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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최후, 자살인가 암살인가?

함규진 교수, "명성황후 살해 만행 반드시 사과 받아야"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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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대한제국(大韓帝國), 흔히 구(舊) 한말(韓末)이라고 불리는 시기의 역사는 우리에게 아픔으로 남아 있다. 왕비(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임금(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했고, 급기야 나라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우리가 역사를 이어온 이래 많은 부침(浮沈)은 있었을지언정 나라의 주권(主權)이 통째로 외세에 넘어간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의 하나가 지나간 발자취에서 교훈을 얻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리는 구한말의 아픈 역사를 마주하기보다는 외면하고 잊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무관심에 비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구한말의 역사 상당 부분이 실제의 진실과는 다르게 남아 있거나, 일제(日帝)에 의해 왜곡된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에 와서야 구한말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고종(高宗)에 대한 새로운 평가나, 그동안 상식으로 전해지던 역사적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노력 등이 그것이다.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도 그런 학자 중에 한명이다.
 
《정약용》 《왕의 투쟁》 《왕이 못된 세자들》 등 조선시대 역사 관련 다수의 책을 펴낸 함 교수는 그 자신도 고종에 대한 책을 쓰기 전까지는 고종에 대한 인식이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함 교수는 주위로부터 고종에 관한 책을 하나 쓰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그다지 흥이 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고종은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존중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는 고종이란 역사의 일대 전환기에 한 국가의 사령탑이 되어, 나라를 근대화한다는 목표도, 국권을 지켜낸다는 목표도 이루지 못했고, 부정부패와 공직기강 해이도 바로잡지 못한 그야말로 ‘무능한 군주’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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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알아야 할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자음과 모음)
함 교수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꾸로 그것은 고종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며 “그에 관한 자료를 찾기 시작하면서 예전에 미처 몰랐던 것과 예전에 알고 있었던 것들 가운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측면을 깨달아 갔다”고 말했다. 
 
이렇게 고종에 대한 자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함 교수는 46년이나 일국(一國)의 사령탑으로 지냈던 고종의 깊은 고뇌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침내 함 교수는 망국(亡國)의 군주로서 지난 100여년 간 사람들의 냉대 속에 방치되어 있던 인간 고종을 따뜻한 시선에서 바라보는 한편의 책 《한국인이 알아야 할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자음과 모음)을 펴냈다.
 
요즘의 보·혁 갈등은 고종 때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저자의 말을 빌리면 이 책은 ‘고종의 발걸음을 뒤따르다가 발견한 그런 생각에 관한 보고서이자, 괴롭고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인생을 강요당한, 그래도 끝내 인간미를 잃어버리지 않은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추도서’다. 참고로 이 책은 2010년에 나온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를 최근 재판한 것이다.
 
-먼저 고종과 그가 이끌던 정부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사실 고종은 당대의 식자층(유학자)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군주였습니다. 당시 선비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철없는 황제가 서양 오랑캐의 문물을 마구잡이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반해 개화파 지식인들은 고종이 취한 개혁의 속도와 스탠스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입장이 다른 보수파와 개화파가 고종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묘하게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고종이 당시 식자층으로부터 그렇게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서양의 오랑캐 문물을 마구 받아들이는 고종보다는 서원을 탄압했을지언정 차라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낫다는 쪽이었습니다. 지금의 보수·진보의 갈등은 그나마 우리의 경제나 주변환경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만, 고종 당시의 보혁(保革)구도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몇 백배는 증폭된 상태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갑자기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입장(개화파)과 하나도 바꿀 수 없다는 입장(보수파)이 충돌했던 겁니다. 당시 위정자는 그가 누구건 간에 엄청나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함 교수는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나라가 외세(外勢)에 의해 망했고, 당시의 위정자들은 이후 복권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며 “사람들 사이에서 고종과 명성황(明成皇后)후 등 당시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망했다는 인식이 퍼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설명했다.
 
"고종은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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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황제(광무황제). 
-본 책의 마지막 장에서 고종이 죽기로 결심하고 자살한 것처럼 그렸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록이 있는지요?
 
