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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현 대사 인터뷰, "일본 거물 정치인들을 친한파로 만든 비결은?"

"'핵에는 핵으로' 대응하는 게 북핵 문제의 정공법"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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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현 전 주일대사. /사진: 조선영상미디어 양수열 기자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日本). 해방 후 지금까지도 이 두 이웃 나라는 과거의 앙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잊을만하면 되풀이되는 독도 문제, 교과서 문제에 이어 최근에는 종군(從軍) 위안부 문제까지 불거져 한·일 관계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와 인적·물적 교류가 가장 활발한 나라 중의 하나며, 싫으나 좋으나 우리의 이웃으로 영원히 함께 해야 할 나라다.
 
3선(選) 의원 출신으로 이명박(李明博) 정부에서 주(駐)일본대사를 역임한 권철현(權哲賢) 전 대사는 한일(韓日) 관계를 ‘시지프 신화’에 빗대어 설명했다. 시지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신(神)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에 운반하는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시지프가 온 힘으로 굴려 올린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져 형벌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권 대사는 “한일 관계도 인내심을 가지고 안 될 때마다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숙명을 가졌다”며 “일본과 얼굴을 붉힐 때는 붉히더라도 함께 갈 때는 가야 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권철현 대사가 주일본 대사로 재임하던 3년 2개월(2008년 4월~2011년 11월) 동안의 한일 관계는 그야말로 수많은 난제로 가득했다. 일본 내부로는 유사 이래 최악의 지진과 쓰나미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보았고, 자민당(自民黨)에서 민주당(民主黨)으로 54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한일 외교가는 과거사와 독도 문제로 바람 잘 날 없었으며, 2010년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라는 민감한 현안도 마주해야 했다.
 
권 대사는 이러한 때 주일(駐日) 대사로 근무하며 일본의 정관계 인물들과 광범위한 인적(人的) 네트워크를 구축, 이를 국익(國益)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대사 재임 시절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하여 일제 총독부가 강제 반출한 도서 1205점을 반환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과 3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협정 체결을 성공시켰고,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진일보된 일본 총리의 사죄 담화문을 이끌어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는 역대 주일 대사로는 처음으로 한일관계 개선의 공으로 일본 천황(天皇) 부부의 오찬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는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특유의 친화력, 자타(自他)가 인정하는 뚝심으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최고의 한일 관계를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권철현 전 대사를 만나 한일 문제와 국내 정치 현안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권 전 대사는 현재 새누리당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인터뷰에서 호칭을 편의상 ‘대사’로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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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궤와 고서(古書) 등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를 통해 강제 반출된 도서의 반환 공로로 김의정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공동대표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는 권철현 대사.

 
조선왕실의궤 반환의 비하인드 스토리
 
-조선왕실의궤 등 총독부 반출(약탈)도서 반환에 권 대사님께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실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그 배경을 전부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무척 깁니다. 도서 반환 과정에서 정부와 관련 시민단체의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제가 부임 후 3년간 한 시도 쉬지 않고 만들어온 한일 양국의 신뢰 관계가 도서반환을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관련 인사들을 설득한 끝에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 담화에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하여 국내서 반출된 고서(古書) 반환을 약속했습니다. 이를 통해 1205권의 도서가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권 대사는 도서반환이 성사되기까지 “센코쿠 요시토(仙谷由人) 관방장관,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외무상,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전 총리 등의 정치인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며 “이런 거물급 친한파(親韓派) 인맥의 도움과 함께 우리 정부와 시민단체의 적극인인 공조가 더해져 일본의 정치권과 학계를 설득할 수 있었다” 고 밝혔다.
 
-도서반환에 관해서는 후일담이 많을 것 같습니다.
 
“당시 정확한 자료나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총독부를 통해 강제 반출된 도서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습니다. 일본과 반환도서 문제를 협의 중일 때 우리나라 문화재청 관계자가 ‘우리가 돌려받아야 할 도서가 모두 661권’이라고 하더군요. 또 다른 재야학자는 821권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니, 주겠다는 사람이 조사해서 몇 권을 주겠다는 말도 꺼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몇 권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주장은 일본이 발표 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서서 스스로 반환도서의 규모를 축소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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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궤 등 조선왕실 도서 1200권이 2011년 12월 6일 오후 국군의장대와, 전통의장대, 취타대의 환영 의전 행사 속에 인천국제공항 화물터미널로 들어오고 있다./조선DB
 
 
-최종적으로 1205권이라는 책 수는 어떻게 결정되었는지요.
 
