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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교수의 가요 이야기

식민지와 분단의 쓰나미에 쓸려간 가수 김선초

북한 인민들, “영화는 문예봉, 무용은 최승희, 연극은 김선초”

글 |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4-01-05 15:33

서핑(surfing)이란 스포츠가 있지요. 타원형 널빤지를 타고 해안으로 밀려오는 높은 파도의 위나 안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즐기는 운동입니다. 가수 김선초(金仙草, 1910∼?)가 살아갔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바로 그녀의 삶 자체가 파도타기의 연속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도 민족사의 참으로 거칠었던 대파란(大波瀾)의 연속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엄청난 충격을 요리조리 운수 좋게 피해가다가 기어이 그 격류에 휘말려 깊은 바다 속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한 선수의 불행한 결말을 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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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선초는 동해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닐 때 원산기독교예배당을 다니며 독창과 찬양대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때부터 주변에서 이미 손색없는 성악가란 소리를 들었지요. 그 말에 의기가 오른 김선초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 서울로 가려는 뜻을 밝혔지만 부모는 한사코 거절하며 만류했습니다.
 
특히 완고한 어머니는 “그저 여자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것이 제일이란다”라며 대문 밖을 못 나가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김선초는 16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로 여러 해 동안 너무 갑갑했던 나머지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서 아버지를 졸라 원산의 루씨여고(樓氏女高)에 진학했습니다.
 
재학 중에도 여전히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돌연히 망하게 되자 김선초는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선초는 어느 날 보따리를 싸서 무작정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서울이었고, 극작가 홍해성(洪海星) 선생이 주도하던 극예술연구회의 신무대였습니다. 신무대에서 배우로 입단하여 연기수업에 전념했습니다.
 
신흥극단에 연구생으로 들어갈 때는 김선영(金鮮英)과 함께 입단했지요. 1930년 11월11일 저녁 7시,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된 신흥극장 창단작품으로 발표된 영화 <모란등기(牧丹登記)>에 당시의 유명배우 심영, 박제행, 석금성, 강석연, 강석제, 김연실 등과 함께 출연했습니다.
 
이어서 임서방(任曙昉)이 이끌던 예술좌에 들어가 전국을 순회공연하면서 연기자로서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나중에 김선초는 이 무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은 홍해성과 임서방 두 분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김선초는 연기수업에 전념하는 틈틈이 극단의 기악부 연주자들로부터 음악수업을 받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스럽게 무대메뉴로 이어져 연극공연 사이사이의 공백시간에 출연하는 막간가수로서 인기를 얻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의 극단운영과 현실은 참으로 영세하고 생명 또한 짧았던 것 같습니다. 새로 극단이 꾸려졌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어느 틈에 바람처럼 사라진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김선초가 참가했던 극단 신무대, 예술좌, 토월회, 신흥극장, 명일극장, 태양극장, 동양극장, 아랑, 중외극장의 미나토좌 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 극단들에서 김선초가 맡은 역할은 배우로서 연극작품의 배역과 막간가수(幕間歌手)로서 무대에 오르는 일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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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초 방송출연 광고기사
배우보다도 막간가수로서의 인기가 점점 드높아가던 무렵에 콜럼비아레코드사로부터 전속 제의가 왔고 김선초는 이를 감격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김선초가 정식가수로서 데뷔음반을 발표한 1931년입니다. 그 음반에 수록된 작품은 유행소곡 <애달픈 밤>과 <안해의 무덤> 등 두 곡입니다. 유명변사이자 대중연예인이었던 김서정(金曙汀, 본명 김영환)이 작사 작곡을 맡았습니다. 드디어 당당하게 인정받는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콜럼비아레코드사를 통해서 김선초는 무려 68편이 넘는 음반을 발매하게 됩니다. 김선초가 전 생애를 통해 남기고 있는 음반은 77편 가량입니다. 콜럼비아 이외에는 이글, 시에론, 빅타사에서 소수의 음반을 내고 있지만 오로지 콜럼비아사가 김선초의 주된 터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선초 음반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가요곡이 56편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넌센스 등이 21편입니다.
 