“물론 고종이 자살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부분은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적인 서술은 아닙니다. 고종 독살설이 당시 광범위하게 퍼졌고요. 당일의 기록과 역사의 맥락을 해석해 보면 고종의 마지막을 그렇게 그리는 일에 타당성이 없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고종은 암살을 당했고, 그것은 반쯤은 자살이었다고 해석한 겁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고종은 자신이 암살될 것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이를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런 결말에 이르기까지 고종을 둘러싼 외부 환경과 고종 자신의 심리를 책에서 소설적 요소를 가미해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실제로 고종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워 돌아가시자마자 독살설이 퍼졌고, 결국 3·1 운동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고종은 수십년 간 나라를 통치한 절대 권력자였고, 그 신분 또한 일반 정치인이 아닌 황제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그와 함께 격동의 시대를 헤쳐 온 백성에게 연민과 함께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책을 보니 그동안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역사적 내용이 피상적이거나 실제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더군요. 특히 흥선대원군과 고종, 두 분 간의 갈등의 골이 그렇게 깊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고종은 평생 아버지인 대원군을 견제하고 싸우느라 그의 앞에 놓은 산적한 과제를 해결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자기 아들인 고종을 권좌(權座)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몇 번이나 쿠데타를 기획하고, 심지어 일본을 등에 업고 권력을 찬탈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다고 유교 국가에서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들이받을 수도 없는지라 고종은 여러모로 힘든 상태에 놓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이게 고종은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각인돼 있습니다.
 
“고종이 편하게 살려고 했으면 그냥 아버지 그늘 아래서 조용히 있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생활을 거부하고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돌려받기 위해 반기를 든 사람입니다. 고종이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자기 안위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는 조선이 끝까지 쇄국(鎖國)으로 갈 수 없다는 걸 안 소위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군주였습니다. 그가 기득권이나 수구세력의 대변인에 머물지 않고, 조선을 근대국가로 이끌려고 했던 점은 평가받아야 합니다.”
 
-고종은 조선을 개혁하려고 평생에 걸쳐 노력했는데 왜 자기 주도의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개방이라는 게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듯이 한번 문을 열어놓으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외부 문물이 밀려듭니다. 그러니까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개혁으로 나가자니 극심한 내란 상태에 빠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수구(守舊) 쪽으로 돌아서자니 주변정세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고종이 추구한 전략은 일단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야 나라도 살아남는다는 의식이 무척 강한 군주였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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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임오군란 당시의 훈련원 군대. 구식 군대의 군사변란인 임오군란은 청국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재기를 노리던 흥선대원군은 도리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고종의 딜레마와 트라우마
 
-을미사변 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 사건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은.
 
“일국의 군주가 외국 공관(公館)으로 거처를 옮긴 것에 대해서 비겁하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일단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을미사변 후 조선 정부는 일본의 힘에 눌려 꼼짝을 못하는 상황이었고, 임금이 군주의 역할을 못하니 나라꼴이 말이 아닌 상태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어떤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런 상황에서 타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함 교수는 “결국 고종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종국(終局)에는 나라가 망하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상황이 되었다”며 “책에서 이런 상태에 놓여 있던 고종이 결국 죽기를 결심했다고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한제국 출범과 동시에 시작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지 않았으면 민의(民意)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발전, 고종의 후원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독립협회에는 서재필, 이승만, 이상재 같은 신진세력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고종을 비판하고,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으로 급성장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입헌군주(立憲君主)제를 추구했는데 고종은 이를 상당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전제(專制)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고종은 믿고 정권을 맡길 만한 세력이 없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고종이 보기에 신하들도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친러파와 친일파로 갈라져 싸우기만 하였고, 이런 사람들에게 권력을 맡겼다가는 나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또한 독립협회 사람들은 이른바 진보적 엘리트로서, 책을 통해 민주적 제도의 지식을 습득했으나 그것을 내면화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입헌군주제라 하지만, 민의를 수렴하여 국민을 대신해 정치를 한다는 개념은 없이 깨어 있는 자신들이 정권을 담당해야 한다고만 본 거죠.”
 
-고종은 국제정세에 비교적 밝은 군주였고, 당시 입헌군주제와 대통령제 같은 다른 정치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요.
 
“물론 그렇지만, 독립협회가 그럴 만한 정치적 역량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현실의 혼란을 타개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다 보니 결국 군주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국난(國難)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신하들에게 권력이 넘어간다면 고종 입장에서는 그것은 파국을 의미했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다산 정약용도 《상서고훈》에서 ‘사욕에 찬 무리가 황극(皇極)의 권한을 나눠가지게 되면 나라는 망한다’며 경고했죠. 고종이 다산의 사상을 깊이 공부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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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두고 고종과 끝까지 마찰을 빚은 흥선대원군.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이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했고, 아들인 고종을 무력화시켰는데 그때 고종이 심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위축되지 않았을까요.
 