“양국 정부 관계자와 도서반환에 대한 공식 협상이 진행되었고, 일본 측에서 처음 제시한 도서가 ‘321권 플러스 알파’였습니다. 저는 일본이 제시한 책 수를 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일본 측은 정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한 책들이 조선총독부가 가져온 것인지, 그 이전에 가져온 것인지, 혹은 구매를 한 것인지, 선물을 받은 것인지, 강제로 빼앗아온 것인지 구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돌려받기 위해 도서반환협정에 대한 일본 국회의 비준이 늦어지는 사이를 활용해 일본을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했습니다.”
 
권 대사는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伊藤博文) 규장각에서 상당한 책을 대출해 가져간 걸로 아는데 그 기록이 한국에는 없지만 일본에는 있을 테니 찾아보라”면서 ‘우리가 여러모로 조사한 바로는 적어도 1000권은 넘는다’ 든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서 취한 도서반환 결정이 불성실해지면 도리어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가될 수 있다’는 등의 주장을 통해 일본을 계속 압박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대출한 도서 목록이 발견되었고, 이를 근거로 일본은 150종 1205점의 도서를 반환하겠다고 알려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실의궤류 81종 167점과 규장각 도서 66종 938점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권 대사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이제야 비로소 조상님들과 국민을 뵐 면목이 생겼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이후 권 대사는 도서반환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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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4일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이 국회 교육위의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금성출판사가 펴낸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를 제시하며 질의하고 있다./조선DB

‘베스트1’ 국회의원에서 일본 대사로
 
부산 토박이인 권철현 대사는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83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80년 정권을 잡은 신군부 측에 의해 반정부 인사로 분류된 그는 반강제적으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강제출국을 당해 본의 아닌 유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쓰쿠바(筑波) 대학에서 3년 반 만에 도시사회학 박사를 취득한 후 귀국했다. 평소 학자로서 존경하던 나카무라 하치로(中村八郞) 교수에게 배우기 위해 쓰쿠바 대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비록 타의(他意)에 의해 선택된 유학 길이었지만, 권 대사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권 대사는 “강제 출국을 당해 일본으로 갔을 때는 몹시 비통스러웠지만, 이 시점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일 더 큰 일들을 하게끔 하시려는 하나님의 단련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귀국 후 권 대사는 다시 동아대학교에서 교수로 돌아왔고, 마흔 살에 전국 최초로 ‘민주화 교수협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동아대는 사학(社學) 족벌체제 경영 문제로 학내 분규가 심각했다. 운동권 학생들의 학교 점령으로 학교 행정이 마비되었고, 학생들은 모든 교수가 직접 투표를 통해 교수협의회를 만들면 그들과 대화를 하겠다고 해서 민주화 교수협의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권 대사는 도시발전연구소를 세우고 빈민퇴치 등 여러 시민운동을 펼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96년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교수재직 시절부터 도시빈민퇴치운동, 장애인운동 등의 시민운동을 시작한 권 대사는 ‘대한민국 시민운동의 첫 주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당시 시민운동은 정말 순수했고,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아 도덕적으로 깨끗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 시민운동은 정치적 색깔을 띠고 당파성에 물들었다”며 “이제라도 시민운동은 본래의 순수한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공천으로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에 당선된 권 대사는 내리 3선 의원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의 의정생활은 시작부터 화려했다. 국회의원이 된 첫해에 <조선일보>가 선정한 ‘국정감사를 잘한 국회의원 베스트 10’에서 ‘베스트 7’에 들어갔다. 1999년 국정감사가 끝나고 나서 <조선일보>에서 발표한 ‘동료 의원들이 뽑은 베스트 10’에서 ‘베스트 1’, <경향신문>이 선정한 ‘공무원이 뽑은 베스트 10’에서도 ‘베스트 1’을 차지했다. <한겨레신문>이 발표한 ‘시민단체가 뽑은 베스트 10’에서도 역시 ‘베스트 1’을 차지했다.
 
이후 그는 2년 동안 단독으로 한나라당 대변인 자리를 지켜 최장수 대변인 기록을 세웠고,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후보의 비서실장과 이명박 후보의 특보단장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인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탈락이라는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아픔을 맛보았지만, 당에 계속 남아서 활동했다. 총선 후 곧바로 주일대사로 발탁되면서 교수와 국회의원에 이어 임명직 공무원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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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권철현 주일대사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있다./조선DB


“나의 외교 원칙은 ‘포석’ 외교”
 
권철현 대사는 역대 주일 대사 중에 비교적 장기인 3년 2개월 동안 일본대사로 재직했다. 그의 대사 재직시절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大地震)이라는 사상 최악의 재난을 만났고, 한일 관계는 독도문제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는 유창한 일본어와 추진력, 특유의 친화력과 뚝심으로 수많은 난제(難題)를 해결해 나갔다. 퇴임 시는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대사’라는 평가와 함께 1965년 이후 가장 좋은 한일관계를 유지했다는 박수를 받았다.
 
