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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 동국대 연구위원,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진경산수 창시한 적 없어"

‘겸재=진경산수’라는 통설 비판··· "정선에 대한 신격화 중단해야"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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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우리는 조선후기 문화사에서 산수화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에 대해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창시자’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교과서는 물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료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겸재 정선’을 검색하면 곧바로 ‘조선 후기 18∼19세기에 성행했던 진경산수의 대가’, ‘진경시대의 대표적 화가’, ‘진경산수의 대성자’ 등 정선이 곧 진경산수이며, 진경산수가 곧 정선이라는 글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 학설에 반론을 제기한 연구자가 있다.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김병헌 연구위원이 그 주인공. 그는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를 창시하지 않았다”며  “진경산수라는 산수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경시대나 진경문화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김 연구위원은 이 같은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여 《진경시대는 없다》는 제목으로 지난 9월 <조선pub>에 3회에 걸쳐 칼럼으로 연재하였다. 이 칼럼에서 김 연구위원은 ‘겸재=진경산수’라는 기존의 통설에 대해 그러한 등식이 성립된 배경과 그 허구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교과서와 백과사전을 다시 써야 할 정도의 내용이기에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상하리만큼 반응이 없었다. 김병헌 연구위원을 직접 만나서 이 문제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칼럼이 나간 후 어떤 반응이 좀 있었습니까?
“전혀요.”
 
-중요한 문제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왜 반응이 없을까요?
“유명(有名)과 무명(無名)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내용을 봐야 하는데 누가 말했는가를 보는 듯합니다. 그림을 구매하면서 작품성보다는 누가 그렸는가를 보고 사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언론도 조용합니다.
“미술사 연구자들조차 ‘진경(眞景)’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학계의 무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언론조차 이에 대해 조용한 것은 좀 실망스럽습니다.”
 
 ‘진경’인가 아닌가는 관람자의 주관적 판단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요?
“학술 용어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경(實景)과 진경(眞景)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구분이 안 되고, 구분이 안 되니 그게 그것 같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 문제냐는 식이죠.” 
 
-실경과 진경이란 단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실경(實景)은 ‘실재하는 풍경’이라는 뜻으로 산수화의 소재(素材)를 말하는 반면 진경(眞景)은 ‘사진처럼 잘 그린 풍경’이라는 뜻의 비평 용어입니다. 북한산 인수봉을 그려놓고 ‘실경산수’라 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진경산수’라고 할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진경’인가 아닌가는 관람자의 주관적 판단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학술용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진경’이라는 용어가 학술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요?
“진경이라는 용어가 1970년대를 전후해서 미미하게 사용되기는 했지만, ‘겸재=진경산수’라는 등식이 확고하게 성립된 데는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최완수 연구실장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정리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술사 용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최 실장이 제기한 용어에는 대부분 ‘진(眞)’이라는 글자가 들어갑니다. 그림에 있어서 ‘진경산수’, 글씨에 있어서 ‘동국진체(東國眞體)’, 시(詩)에 있어서 ‘진경시(眞景詩)’가 다 그가 창안해 낸 용어입니다. 여기에 유홍준 교수는 논문이나 교과서라는 매체를 통해 공신력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용어임에도 이 두 사람이 워낙 인지도가 높다보니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용은 따져보지도 않고 ‘누가’ 말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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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교과서나 백과사전 등에 "진경산수의 대표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특히 문제 되는 점을 든다면요?
“최 실장은 겸재를 가리켜 ‘진경산수화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 ‘진경산수화법의 창안자’, ‘진경산수화풍의 시조’ 등 모든 미칭은 다 동원해서 찬양했습니다. 또, 유홍준 교수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겸재 정선을 ‘진경산수의 창시자, 개척자, 완성자’라는 글을 실어 아이들에게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에 객관성이라는 엄밀한 잣대가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김 연구위원은 “우선 ‘산수화’와 ‘산수화풍’, ‘산수화법’은 분명히 다른 개념인데도 전혀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하고 또, “산수화에 시조나 창시자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과서에 실렸으니 아이들은 당연히 맞는 내용으로 믿고, 인터넷에서 정선을 검색해도 온통 진경산수나 동국진경이 쏟아지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죠. 그러니 저 같은 무명 학자가 한마디 한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이거죠.”  
 