“임오군란은 무엇보다 국가와 왕실을 보위할 군인들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고종의 충격이 컸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한 충격과 트라우마가 더 컸다고 생각됩니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을 비롯한 신하들이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고, 임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는 등 상상도 못할 일을 벌였거든요. 결국 지존(至尊)인 임금이 혼자서 맨몸으로 도망을 쳐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고종은 갑신정변 이야기만 나오면 ‘그 이야기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함규진 교수는 “결국 고종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독립협회 사건들이 연속해서 벌어지면서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고, 끝까지 직접 권력을 통제해야 자신과 나라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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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모습.

근대화의 발목을 잡은 흥선대원군의 아집
 
-1876년 개항(開港)으로부터 나라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30년 정도, 병인양요(丙寅洋擾) 까지 거슬러 가면 40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나라가 망하는 것은 막을 기회가 없었을까요.
 
“요즘 와서 보면 천재적인 사람이 나타났더라면, 그래서 시국(時局)을 잘 조정하고, 정세를 잘 판단해서 적절한 정책을 썼더라면 나라를 보존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제갈량이 나타났어도 망국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나고, 1853년 개항한 일본은 존왕파(尊王派)와 막부파(幕府派) 간에 내전(內戰)을 벌인 뒤, 결국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전면적인 개항으로 나갑니다. 이런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우리의 개항은 너무 늦은 편입니다.”
 
-대원군과 고종의 갈등이 근대화 과정에 발목을 잡은 측면이 크군요.
 
“대원군이 권력을 탐하지 않고, 국정의 고문으로 고종과 타협하면서 국정을 이끌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대원군은 고종으로부터 권력을 뺏기 위해 끝까지 아들과 대립하며 왕권을 흔들었고, 고종은 권좌를 지키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해야 했습니다. 대원군은 권력욕과 아집이 대단했던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써 놓았고, 그것이 오늘날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굳어진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황현이 일부러 어떤 것을 날조해서 쓸 사람은 아니지만, 《매천야록》은 당시 상황을 자신이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적은 것입니다. 요즘에도 대통령이나 권력자들에 대해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 가운데 사실도 있겠지만, 정적(政敵)이 상대를 헐뜯기 위해 퍼뜨린 말도 많지 않습니까. 당시에야 오죽했겠습니까. 일본인을 비롯하여 명성황후의 정적들은 눈엣가시 같은 황후에 대해 의도적으로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을 것입니다.”
 
-매천야록에 기록된 명성황후의 부정부패 행각은 어떻게 보시나요.
 
“명성황후가 사치로 국가 예산을 다 말아먹었다 거나 혹은 1년 예산의 몇 배를 뇌물이나 선물로 주변에 주었다는 등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500년을 이어온 조선왕조는 그렇게 허술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가 체계상 위에서 한두 명이 나랏돈을 마음대로 전용해서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렇게 쓸 돈이 없었습니다. 조선 왕실은 차관문제로 굉장히 고민을 했는데, 외국에서 보면 얼마 되지도 않은 돈 때문에 정부가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구한말의 매관매직(賣官賣職)은 실제로 있지 않았나요.
 
“그것 때문에 고종이 욕을 먹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일은 프랑스나 명(明)나라 등 군주제 국가라면 어디든지 있는 일이었지, 조선만의 특별한 경우도 아닙니다. 왕실재정이 바닥난 상태에서 고종도 그런 식으로 재정을 충당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기준에서 보면 ‘얼마나 썩었으면 그랬겠느냐’고 욕을 하지만, 당시 도덕기준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부도덕이나, 혹은 갈 데까지 간 그런 상황은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고종은 그렇게 마련한 돈을 독립운동이나 의병운동 자금 등에 동원하려고 했지, 사적(私的)으로 착복을 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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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장례 행렬이 대한문을 나와 오늘날 서울시청 광장 앞을 가로지르기 전에 잠시 대기하고 있는 모습. 일본군이 욱일승천기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고종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은 백성들의 억눌렸던 반일 감정을 폭발시켰고,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명성황후 살해 만행은 반드시 사과 받아내야"
 
-고종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사실상 폐위된 후에 고종은 꼼짝을 못하는 상황으로 유폐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부자(父子) 지간에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종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속된말로 ‘동물원 원숭이’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지만, 건강만큼은 좋았습니다. 저는 책에서 고종이 당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덕수궁을 탈출해 해외로 망명을 시도하려고 했다고 그렸습니다.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실제로 고종을 모셔와 임시정부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계획했었고, 왕자 중에 한 명(의친왕)이 실제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책에서 함 교수는 유폐된 고종은 자신을 도와줄 인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사시킨 이완용(李完用)을 떠올렸다고 그렸다. 이에 따라 고종은 이완용과 사돈관계였던 한상학과 망명문제를 상의했다. 고종은 이완용의 마지막 충정을 믿어 보기로 하고 대담한 도박, 아니 고독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한마디로 죽을 각오를 한 것이다.
 