-일본 대사라는 직책은 어떤 자리인가요.
 
“일본대사의 공식명칭이 ‘주일본국 대한민국특명전권대사’입니다. 주일대사의 임무와 책임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일본 내에서 한국과 한국인에게 조금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대사에게 온갖 비난의 화살이 쏟아집니다. 게다가 일본은 우리와 역사적으로 숱한 시련과 갈등을 반복해 온 나라라 국민 정서적으로나 국가 외교적으로나 복잡미묘하게 얽혀 있는 숙제들이 워낙 많은 나라입니다. 주일 대사는 한일관계의 이러한 변수들을 항상 예상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전문 외교관 출신이 아니라 막중한 일본 대사직을 맡았을 때 각오가 남달랐겠습니다.
 
“전문 외교관 출신은 아니지만, 정치외교학을 공부하였고, 일본유학도 다녀왔으며, 국회의원시절에는 한일의원 연맹의 간사장으로 對 일본 의원 외교의 중심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대사직 수락 첫날부터 어떤 대사가 되어야 할 것인지 끊임없이 숙고했습니다. 일본 대사로 있는 동안 저는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니라, 외교관이어야 합니다.”
 
그는 “대사로 있는 한 대사관 직원을 대할 때도, 일본 정계(政界) 관계자들을 대할 때도, 현지 교민을 만날 때도 항상 ‘나는 정치인 권철현이 아닌, 외교관 권철현, 한국인 권철현, 인간 권철현’으로 자신을 낮추고 모든 일에 겸손하며 진지하게 임할 것임을 다짐했다”며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모든 것을 평가받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말했다.
 
-대사로서 가졌던 외교 원칙이 있다면요.
 
“대사관 직원들에게 ‘신뢰외교’, ‘예방외교’, ‘끈질긴 외교’라는 세 가지 외교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신뢰외교는 상대방의 반응이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신뢰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예방외교는 사전에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고 대비해서 일이 터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포석외교’, ‘실천외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끈질긴 외교는 뭐가 하나 잘 되었다고 해서 반색하지 말고, 한 가지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독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관계의 미래가 없다’고 해버리면, 외교는 그 순간 상실됩니다. 외교는 기다림입니다. 초지일관 끈질긴 외교를 해나갈 때 복잡했던 문제도 하나씩 풀립니다.”
 
권 대사는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고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고, 중장기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꾸준히 실행해 나가는 게 ‘포석’”이라며 “대사직을 수락한 순간부터 어떻게 포석을 둘지 구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포석외교의 한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제가 대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8년 9월 아소다로(麻生太郞) 총리가 92대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자민당 9선 의원 출신으로 대표적인 극우파 의원에 속합니다. ‘창씨개명이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해서 우리 국민의 분노를 산 인물이 바로 아소다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로부터 아소다로가 다음번 총리가 될 것이라는 정보를 오래전 입수하고, 아소를 만날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일본총리가 될 것 같은데 당신이 총리가 되면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한국인에 대해 차갑게 대할 것 같아 걱정됩니다.’ 그러면 아소다로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총리가 되면 한국에 대해 따뜻이 대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총리가 되기 전 친분을 다지기 위해 다섯 번의 자리를 만들어 만났는데, 저는 만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했고 똑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권 대사는 “아소 다로가 총리로 재임하던 1년 동안 한일관계는 더없이 좋았다”며 “임기 마지막까지 그의 입에서 망언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아소다로의 태도 변화에 대해 일본 언론들도 몹시 놀라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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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에 성공, 일본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들어선 민주당 정권의 하토야마 전 총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권철현 대사./사진: 권철현

 
54년 만의 일본 정권 교체, 민주당 정권과 인맥을 구축하라
 
-대사로 재직시절 정·관계 인맥(人脈)구축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저보고 ‘찬찬찬 대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조찬(朝餐)은 한국에서 온 손님과 하고, 오찬(午餐)은 일본 집권당 사람들과 하고, 저녁은 앞으로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민주당 사람들과 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대사재직 시절 내내 제가 가진 모든 지식과 열정을 다 바쳐 전력투구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야 목표한 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후임 대사분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 드렸습니다.”
 
-대사 시절 일본에서는 54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새 정권 사람들과의 새로운 인맥 구축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닐 텐데요.
 