가요의 종류로는 유행소곡, 유행가, 민요, 유행만곡, 가요곡으로 붙은 명칭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유행소곡이란 이름은 1933년 4월까지만 사용됩니다. 김선초의 대표곡은 데뷔곡을 포함하여 <님 그리운 밤>, <꼴불견>, <울산 큰 애기>, <긴 한숨>, <수집은 꿈>, <진달래의 애심곡(哀心曲)>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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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초 '진달래애심곡' 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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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초의 '강남을 가자' 가사지

1930년대의 대표가수 김선초 음반제작에 함께 했던 작사가로는 김서정, 홍로작, 학수봉, 이고범, 춘오일, 박한, 유파, 유도순, 이일해, 이백수, 김잔듸, 김안서, 이하윤, 전기현 등입니다. 작곡가로는 김서정, 고하정남, 삼전양조, 인목타희웅, 학수봉, 이광덕, 서영덕, 송정, 일호, 광원, 유파, 유일, 김준영, 전기현, 김흥산, 이면상, 안일파, 콜럼비아문예부 등입니다. 당대 최고의 작사가, 작곡가들이 김선초 음반발매를 위해 도왔습니다. 김선초와 함께 혼성듀엣을 부른 가수로는 역시 당대 최고란 평을 받았던 채규엽과 김문규가 있습니다.
 
대중예술가 김선초의 출발이 배우였던 만큼 그녀의 음반 중에는 역시 연극, 영화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가극, 희극, 희가극, 화류애화, 아동비극, 아동비화가 각 1편씩이요, 오늘날의 개그나 만담, 코미디에 해당하는 넌센스 장르가 11편입니다. 이것은 이애리수, 강석연, 이경설, 김연실 등과 마찬가지로 배우출신 경력이 적극 활용된 결과입니다. 이 계열에 속하는 음반으로는 <레코드카페>, <꼴불견전집>, <멍텅구리 서울구경>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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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초 가요공연의 밤

 인기가수로서, 그리고 방송국 라디오프로의 단골출연 등으로 대중적 인기가 한껏 높아진 김선초는 전국 어딜 가나 박수갈채와 환호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대형무대를 비롯하여 부산, 인천, 평양, 대구, 청주, 진주, 광주, 신의주 등 지방공연 무대에서 김선초가 출연하면 일천 명 관객이 넘는 장내는 거의 떠나갈 듯했다고 합니다. 워낙 인기가 높아서 시에론레코드사에서는 김선초 음반을 내고 싶은 욕심에 몰래 가수와 협약을 맺어 본명을 감추고 ‘미스.조선’이란 예명으로 두 장의 앨범을 발매했었는데, 한 가수의 두 레코드사 동시발매를 둘러싸고 시에론측은 콜럼비아와 심각한 분쟁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김선초 노래 가운데서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작품은 유행만곡으로 만들어진 <꼴불견>이 아닌가 합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초반 식민지사회의 무관심과 비인간적인 세태와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유행만곡은 만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콜럼비아 문예부에서 작곡을 맡았고, 채규엽과 김문규 두 남성가수와 함께 혼성으로 김선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방갓 쓰고 자전거탄 꼴불견, 쪽진 머리에 일본식 게다를 신은 꼴불견, 갓망건을 친 머리에 일본식 지까다비 신발을 신은 꼴불견 등등 온갖 꼴불견들이 속속 적출이 됩니다. 식민지적 근대의 속성과 허위위식이 그대로 느껴져 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30년대 초반에도 머리에 쪽진 부유층 여인이 골프채를 들고 다니는 광경입니다. 그러고 보니 한반도에서 골프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 꽤 오래되었군요.  
 
꼴불견 꼴불견 꼴불견 꼴불견
가지각색 이상야릇 꼴불견
여:어쨌든지 꼴불견은 남자에게 많구요
남:천만에 꼴불견은 여자에게도 많지
방갓 쓰고 자전거 타야 꼴불견인가
쪽진 머리 게다를 신어야 꼴불견인가
갓망건 아래 지까다비 신어야 격인가
선도부인 단장입고 다녀야 이쁜가
꼴불견 꼴불견 꼴불견 꼴불견
가지각색 이상야릇 꼴불견

양산허리 놔두고 묶어야 꼴불견인가
양복쟁이 바지에 다님을 써야 실순가
밤중에 양산 받쳐 들고 다녀야 실순가
중산모 쓰고 모자 집에 들어야 실순가
꼴불견 꼴불견 꼴불견 꼴불견
가지각색 이상야릇 꼴불견

가슴 짝짝 카페로 가야만 꼴불견인가
쪽진 여자 골프채 들어야 꼴불견인가
연미복입고 당나귀를 타야만 격인가
아서라 고만 둬라 너도 꼴불견 왜 하나
꼴불견 꼴불견 꼴불견 꼴불견
가지각색 이상야릇 꼴불견
-<꼴불견> 전문
 
최고인기가수로서 명성이 높았던 1933년 10월5일, 김선초는 서울 장곡천정 경성부 사회관에서 윤백남(尹白南, 1888∼1954)의 주례로 당시 유명한 프로문사이자 영화제작에 관계하던 서광제(徐光霽, 1906∼?)와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1935년에는 시인 김동환(金東煥)이 운영하던 잡지 <삼천리>사에서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김선초는 8위에 올랐습니다. 비록 순위가 상위에 오르진 못했지만 당시 김선초 음반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 것인가를 말해주는 생생한 자료입니다.
 