고종은 ‘창살 없는 감옥’인 조선을 벗어나 해외에서 망명정부를 이끌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결국 이완용의 배신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망명계획을 세웠던 고종은 모든 것이 허사가 되자, 망설임 없이 독이 든 죽음의 식혜를 들이켰다. 이상이 함 교수가 책 속에서 추론한 고종 황제의 마지막 모습과 그의 내면이다.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후 고종황제는 아예 경복궁(景福宮)을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지긋지긋했을 겁니다. 경복궁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집무실 구획, 침전 구획 등이 따로 있었는데, 어느 한 전각(殿閣)에서 불순 세력이 작당하면 암살이 쉽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복궁 북쪽에 건청궁(乾淸宮)을 새로 지어 명성황후 및 측근들과 함께 집무를 보며 지내다가 여차하면 북쪽으로 피신하려 했는데, 을미사변 때는 미처 피신하기 전에 참변이 발생합니다. 이후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긴 고종이 마지막까지 경운궁을 거처로 고수한 이유 역시 보안문제와 외부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한 이유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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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순국 모습을 그린 기록화. 우리 정부는 주권 국가의 왕후를 잔인하게 살해한 일본의 야만 행위에 대해 아직도 공식적인 사과 요청을 하지 않고 있다.

-명성황후 사건에 대해 우리는 아직 공식적으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건 그 어떤 문제보다도 심각하고, 큰 문제라고 봅니다. 최근까지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제기했지만, 명성황후 문제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주권국가의 황후를 자객(刺客)을 보내서 암살한 야만행위를 벌인 사례가 없습니다. 오스트리아 황후가 외국에서 암살당한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우연하게 벌어진 일종의 사고입니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궁궐을 침략해 왕후를 베어 죽이고, 그 시신마저 욕보인 인류역사상 손꼽을만한 만행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외교 루트를 통해 진상 규명에 대한 협조를 요구하고,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야 합니다.”
 
우리와 일본 근대화의 근본적인 차이점
 
-일본의 근대화와 우리의 근대화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도 개방을 빨리하고, 일본처럼 해외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유학생을 많이 보냈으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요?
 
“일본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수많은 전쟁 과정을 통해 전체를 하나로 묶는 막부의 힘과 각 지역의 개별적인 힘이 동시에 존재해왔습니다. 하나로 묶으려는 힘과 묶이지 않으려는 힘이 항상 긴장관계에 있다가 한쪽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면, 다른 한쪽이 일어나 새판을 짜곤 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평안기(平安期)와 대란기(大亂期)가 반복되면서 나라를 크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축적되어 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재수가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과정과 새로운 체제 즉, 근대 민주체제로 바꾸는 과정이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고래부터 완전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였기 때문에 왕조를 때려 부수지 않는 이상 일본과 같은 그런 급격한 체재변혁은 애당초 불가능한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왕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엎어버리자니 외세가 호시탐탐 지켜보는 상황에서는 그것도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자칫하다가 나라를 통째로 외국에 먹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는 정부(왕조)를 지키는 동시에 개혁을 완수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이 일본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것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한말 당시 청(淸)나라는 자기들도 열강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왜 그렇게 조선에 집착하면서 내정간섭을 했는지요.
 
“아편전쟁 후 청나라는 서양과 어느 정도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은 주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결국 국익과 영역을 지키지 못하면 열강에 계속해서 당하기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쯤에 와서 주변을 둘러보니까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는 지역이 티베트와 신장위구르, 베트남, 조선 등이 남았던 겁니다.”
 
함규진 교수는 “청나라는 강화도조약 때까지만 해도 조선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후 조선이나 베트남에서 영향력을 잃으면 자신들도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기어코 조선을 자기들 영향권 하에 두려고 극심한 내정간섭을 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갈 길 바쁜 우리로서는 타이밍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종황제는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중립국이 되려고 했는데, 그게 실현가능성이 있었습니까.
 
“당시 조선은 어느 한 나라에 먹히던가, 열강에 의해 분단이 되던가, 아니면 중립화 지역으로 남든가 하는 세 가지 선택 가능한 옵션이 있었습니다. 고종은 중립을 통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성공 확률이 희박한 선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립을 이룰만한 외교력이나 국제정세를 읽는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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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이 거행된 환구단(원구단). 자주 독립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었기에 일제는 국권을 박탈하자 말자 이 건물들을 철거하고 이곳에 호텔을 지었다. 광복 70년이 넘도록 복원되지 않고 있는 환구단이 우리의 역사의식을 웅변하는 듯하다.