“우리 대사관이 예상한 대로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제1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중의원 선거에서 압도적 의석을 차지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외교라인은 대부분 자민당 정권 쪽 사람들이었고, 민주당과는 교분이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새로 들어선 민주당 정권 사람들과 인맥을 쌓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한두 사람을 만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민주당 정권의 등장을 예측하고 그 이전부터 민주당 정권에 영향을 미치는 정계, 언론계, 학계, 시민사회 인사들을 다 파악해 치밀하고 끈질기게 포석외교를 벌여나갔습니다. 당시 제 머릿속은 ‘어떻게 해야 이 많은 민주당 정권 사람들을 전부 친한파(親韓派)로 만들 수 있을까’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권 대사는 “정권교체 1년 전부터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 당황하지 말고 사전에 민주당 측과 교류를 확대하라”고 대사관 직원들에게 지시해놓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맨투맨식 접근법을 썼습니다. ‘낮에는 자민당’, ‘밤에는 민주당’ 주요 인물들과 자주 접촉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예산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즉시 소위 새로운 민주당 정권과 ‘인맥 쌓기 프로젝트(NPNN)’를 세우고 특별예산 요청 자료를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3년 동안 매년 필요예산을 정액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국회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건너가 여당과 국회 예산 관련 핵심 실세들을 설득했고, 천신만고 끝에 예산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 돈으로 본격적인 네트워크 구축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권 대사는 이렇게 다진 인맥과 끈질긴 설득의 힘을 동원한 성공 외교의 사례를 한 가지 소개했다. 바로 정권 교체 후 민주당 총리인 하토야마(鳩山由紀夫) 총리의 첫 순방지 결정에 관련된 문제였다. 이미 총리의 첫 해외 순방지로 중국이 결정되어 이미 언론에 보도된 상태에서 이를 한국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권 대사가 귀국 직후 일본 대사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 펴낸 <간 큰 대사, 당당한 외교>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어 이곳에서 생략한다.
 
민주당의 실세, 오자와 간사장을 친한파(親韓派)로
 
-인맥구축을 위한 자신만의 특별한 비결이 있다면요.
 
“저는 민주당을 움직이는 최고 실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친한파 인맥으로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만나서 식사한다고 해서 인맥이 구축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시 현직 총리가 하토야마였고, 다음 총리로 유력시되는 인물이 간 나오토(菅 直人) 의원, 그리고 실세 중의 실세는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였습니다. 이 분은 산전수전 다 겪은 13선 의원으로 자민당 정권을 깨부순 인물입니다. 저는 과반(過半)에 가까운 자파(自派) 세력으로 당과 의회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오자와 간사장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민주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그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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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간사장./조선DB
권 대사는 오자와 간사장을 만나기 위해 일종의 특별작전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
 
“제가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오자와 간사장이 우리의 민단(民團) 단장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저는 민단 단장을 통해 면담을 요청해놓고, 한편으로는 오자와 간사장 비서로 일한 적이 있는 한국인 교수를 만나 오자와에 대한 정보와 인물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오자와 간사장의 습성에 대해서 정보를 얻는 한편, 그가 쓴 논문과 책은 모두 구해 읽었습니다. 민주당의 정권 탈환 과정에 대한 다큐 비디오도 외울 정도로 봤습니다. 그 후 만남이 성사되었을 때 그가 쓴 <일본개조계획>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풀어가자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습니다.”
 
권 대사는 오자와 간사장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국을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저는 오자와 간사장이 후진타오 주석과 30분간 회담이 잡혀 있다는 걸 알고, 한국에 오면 시간에 구애를 두지 말고 이명박 대통령과 만찬을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한국에서 이틀 밤을 지내며 이명박 대통령과 만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민주당과 일본 국민들에게 한국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조훈현 국수와 바둑을 둘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가 굉장한 바둑광(狂)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간사장과 한국 정부는 매우 친숙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무라야마 담화 수준을 뛰어넘는 사죄 담화문을 이끌어내다
 
권철현 대사는 부임 직후부터 2010년 8월에 맞게 될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역사적 의미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됨으로써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우리 민족은 일제의 잔혹한 통치를 받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0년 8월에 그날의 역사적 의미는 반드시 되짚고 넘어가야 했다.
 
“저는 일본 대사로서 이런 역사적인 해를 맞아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다른 외교 업무에서 아무리 탁월한 업적을 남긴다 하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10년 8월 15일을 전후해서 일본 총리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사죄담화문이 발표되기를 우리 국민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우익 계열은 ‘도대체 몇 번이나 사과를 해야 하느냐. 절대로 굴복하지 마라’며 일본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가는데 일은 진척이 안 되고,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무라야마 총리가 발표한 사과 담화문이 있지 않나요?
 