이후 김선초는 각종 대표적인 음악회 공연과 경성방송국의 여러 라디오프로, 이따금 펼쳐지는 극단의 연극공연, 영화 따위에 열정적이고도 화려한 출연을 계속 펼쳐갑니다. 1938년에는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차홍녀, 황철, 김동규 등과 함께 출연해서 시어머니역을 맡았습니다. 홍도 역에는 그 유명한 차홍녀, 남편 역에는 김동규가 배정되었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녹음이 실패하는 바람에 결국 연속흥행을 이어가지 못한 채 이후 동양극장이 문을 닫는 계기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제 말에는 국민연극경연대회, 전선(全鮮)가요무용경연대회, 조선연극협회 주최 연극경연대회, 군국영화 <조선해협(朝鮮海峽)> 출연 등으로 다수의 상을 받거나 군국체제를 위해 적극 활동하게 되는데, 이는 김선초의 생애에서 커다란 오점이자 얼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김선초는 과거의 극단동료들과 함께 재빨리 조선연극동맹서울지부를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로당결성을 축하하는 연극작품 <하곡(夏穀)>(함세덕 작, 안일영 연출)을 공연하고, 문화공작단 간부로 충청남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태백산맥>, <미스터 방> 등 좌파적 성향의 연극공연 활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로로 김선초는 1948년 8월25일 남한지역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됩니다. 그녀의 나이 불과 30대 후반의 일입니다.
 
김선초가 불렀던 가요작품들을 살펴보면 현실에 대한 풍자성이 강한 노래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에 소개하는 <무심>은 봉건적 굴레와 속박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여성성에 대한 탄식과 불만을 다룬 노래는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김선초는 이 땅에서 여성들이 처한 불리한 조건과 환경에 대해서 자주 비판하고 노여워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사회주의적 의식이 점점 확장되어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고 보니 움막은 내 살림이라
열여덟은 꿈속에 해가 저물고
울긋불긋 봄꽃도 모두 지건만
중매 녀석 이렇단 말도 없구려

바람이라 구름을 따라 들으랴
서방이라 잡놈을 따라 갔더니
매일 장취 서방은 술만 처먹고
손길 잡고 가는 곳 내 집이구려

오다가다 새들은 남게서 자고
높은 영은 구름도 쉬어 넘건만
맑은 하늘 푸른 물 이 넓은 땅에
이 내 몸은 쉴 곳이 하나 없구려
-<무심> 전문


남한에서 공산당활동이 금지되자 김선초는 1949년 이면상, 채규엽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부부가 같이 월북했지만 북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월북 이후에도 김선초는 김일성 정권 초기에 모범적 공산주의 연기자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북한의 인민들도 “영화는 문예봉(文藝峰), 무용은 최승희(崔承姬), 연극은 김선초”란 말을 즐겨 썼다고 합니다.
 
6.25가 발발하고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 김선초는 점령지 서울에 인민군 복장으로 나타나 시공관에서 연극공연에 참가했습니다. 여기서 고향 아우이자 예술좌 후배였던 신카나리아를 만나 북으로 가자고 제의했지만 이를 거절한 신카나리아에게 혹독한 보복을 안겼습니다. 1950년대 중반, 김선초는 평양에서 기독교 감리교 계열의 목사였던 홍기주(洪箕疇)의 후처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김선초 생애의 마지막 선택이었고 그것이 불행의 나락이었음을 누가 알았으리오. 홍기주는 이미 목사로서 김일성 정권수립을 위해 혈안이 된 사람이었는데,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이라는 고위직까지 오른 그는 연안파를 몰아낼 때 남로당계열로 월북해온 자신의 아내마저도 냉혹하게 숙청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가련한 김선초의 이름은 북한의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자신이 불렀던 노래가사 <무심>의 마지막 대목처럼 이 넓은 땅에서 그녀가 진정 쉴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식민지와 분단의 모진 쓰나미가 밀려올 때 그 격랑을 아슬아슬 타면서 기회주의적 처신을 노리다 침몰했던 사람이 어디 김선초 하나뿐이겠습니까?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가요해설가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시집 <물의 노래> <발견의 기쁨> <묵호> 등 14권 발간.
가요에세이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등 각종 저서 50여권 발간.
신동엽창작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경북문화상, 금복문화상 등을 받음.
대구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 프로의 MC로 활동.
현재 미국 워싱턴DC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 라디오에서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 프로를 매주 전화녹음으로 방송 중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전국회장
현재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등록일 : 2014-01-05 15:33   |  수정일 : 2014-01-0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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