"‘진경’이란 특정인의 그림에 국한된 용어 아냐"

-그렇다면 ‘실경산수’와 ‘진경산수’는 과연 무엇인지요? 
“우선 두 용어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진경산수라는 말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산수화에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觀念山水)가 있는가 하면, 실재(實在)하는 풍경을 보고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가 있습니다. 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관념산수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실경산수가 미미하나마 차츰 늘어나다가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린 실경산수가 유행합니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등을 필두로 하여 많은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은 겸재의 그림을 보고 ‘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는 찬사를 남겼는데, 여기의 ‘진경’이라는 두 글자를 채용하여 진경산수, 동국진경, 진경시대 등으로 사용하며 학술용어로 굳어졌습니다. 문제는 겸재와 진경산수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세황이 말한 동국진경은 어떤 의미인가요?
“‘조선의 풍경을 진짜처럼 잘 그린 그림’이라는 뜻으로 쓴 겁니다. 흔히 말하는 화찬(畵讚)입니다.”
 
-그럼 보는 사람에 따라 평이 달라질 수도 있겠군요.
“당연합니다. 어떤 이는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를 보고 동국진경이라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화가의 그림을 두고 동국진경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실제로 강세황은 강희언(姜熙彦)의 인왕산도에 쓴 화찬에도 ‘동국진경’이라 했으니까요. 결국 ‘진경’이란 특정인의 그림에 국한된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유치원 아이가 동네 산을 그린 그림을 보고 ‘진경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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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언의 인왕산 그림.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진경산수화를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의 전통을 토대로 발전된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진경산수화가 실경산수화 다음에 등장한 그림이라는 뜻 아닌가요?
“백과사전의 논리라면 관념산수에서 실경산수로, 실경산수에서 진경산수로 발전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최완수 실장이나 유홍준 교수 등이 말하는 진경산수에 대한 개념을 보면 이 서술이 모순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최완수 실장은 진경산수화를 ‘진(眞)짜 있는 경치(景致)를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되고,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 묘사해내는 사진 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된다’고 했어요. 이는 분명히 실경산수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쓴 다른 글에서는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새로운 그림 기법을 창안한 것’, ‘조선에만 있는 조선 고유화법의 창안’이라 하여 ‘기법’ 또는 ‘화법’이라 하였습니다.
 
유홍준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겸재는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寫景) 산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남종화 기법을 수용하여 한 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역시 기법의 변화죠. 최 실장이나 유 교수가 정선이 창안했다고 하는 산수화는 그림의 소재를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에서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남종화 기법을 구사하여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관념산수(소재)→실경산수(소재)→진경산수(기법)으로 발전되었다고 했으니 모순이죠.”   

"겸재에 대한 신격화는 그를 욕보이는 것"
 
-진경산수의 실체는 기법이라고 설명한 다른 자료도 있는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진경산수화에 대해 ‘조선 후기(1700∼1850년)를 통하여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로 정의하고, ‘화풍은 종래의 실경 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畫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한 <테마로 보는 미술>에서는 ‘진경이란 용어 자체가 남종화의 개념이듯이 정선의 진경산수화도 남종화풍을 근간으로 삼았다’고 하여 진경을 남종화와 동일시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소재는 분명 실경인데 기법은 남종화법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기법의 채용이지 소재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진경’이라는 용어는 ‘실경’이라는 뜻에 가까울 뿐 기법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죠. 그러니 실경산수 다음에 등장한 산수화라고 하면 명백한 오류입니다. 기법은 실경산수 내에 포함된 하위개념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십니까?
“간단합니다. 진경산수라는 용어를 기존에 쓰던 실경산수로, 진경산수화풍이나 진경수산화법은 겸재산수화풍과 겸재산수화법으로 바꾸면 간단히 정리 됩니다. 또,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에 유명한 화가로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독창적 기법을 구사하여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산수화 중에 어떤 작품은 표암 강세황으로부터 동국진경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식으로 서술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진경산수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니 진경문화도 모순입니다. 당연히 진경문화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정선에게 진경문화의 주도자요, 개척자, 창시자, 시조라는 허울을 씌워 그를 추앙하면 미술사가 심각한 왜곡의 늪에 빠져드는 겁니다. 특히 겸재를 화성(畵聖)이라는 칭호까지 써가며 신격화하는 것은 도를 넘는 것이죠. 이러한 신격화는 그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모욕이라 생각합니다. 더이상 이런 식으로 겸재를 욕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화가는 그가 남긴 작품으로 평가하면 그만입니다.”  
 
김 연구위원은 따라서 교과서의 진경산수화와 미술사 관련 서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산수화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觀念山水)와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가 유행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작가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등이 있다.
 
겸재 정선은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독창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단원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산수화, 풍속화, 기록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긴 가운데,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의 실경산수를 많이 남겼다.
 
표암 강세황은 원근법과 음영법 등 서양화 기법을 구사하여 영통골입구도와 같은 독창적인 실경산수를 남긴 작가로 알려져 있다. 모두 실경산수를 많이 그렸으나 각자 기법이나 화풍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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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의 영통골입구 그림.