“그 담화문은 한국에 대한 사죄라기보다는 아시아 전체에 대한사과였습니다. 저는 7월 말쯤 오카다 외무대신과 센고쿠 요시토 관방장관을 만나 이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오직 한국만을 위한 담화문을 발표해야 하고,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진정성이 담겨야 있어야만 한다’는 우리 쪽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피를 말리는 협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8월 10일 담화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무라야마 담화문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해방 후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내놓은 공식적인 사죄문 가운데 가장 진솔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충분히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때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문에 조선왕실의궤와 한반도에서 유출된 도서에 대해 반환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대사 재임 시절 내내 일본의 독도 영토권 도발로 골머리가 아팠을 거 같은데요.
 
“제가 주일대사로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맞닥뜨린 현안이 바로 독도문제였습니다. 2008년도에 내용이 바뀐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가 발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습지도요령해설서는 보통 10년에 한 번씩 바뀌는데 이 내용에 따라 교과서도 바뀌게 됩니다. 그해 4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차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영유권주장 내용이 들어가면 한일관계가 파탄 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그해 7월 문부과학성은 독도 영유권 자장을 담은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하였고, 저는 강력하게 항의한 후 한국으로 일시 귀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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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5일 밤 대한항공편으로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권철현 주일대사가 공항을 나와 승용차에 오르고있다./조선DB

독도 문제에서 답답한 건 일본, 차분하게 대응해야
 
-일본이 독도문제를 부각시키는 노림수는 무엇인지요.
 
“끊임없이 이 문제를 부각하고 한국을 자극하여 국제분쟁지역으로 만드는 게 그들의 목표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쿠릴 열도에 대해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하는 것처럼, 센카쿠 열도에 대해 일본이 중국을 상대하는 것처럼 지극히 냉정한 자세로 영토 주권을 강화하면서 비례(比例)의 원칙으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우리가 불리합니까.
 
“일본의 외교력이나 국제사회의 영향력으로 보나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구성으로 보나 우리가 유리할 게 거의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국제사법재판소 규정에 의하면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있을 경우 한 나라가 재판을 의뢰해도 상대국이 응하지 않으면 재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독도는 우리의 주권이 행사되고 있는 우리 영토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저들을 자극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권 대사는 2008년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명기된 독도 영유권 문제로 한일관계가 험악해진 경험 후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외교력을 총동원해 포석을 다져나갔다고 한다. 그 결과 2010년 12월 25일, 발표된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는 독도문제에 대해 독도라는 단어가 빠지고 한국과 영토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권 대사는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지난번과 같은 파문이나 갈등이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고 자평했다.
 
-독도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독도는 ‘내 호주머니 속의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일본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우리가 든든히 지키고 있는 우리 땅입니다. 이는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떠들 때마다 내 주머니 속의 보석을 꺼내놓고 그들과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고 싸우는 것은 불필요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의연하고 당당할수록 답답하고 분통 터지는 건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독도문제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하나씩 비례의 원칙에 따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를 앞둔 시점에서 독도를 방문했는데요.
 
“당시 저한테 물어라도 봤으면 당연히 말렸을 겁니다. 국익(國益)에 도움될 게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독도는 우리 소유고, 경비대까지 지키고 있는 우리 땅인데 구태여 그곳에 왜 갑니까? 일본이 노리는 게 국제 분쟁화 지역인데, 거기에 장단을 맞춰준 결과 외에 얻은 게 없잖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이 자꾸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인사실패 때문입니다. 프로를 써야 할 자리에 아마추어를 쓴다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요직(要職)을 맡게 된 아마추어들은 선배나 프로들의 경험과 지식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현 정부 들어 장기화된 한일관계 경색이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습니다. 우방(友邦)인 두 나라 정상이 거의 만나지도 않고, 최근에는 위안부(慰安婦) 문제까지 불거진 상태입니다. 
 
“한일관계가 이 지경이 된 첫 번째 잘못은 일본의 아베 총리에게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일본은 세계 경제 대국인데 이런 나라의 지도자라면 갖추어야 할 품성이 있고, 또 외교에는 국제관례라는 게 있습니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에 있는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한 적이 있습니다. 독일은 당시 남한보다 큰 독일 땅을 폴란드에 떼어주면서 독일인 200만 명을 철수시켰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성의를 보인 적이 없습니다. 일본이 한 번도 진정으로 사과를 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앙금을 해소할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사죄라고 해놓고는 뒤돌아서 우리가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지도자가 나서서 ‘이 정도의 담화문으로 사죄를 받고 다시는 사죄 요구를 하지 않겠다. 일본도 앞으로 더 이상의 사죄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하고 이 문제는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게 좋습니다. 일본의 잘못된 행동은 그것대로 규탄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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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일 '2010 한ㆍ일 축제 한마당'에서 하토야마 총리의 부인이자 열렬한 한류 팬인 미유키 여사가 한복 차림에 맨손으로 김치를 담그고 있다./조선DB

"그룹 빅뱅이 대사 10명 보다 낫다"
 
-일본 대사를 상대적으로 오래하셨는데요.
 