"오늘날 주변 정세는 구한말과 정확히 일치"
 
-중립화도 내실이 있는 상태에서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약하지만 적어도 군사력을 동원하면 너희가 상당히 괴로울 거야’ 하는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든가 아니면, 독일이 주변국을 설득해서 통일과정에 끌어들였듯이 그만한 외교력을 갖추고 있든가 둘 중의 하나 정도는 먼저 갖추고 있었어야 합니다. 힘과 외교력이 하나도 없었으니, 조선은 열강에 꼼짝없이 당하기만 한 겁니다. 고종의 중립화 시도는 애당초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에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국권을 빼앗긴 근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우선 일본을 견제해주리라 여겼던 청나라가 너무 쉽게 일본에 깨졌다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 동학혁명 과정을 통해서 조선 군대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 후 일본은 한국을 얕잡아보고 대놓고 먹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러시아가 개입,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청일전쟁의 전리품을 잃게 되니까 분통이 터지는 참인데, 조선 정부는 재빨리 친 러시아 노선을 취합니다. 이대로는 공든 탑이 무너지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당시 국제 정세를 입체적으로 볼 인물이 조선에 없었습니까.
 
“당시 조정은 내각이 개편될 때마다 너무 한쪽으로 쏠렸습니다. 애당초 자생적 개화파나 유학파가 있어서 관료기구 내에 자체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보니, 청나라가 힘이 세면 청에 붙고, 일본이 세면 일본에 붙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리저리 휩쓸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고종이 아무리 새롭고 참신한 인물을 등용해도 ‘이제는 친러가 대세인가보다’하면 내각 전체가 친러로 기울고, 그 반대의 경우는 반대로 된 것입니다. 결국 내각에 친러, 친일, 친중파가 각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서로 견제도 하고, 대열을 정비해서 정책을 추진하면 좋았을 텐데 워낙 뿌리가 없다 보니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함 교수는 대표적인 예로 이완용을 들었다.
 
“이완용 같은 경우 친청파에서 친러파, 친일파 등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애당초 특정 정책을 꾸준히 지지할 정치 세력이 없다 보니 그저 상황에 따라 어디에 붙는 것이 가장 유리할까만 생각하게 되고, 기회주의적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를 상태였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정부 자체를 장악하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형국이었습니다. 결국 국정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정국이 불안해지는 상황이 지속됐습니다.”
 
-우리가 구한말의 역사가 아픈 역사라고 해서 외면을 해오다 보니 당시의 역사적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해방 후 지금까지, 구한말의 역사에 대해서는 비중을 축소하고 조선에서 곧바로 독립운동 시대로 넘어가는 역사학의 풍토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전환기의 시대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또다시 아픈 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릅니다. 현재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구한말 당시와 국제질서나 역학구도가 거의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왜 주체적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못했는가, 일본과 중국은 어째서 우리와 다른 길을 갔는가 등을 꼼꼼하게 따지고, 교훈을 후세에 가르쳐야 합니다.”
등록일 : 2016-08-07 10:30   |  수정일 : 2016-08-0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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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xx  ( 2017-03-30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0
저희 할아버지는 고종황제가 직접 쓴 황금서필첩을 매우 고가에 구매하셨다고 합니다. 구매하신 이유는 고종황제가 나라가 어려워서 나라를 살리기 의해 직접 황금친필로 서첩을 쓰셔서 구입했으며, 나라가 재정비되면 일종의 채권형태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기에 애국하는 마음으로 구입하셨다합니다. 저 서필첩을 구입할 당시 할아버지는 반일 감정이 많은 지방의 사업가 이자 지주셨던점으로 미루어보아 고종황제가 서울 친일파 눈을 피해 지방의 반일 사업가나 지주등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애쓰지않으셨나 추측해봅니다. 제가 초등학생이라 할아버지께서 많은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셨으라라 보는데 저 '채권형태 나라가 재건되면'이란 말을 제가 지금 다시생각해보면 고종황제가 독립한국을 꿈꾸며 반일자본가들에게 독립자금기부를 호소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나라의 국왕이 시간을 쪼개가며 쓴글씨라보기에 보는 순간 너무도 한글자 한글자 나라를 되찿는데 조금이라도 ㅂ·템이 되고자 자로 재고 써넣었듯이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잘 쓰셔서 어린 마음에도 그때의 고종황제의 절박한 마음이 서체에 묻어나와 처음 보는 순간 울컥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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