우리 고유 글씨라는 '동국진체'도 실체가 없어

-김 연구위원께서 쓰신 <조선pub> 칼럼 중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서예용어에 대해서도 비판한 게 있는데요.
“네. 그것도 황당하기 짝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최완수 실장은 1986년 한 잡지를 통해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서예용어를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시작이 짧은 한문의 오역(誤譯)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진경산수와는 또 다른 차원의 오류입니다.”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가 없듯이 동국진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뜻인지요.
“동국진체의 문헌적 근거는 옥동(玉洞) 이서(李漵)라는 사람의 행장초(行狀草)에서 시작합니다. 옥동의 후손 이시홍이 고조부의 평생을 정리한 행장초(行狀草)에 ‘동국진체(東國眞體) 실자옥동시(實自玉洞始)’라는 문구를 최완수 실장은 ‘옥동 이서가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 동국진체라 불렀다.’고 했습니다. 명백한 오역입니다. 지극히 초보적인 문장인데 정말 뜻을 몰랐는지, 아니면 뜻을 알고도 왜곡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부끄러운 일이기는 마찬가지죠.”
 
김 연구위원은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서예사를 조금 알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 중기의 서예는 고려 말에 도입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와 조선 중기에 혜성같이 나타난 한호(韓濩)의 석봉체가 주름잡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서가(書家)들이 이들 글씨의 연미하고 진부함에 싫증을 느끼면서 왕희지로의 복고 현상이 나타납니다. 옥동 이서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 이하진이 중국에서 들여온 왕희지 글씨를 보고 왕희지에 전적으로 경도됩니다.
 
이후 왕희지를 제외한 모든 서가들을 양주(楊朱)·묵적(墨翟)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서에게는 오로지 왕희지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자 그와 인맥이 닿은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李匡師) 등도 그의 영향을 받아 왕희지서를 익히게 됩니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이시홍은 ‘조선의 진짜 글씨는 실로 옥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東國眞體, 實自玉洞始)’고 했는데, 이는 글씨 중에 진짜 글씨로 여겨지는 왕희지 글씨를 쓰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최 실장은 이러한 뜻과는 전혀 다르게 ‘옥동 이서가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 이를 동국진체라 불렀다’고 했으니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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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동국진체와 추사체.  동국진체에 대해 '우리 고유의 감정을 나타낸 글자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지학사 191쪽


-그래도 인터넷에서 동국진체를 검색하면 많이 나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실체도 없는데 모두들 동국진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유홍준 교수는 ‘민족적 서체인 동국진체’라고 박사학위논문 서문에 써놓았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민족적 서체인 동국진체를 한 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건 최 실장은 ‘옥동 이서가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 이를 동국진체라 불렀다’고 했는데, 유홍준 교수의 학위논문에는 ‘조선 후기의 서예의 선구는 백하 윤순이었고 그것의 완성은 원교 이광사가 동국진체의 한 전형을 창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후기에는 백하와 원교의 동국진체가 등장했고...’, ‘원교 이광사에 의해 하나의 전형으로 제시되고 이를 동국진체라고 불렀다’, ‘원교 이광사는 이서에서 출발하여 윤순을 거쳐 창출된 동국진체를 완성시킨 조선 후기 서예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고 합니다. 이 정도 되면 중구난방(衆口難防) 수준이죠.”
 
"우리 민족의 고유 서체를 개인이 어떻게 창시하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동국진체’에 대해 ‘18세기에 출현한 우리 고유의 서체(書體)’라고 했던데요.
“‘고유(固有)’는 ‘본디부터 있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백과사전에는 18세기에 ‘출현(出現)’했다고 썼어요. 그리고 한 줄 아래 개설부분에는 ‘이서가 정립(定立)한 서법’이라 해서 ‘출현’이 ‘정립’으로 ‘서체’가 ‘서법’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몇 줄 내려가면 ‘동국진체로 발현되었다’고 해서 이번엔 ‘발현(發現)’, 또다시 몇 줄 아래에는 ‘옥동 이서가 동국진체를 형성(形成)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더 내려가면 ‘전통적인 진체(晉體: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미법(米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창안된 옥동체(玉洞體)이며, 이를 동국진체라 칭하였다.’고 했습니다. ‘진체(晉體)’는 왕희지체를 일컫는 용어인데 왕희지체가 전통적인 것일까요? 그런데 집필자는 옥동 이서가 창안한 옥동체가 곧 동국진체라 했는데, 옥동 이서가 언제 옥동체를 창안하고 그걸 누가 동국진체라 불렀는지도 없습니다. 