“제가 2011년 6월에 대사직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지난 5년 사이 대사가 네 번이나 바뀌었어요. 이것은 중요 우방국에 대한 결례(缺禮)입니다. 이렇게 대사가 자주 바뀌면 일본에서도 신임(新任) 대사에 대한 비중을 크게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사로 있으면서 고압적 자세로 나오거나 비굴하면 일본이 상대를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일본인들의 정서를 잘 알기 때문에 왕실의궤와 도서 1200권을 받아오면서도 서로 얼굴 한번 붉히지 않았습니다. 만약 ‘도둑질한 거 내놓으라’고 욕하고 윽박질렀으면 일본이 그 책을 돌려줬겠습니까. 또 그런 식으로 돌려받아봐야 나중에 ‘책이 많네 적네’ 하며 별의별 시비가 다 발생했을 겁니다.”
 
-대사로 계시면서 한일 문화교류사업에 물심양면 지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일관계에는 변수가 많습니다. 정치, 경제, 외교분야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뭔가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다가도 뜻하지 않은 사건이 나 사고가 발생하면 이내 분위기가 급반전 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문화 교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일본에 한류 열풍이 불어서 이 거대한 물결을 새로운 한일관계의 지평을 여는 지름길로 연결해야겠다고 판단한 겁니다.”

권 대사는 문화교류 일환으로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2010년을 앞두고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 한복판에서 우리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문화축제한마당을 기획했다고 한다.
 
“이 계획이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후원자를 섭외해서 위원장으로 모시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섭외한 분이 덴쓰 그룹의 나리타 유타카 회장입니다. 덴쓰는 세계 최고의 광고회사로 일본 유수의 방송사와 신문사, 잡지사가 덴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분이 한일문화교류에 이바지한 바가 많기에 저는 우리 정부에 이분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이런 정성을 들인 끝에 유타카 회장을 한일축제한마당 실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섭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랜 준비 끝에 2009년 9월 19일부터 사흘간 도쿄 롯폰기힐스와 오모테산도에서 한일축제한마당이 개최되었다. 개막식에는 일본 황실의 귀빈이 참석했고, 하토야마 총리의 부인인 미유키 여사가 한국말로 축사를 했다. 행사는 대성공이었고, 사흘 동안 14만 명이 참여했다.
 
“폐막식 때 양국(兩國)의 농악에 맞춰 강강술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저는 도쿄 한복판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옆에 있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저보고 그러더군요. ‘권 대사는 키는 자그마한데 왜 이렇게 간이 커요? 이건 보통 행사가 아니에요. 오늘은 한일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한 챕터가 넘어가는 순간이구먼...’”
 
-앞으로 민간차원의 문화교류가 더욱 중요하겠네요.
 
“한류 붐은 한일관계를 개선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한번은 그룹 빅뱅의 일본 콘서트에 초청받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40~50대 여성 5000명이 객석을 가득 메운 모습을 보고 감동과 흥분이 되더군요. 대사가 아무리 노력한들 이 많은 여성 일본인들을 진심으로 따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빅뱅은 그렇게 하고 있거든요. 나중에 빅뱅멤버들을 만난 자리에서 ‘당신들이 대사 10명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애써 다져놓은 우호적인 한일관계와 부풀고 있던 한류 열기를 대통령의 독도를 방문과, 일본 비하 발언 등으로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東일본대지진, "이것이 지구 최후의 날이구나"
 
-최근 경주에 지진이 발생해 온 나라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대사님 재직 당시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고, 후쿠시마 원전(原電) 사고가 일어났는데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저는 일본 유학생활을 해서 지진에 익숙한 편이었습니다만, 그날은 마치 이것이 ‘지구 최후의 날’인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당시 동경(東京)에 있었는데, 고층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피난하는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통신도 교통도 끊기고, 사실상 모두가 공황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긴급한 위기상황을 조속히 수습하고 관리하는 것이 대사의 기본책무라, 서둘러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 대사는 당시 지진이 일어난 그 시각에 집안 친척의 혼사에 참석하고자 김포공항에 막 도착한 부인에게 전화를 해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오라 했다 한다. 위기 상황에 대사부인이 어떤 이유로든 동경이 아니고 한국에 있어서는 사태수습을 지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사관 직원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방사능 오염 의혹으로 지금 당장 동경을 버리고 긴급피난을 해야겠다는 위기의식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신중해야 한다. 떠나는 것은 쉬울지 모르나, 그렇게 되면 어려울 때 우리가 동경을 버리고 간 게 된다. 아마 다시 돌아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돌아와도 결코 이전 같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 동원해 방사능 수치를 과학적으로 자세히 점검할 것이다. 그 결과 피난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긴급피난명령을 내리겠다.”
 
