, 최상근, 고창근 등과 일본인 세전의승, 좌좌목준일 등이 확인이 됩니다.
 
이 가운데서 전수린이 15편으로 가장 많고, 나소운, 즉 홍난파의 작품이 7편, 일본인 작곡가 좌좌목준일이 5편입니다. 듀엣으로 함께 노래를 불렀던 가수로는 이규남, 김교성, 손금홍, 이복본, 김해송, 이훈식 등으로 도합 11곡의 듀엣곡 중 이규남과 4편, 이복본과 2편을 불렀습니다. 특이한 것은 작곡가 김교성과 듀엣곡을 취입한 음반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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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의 김복희
 
김복희가 가수로 활동하던 전성기에 세간의 평은 대체로 양호합니다. 1936년 7월5일자 매일신보에도 김복희 특집 인터뷰 기사가 발표되었고, 대중잡지 <삼천리>에는 김복희 관련 기사가 여러 차례 발표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복희가 가수활동을 하면서 평양의 기성권번 소속 기생을 겸했다는 사실입니다. <삼천리> 취재기사에 의하면 김복희는 평양 경재리 18번지에 하얀 사기로 제작한 ‘김복희’ 문패까지 붙어있는 별채에 살면서 단골고객들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김복희의 특별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대중적 무대에 단골로 초청을 받았던 경과를 볼 수 있습니다. 1935년 3월5일 평양 금천대좌(金千代座)에서 열린 평양축구단후원회주최 “각레코드사 연합 유행가 실연의 밤”에 30명 가수가 한 무대에 출연할 때 김복희는 빅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가수로 유일하게 참가했습니다.
 
김복희가 출연하는 한 무대의 안내문에는 ‘레코드로만 듣고 그 미성에 취하든 김복희 팬들에게는 이번이야말로 스테지 우에서 부르는 그 득의의 <애상곡>을 들을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사뭇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김복희의 가장 대표곡으로 평가되는 노래 <애상곡>의 선율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날 저무는 바닷가에 희미한 저 별
괴로운 꿈 모두 잊고 따라서 가리
노래 불러 밤을 새던 정든 포구여
사랑하는 님을 두고 홀로 떠나네
별을 따라 나는 가네 내 사랑아
잘 있거라 나는 가네 님을 두고 가네
 
가는 나를 잡지 마라 다시 올 것을
젖은 소매 뿌리치는 가슴만 쓰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묻지를 마라
몸은 가도 사랑만은 두고 떠나네
별을 따라 나는 가네 내 사랑아
잘 있거라 나는 가네 님을 두고 가네

-<애상곡> 전문
 
경성방송국(JODK) 라디오 프로에도 자주 출연해서 자신의 대표곡들을 불렀던 신문기사가 획인이 됩니다. 이처럼 평양에서 서울로 자주 왕래할 때에는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1935년 <삼천리>지가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김복희는 왕수복,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에 이어서 5위의 자리에 오릅니다. 레코드의 양은 늘고 질은 떨어진다는 언론의 비판이 쏟아질 때에도 김복희의 노래가 지닌 품격만큼은 예외로 칭찬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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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이후의 김복희
 
“순정을 노래하는 북국의 가인(歌人), 비행기 원정(遠征)의 김복희” 이처럼 성대한 소개문구로 존재를 과시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가수 김복희는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불과 5개월 동안만 활동 한 뒤 젊은 후배가수들에게 존재가 가려져 빛을 못 보게 되자 주저 없이 가요계를 떠났습니다. 은퇴한 뒤에는 조용한 노후를 보낸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1960년대에는 동아방송에 잠시 출연했던 기록이 보이고, 1990년대 초반에는 서울에서 가톨릭교회 신자로 여생을 보낸다는 증언을 듣기도 했으나 이제는 1930년대 빅타레코드사 대표가수였던 김복희의 이름마저 제대로 기억하는 이조차 없습니다. 바람찬 망각의 언덕에 쓸쓸히 묻혀 있는 왕년의 화려했던 한 가인을 생각해봅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가요해설가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시집 <물의 노래> <발견의 기쁨> <묵호> 등 14권 발간.
가요에세이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등 각종 저서 50여권 발간.
신동엽창작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경북문화상, 금복문화상 등을 받음.
대구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 프로의 MC로 활동.
현재 미국 워싱턴DC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 라디오에서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 프로를 매주 전화녹음으로 방송 중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전국회장
현재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등록일 : 2014-02-22 11:01   |  수정일 : 2014-02-2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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