또한 ‘옥동 이서가 <필결(筆訣)>을 저술하여 동국진체를 창시했다’고 하여 이번에는 또 ‘창시(創始)’입니다. 문제는 <필결(筆訣)>은 서법 이론인데 그걸로 어떻게 동국진체를 창시했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옥동체가 곧 동국진체라 해놓고 이것을 이광사가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옥동의 글씨는 옥동체, 원교의 글씨는 그냥 원교체일 뿐입니다.
 
백과사전 마지막 부분의 ‘의의와 평’ 항목에는 동국진체를 ‘18세기 우리 글씨의 총체적 명칭’이라 했다가 바로 ‘18세기에 가장 애용되던 우리의 고유 서체’라고 했습니다. 우리 고유의 서체인데 누가 창안하고 창시하고 완성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집필자 머릿속에 있는 동국진체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횡설수설입니다. 이게 우리나라 최고의 백과사전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수준입니다.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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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李匡師)의 황노직시(黃魯直詩) 부분.


-왕희지체라는 서체가 있듯이 이서의 글씨가 독특하다면 동국진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지요.
“옥동 이서의 글씨는 그냥 옥동체일 뿐입니다. 만약 옥동 이서가 창안한 동국진체가 있다면 그것을 제시해야 하는데 아무도 제시한 경우가 없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이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 명칭도 아주 다양합니다. 최완수 실장은 옥동 이서가 창안한 ‘서체’라고 했으나 유홍준 교수는 원교 이광사가 제시한 ‘전형(典型)’, ‘진경산수와 같은 장르’라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서풍의 총칭’, 어떤 이는 ‘시대 서풍’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동국진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했는데 500쪽 정도 되는 단행본 중 동국진체에 관한 서술은 겨우 7쪽 밖에 안 되는데다 동국진체를 ‘서예의 범주’, ‘예술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이토록 개념이 다양한 경우는 대부분 실체가 없거나 속이고 있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람마다 ‘도깨비’를 그리면 모두가 다른 것과 같은 경우라고 보면 됩니다. 동국진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글을 쓸 때 ‘동국진체’라는 실체를 앞에 놓고 글을 쓰셨으면 합니다.”  

"역사 교과서는 하나로 통일해야"
 
-이야기가 약간 벗어났지만 김정희가 창안했다는 추사체도 실체가 없다는 뜻인가요. 
“그건 추사체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행 교과서에서 ‘김정희가 추사체를 창안하였다’는 서술이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서체를 창안한 것은 아니죠. 김정희가 남긴 많은 작품을 후대에 와서 그냥 그의 호를 붙여 부르는 것일 뿐입니다. 왕희지가 남긴 글씨는 왕희지체, 조맹부가 남긴 글씨는 송설체, 한호가 남긴 글씨는 석봉체라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림과 글씨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마지막으로 현행 교과서의 체제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
“현행 8종 검정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다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다면 굳이 여러 종의 교과서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타의 과목이 대체로 문제 해결 방법을 가르친다면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재정리하여 학생에게 전달하는 과목입니다. 8종 교과서가 서로 다른 사건이나 인물을 제시하거나 같은 사건이나 인물이라도 서로 다른 내용을 가르친다면 배우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분명 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학자들 간에 주관적 판단에 따라 비중이 다를 수는 있지만 같은 또래의 학생들은 같은 내용을 배워야 공평합니다. 현 정부는 교과서 종류를 많이 나눠놓는 것을 다양성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나, 이는 학생들마다 서로 다른 내용을 배우는 것이지 다양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학생들은 8종 교과서를 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정해주는 한 권의 교과서로만 배우기 때문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교과서마다 다른 학설을 수록했다는 것은 연구자들조차 해당 학설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구자들조차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일까요? 모든 교과서에는 과목 이름 앞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라는 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한국사’라는 것은 고등학생 수준에 맞는 국사 교과서라는 뜻이죠.
 
연구자들 사이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학설을 교과서마다 서로 다르게 수록한다면 이건 학술서지 고등학교 교과서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역사 교과서는 연구자들끼리 합의를 이룬 통설이나 정설 위주로 학생들 수준에 맞는 내용을 엄선하여 하나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과 반목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현행 교과서 오류 문제에 대해 <조선pub>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 김 연구위원은 교과서 문제로 들어가니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등록일 : 2017-12-19 08:37   |  수정일 : 2017-12-2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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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위원은  ( 2017-12-20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1
뜻과 학식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까? 요즘은 떼로 행동해야 먹힙니다. 떡을 떡고물에 계속 굴리세요. 떡고물이 떡에 덕지덕지 들러붙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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