그는 대사관 직원들에게 재난 시 피난에도 순서가 있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가 유학생과 기업인 등 교민입니다. 그 다음이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입니다. 대사와 대사 가족은 가장 마지막에 떠나야 합니다. 이후 우리 대사관 직원과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무사히 위기를 수습하고 잘 극복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직원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이때 이후 ‘간 큰 대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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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26일 권철현(오른쪽에서 셋째, 세종재단 이사장) 아웅산 추모비 건립위원장과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 당시 정부 공식 수행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기백(오른쪽에서 둘째,당시 합참의장) 전 국방장관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왼쪽은 조형미술가 고산금씨, 오른쪽은 건축가 박창현씨./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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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아웅산 순국사절 추모비제막식 때 인사말을 하는 권철현 당시 추모비 건립위원장./사진: 권철현

"아웅산 순국사절 추모비를 세우고, 적군(敵軍)묘지 정비한 것 자랑스럽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권철현 대사는 2014년 6월 ‘아웅산 순국사절 추모비’ 설립을 성사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1983년 당시 북한 공작원들의 폭탄 테러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했던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등 16명의 정부 인사와 기자 1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2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이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한국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는 아무런 추모 시설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추모비 설립 여론이 일었는데,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제가 맡았습니다. 미얀마가 건국 이후 외국인 추모비를 세운 전례가 없어 일이 무척 힘들었지만, 결국 해냈습니다. 당시 제가 위원장을 맡자 추모비 건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그럼 추모비는 건립되겠네’ 하더군요. 제가 대사시절 다들 불가능하다는 것을 뚝심 있게 밀어붙여 성사시킨 사례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믿고 한 이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유가족이 정말 고마워하더군요. 이제 미얀마를 방문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들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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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현 대사는 북중군묘지평화포럼 대표를 맡아 경기도 파주의 일명 적군묘지 공원처럼 재단장한 뒤, 정전 60년을 맞아 '영혼의 화해'를 기원하는 '임진평화제'를 지냈다. 무덤마다 놓인 장미꽃과 주먹밥이 놓인 모습. 사진 오른쪽은 재단장하기 전의 모습이다./사진: 권철현

-경력에 ‘북중군(北中軍)묘지평화포럼’ 대표도 맡았다고 나오는데요. 좀 설명을 해주신다면.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에 6·25 때 죽은 북한군과 중국군 묘지가 있습니다. 이 구역은 사실상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는데, 제가 북중군묘지평화포럼을 만들어 활동한 결과 우리 정부가 이곳을 공원처럼 잘 정비하도록 이끌어냈습니다. 저는 통일에 대비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여기에 묻힌 중국군 유골을 돌려준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건 왜 그런 겁니까.
 
“박 대통령의 중국방문에 대해 시진핑 주석의 한국 답방이 이루어지면 시진핑 주석이 반드시 이 중국군 묘역에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중(韓中)우호를 지속적으로 증진할 수 있고, 전 세계가 이 사실(적군 묘지를 정비하고, 위령제를 지내온 것)을 알게 되어 한국의 위상이 크게 높아질 것인데 그것이 무산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아무튼 미얀마 테러 순직자 추모비 설립과 적군묘지 정비는 제 일생에 큰 업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랑스럽습니다.”
 
“핵(核)에는 핵으로 대응하는 것이 북핵문제의 정공법”
 
권철현 대사는 2014년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 부산시장 예비후보로 나섰지만,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권 대사는 “부산시민 전체 여론조사에서 상대후보들을 압도했지만, 당심(黨心)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경선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교수 시절 <부산대개조론>이란 책을 쓴 사람입니다. 도시전문가인 제 손으로 부산을 명품도시로 한번 탈바꿈해보고 싶었습니다. 명품도시를 하나 만들어 놓으면, 그 여파가 다른 도시로 확대되면 국가 전체가 발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도시문제 전공한 학자이자 외교관 출신으로 부산을 볼 때 부산의 큰 틀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산 시장이 되어 발전 방향의 큰 틀을 잡아놓으려고 했던 겁니다. 가덕도 신공항 아이디어도 그런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의 과도한 부산사랑이 결과적으로는 정치인 권철현의 중앙정치 무대에서 성장에 제 발목을 잡은 셈이 된 건가요. 하하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국민들로부터 불신받는 이유와 정치를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조언이 있다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진영논리에 빠져 패싸움만 일삼고 있습니다. ‘애국(愛國)’이라는 단어를 늘 입에 달고 있지만, 그 말은 그저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이 더 잘 알 겁니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당리당략에 몰두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애국이란 단어도 값어치 없게 느껴지는 겁니다. 국민이 가슴으로부터 존경하는 정치인이 정말 한명이라도 있나요?
 
저는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그대가 먼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고 하신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긴 채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위상확립과 시대정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청와대 혹은 정치 실세라고 하는 사람들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역사의식을 가지고 항상 국민 편에 서서 나라를 중심에 놓고 활동해야 합니다.”
 
-북핵(北核) 문제와 싸드 배치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방식을 보시고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저의 외교 전략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포석외교’란 말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포석은 멀리 앞을 내다보고 다가올 사태에 대비해서 지금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전략입니다. 북핵문제나 싸드 문제도 오래전부터 하나하나 포석을 해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해보자’, 또는 ‘그때 가서 어떻게 해결이 되겠지’하는 식은 아마추어들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이 정부에 진정한 프로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적은 것은 아닌가 짚어볼 대목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몇 년 앞을 내다보고 거기에 대비해 오늘 현재에 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권 대사는 “무엇보다 북핵문제는 정공법으로 나가야 한다며 ‘핵에는 핵으로’ 대응한다는 것이 핵 이론의 가장 기본”이라고 덧붙였다.
 
“저는 오래전부터 독자적인 핵무장의 필요성을 주장해 왔습니다. 이는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북한이 핵을 가지는 것이 효용보다 비용 측면이 더 크도록 우리가 상황을 끌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핵을 가지는 순간 북한 핵은 사실상 무용지물화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결국 비용과 부담만 남게 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6개월이면 핵을 개발하고, 2년이면 북한보다 월등한 핵전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전문가들이나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론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독자적인 핵무장을 하는 데는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다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머지않은 어느 날 우리는 북핵무력화를 위한 폭격이냐, 또는 주한미군철수냐 하는 선택지 앞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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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문제에 헌신하고 싶다”
 
-싸드 배치 논란을 보면, 안보 문제에서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싸드배치는 우리와 주한미군의 방어에 필요한 조치입니다. 북핵이 없어지면 철수하는 조건으로 배치하는 것이 맞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이 더 빨리 배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소련의 반발에 밀려 주권국가로서 당당한 선택을 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면, 장차 얼마나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 두렵습니다. 한미(韓美)동맹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사사건건 중국의 내정간섭을 자초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야말로 우리가 가장 피해야 할 중대한 국익훼손이라 할 것입니다.”
 
-개헌(改憲)과 관련한 소신이 있다면.

“지금의 정치체제는 그전의 정치체제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연유된 것입니다. 과거의 정치체제 즉, ‘4년 중임제’, ‘내각책임제’ 같은 것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5년 단임제’로 바뀌었는지 그 당시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거의 정치체제로 돌아간다고 해서 현재의 문제점들이 모두 해결될 수 있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가장 우려하는 것은 개헌문제는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상황과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다 잊어버리게 하는 블랙홀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대한민국의 장래는 참 암담해지는데 개헌문제가 이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제인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권 대사는 “우리 국민 다수는 제도가 잘못되어 정치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정치인의 자질과 품성이 크게 부족한 것이 이유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의 이익과 권력추구가 아니라, 역사를 생각하고 멸사봉공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인이 많아지는 것과 그러한 정치문화가 광범위하게 뿌리 내리도록 국민과 함께 언론이 감시하고 비판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개헌보다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저는 ‘내 스스로 무엇이 되겠다’,  ‘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을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늘의 뜻이 또는 역사의 가르침이 저에게 어떤 일을 맡긴다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북통일 문제나 미래에 대비해서 지금 우리가 챙겨야 할 문제 등에 대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조직을 가지고 한번 일해보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도 하늘의 뜻에 맡겨야겠지요.”
등록일 : 2016-10-18 10:16   |  수정일 : 2016-11-1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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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꽁  ( 2016-10-24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2
권철현 대사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평소 존경하시는 분입니다. 일본 대사시절 정말 엄청난 일들을 해내신 선각자십니다
뭥미  ( 2016-10-21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5
우연히 기사를 보게됐는데..
이 인터뷰 내용이 다 사실이라면
이런 사람이 대통령 해야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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