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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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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발해 왕가의 후손임을 잊지 않다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3)- 전원철 박사 인터뷰

전원철 박사 인터뷰는 애초 기획한 3편이 아니라, 4편까지 이어진다.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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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징기스칸>(By The Will Of Genghis Khan)의 한 장면.

(2편에 이어 계속)
 
‘몽골’= 말골, 몰골, 물길, 모골, 몯골, 말갈, 모골, 무크리, 무갈 
 
전원철 박사는 “칭기스 칸이 살던 오늘날의 몽골리아에는 칭기스 칸 자신의 시대까지 타타르, 케레이트, 메르기드, 콩그라트 및 나이만 등 여러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며 “그때까지 이 지방을 대표하는 통일된 나라 이름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칭기스 칸이 세상을 떠나지 얼마 안 되는 시대에 쓰인 페르시아어 사서 《선별된 역사(Tarikh-igojide)》도 칭기스 칸이 처음으로 이 지방명을 ‘몽골’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음을 지적했다.
 
“칭기스 칸의 서로 다른 부족을 통일한 뒤 이 모든 종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이름을 고안했는데, 바로 ‘몽골’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어원에 대해 후대의 학자들이 여려 어원설을 제시했죠. 송(宋)나라 때 팽대아(彭大雅)는 칭기스 칸에게 가는 사신으로 몽골을 방문하고 와서 쓴 자기 보고서에서 <몽골이 몽골어에서 은(銀을) 뜻하는 말인 ‘멍거’에서 왔다>고 해서 심지어 몽골의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믿었지요. 또 오늘날 부랴트 및 몽골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용감하다’는 말뜻의 퉁구스어 ‘망가’가 어원이라고 봅니다.”
 
-이상하네요. 몽골 사람이면 한 번에 당연히 몽골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정상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정작 몽골인들이 자기 종족명이자, 국명의 뜻을 모르는 거죠. 마찬가지로 위대한 칭기스 칸이나, 그의 본 이름인 테무진(칭기스 칸)의 뜻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냥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비슷한 발음이 나는 단어에 꿰맞춰 놓고 ‘이럴 것이다’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그 말의 뿌리가 원래의 몽골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죠.
 
“‘몽골’은 사실 말갈/몰골(말 골,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에 기원을 둔 말입니다. 말갈은 ‘말 키우는 고을’이라는 뜻인데 고구려 옛 소리가 ‘몰 골’ 즉, ‘말 골’입니다. 말을 제주도 방언으로는 아직도 ‘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몰골이 선비(鮮卑) 시대에 와서 ‘몯골’, 곧 ‘몰길’, 한자로는 ‘勿吉(물길)’로 바뀝니다. 이는 ‘몰 길’, 곧 ‘말 다니는 길’이라는 말로 ‘말 고을’과 같은 말이죠. 그 ‘말골’이 결국 600년 세월이 흐른 뒤 몽골어 ‘몽골’이 된 것입니다.”
 
전 박사는 “부랴트어(바이칼호, 내몽고 등지의 종족이 사용하는 말)에서는 지금도 ‘勿吉(물길)’을 북방 한어(漢語)가 아니라, 남방 한어로 읽는 옛 소리인 ‘묻갈리’라고 기록한다”며 “말갈어 ‘몰골’이 기원이 되어 《삼국사기》와 《당서》 등에서는 ‘말갈(靺鞨)’로 적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아랍어에서는 ‘모골’이라고 하고, 힌두어에서는 ‘무갈제국’처럼 ‘무갈’이라고도 하지요. 고구려를 옛 산스크리트어로 ‘무쿠리(畝俱理)’, 다른 투르크 방언들로는 ‘마크리’ 또는 ‘베크린’ 등으로 부르는 것도 이 말의 변형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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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항아리 금행을 기준으로 본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 모든 몽골의 어머니로 불리는 알란 고와의 10대 손이 칭기스 칸이다. /저자 책

구전이나 전설이 아닌 족보로 기록된 칭기스 칸 선조 계보
 
-우리는 흔히 유목민은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서 선조에 대해서 알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칭기스 칸의 경우 선조들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이네요.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이 그냥 전설이나, 구전의 형태로 내려온 것을 후대에 와서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만에요. 한 왕조의 계보들 중에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만큼 수 많은 언어와 시대에 일관되게 기록된 것은 유럽은 물론 동서방 그 어떠한 왕조에도 없습니다. 라틴어 외에 기록문화가 별로 없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예 빼두고라도, 기록 잘하기로 이름난 아랍 및 페르시아와 지나(China)땅에서도 그런 경우가 없죠.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몽골어, 한문, 만주어, 티베트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와 타타르어 몇 개 방언, 부랴트어, 아르메니아어, 또 러시아어 등 10개 민족어 이상의 동·서방 여러 언어로 시대를 달리하며 동·서방에서 수10 종의 사서로 대대로 기록되었습니다. 같은 하나이면서, 이만큼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또 많은 언어로 기록된 왕가의 계보는 전 세계 그 어느 왕조에도 없습니다.”
 
-칭기스 칸을 야만적인 생활을 한 유목민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요. 그런 그들이 어떻게 족보를 기록하고, 전해 왔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서양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무지나, 몽골사에 관한 편견 때문에 이런 숨겨진 역사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선입관이 생긴 겁니다. 또 서양학자들은 자기네들이 그 야만적 동양의 한 종족 때문에 정복을 당하거나, 위협을 느꼈다는 자격지심도 존재했지요. 그래서 ‘야만적인 한 유목민족 출신의 칭기스 칸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전쟁을 통해서 문명세계를 정복했다’고 평가하고 싶었던 점도 있죠.
 
유목민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해왔던 겁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의 선조 족보는 단순하게 구전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정식 족보 이상 잘 정리된 형태로 쓰여져 책의 형태로 전해 왔습니다.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부르는 유럽과 세계 각지의 그 어느 문명종족보다도 더 문명적입니다.
 
유럽인들은 자기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지요. 또 수십만 명에 하나 드문 예외로 이른바 ‘family tree book(족보)’ 또는 ‘genealogy book(족보)’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귀족출신 가문에만 그렇고 그것도 5~6세대를 못 가지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우리 관습입니다.
 
가가호호가 수천년에서 수백년 전의 선조에 이르는 족보를 가지고 있지요. 그와 같은 전통을 가진 가문이 칭기스 칸의 가문이고, 나중에 칭기스 칸의 후손들이 자신의 왕가에 전해 내려온 선조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 바로 《몽골비사》와 제가 말씀드린 다른 서방 사서들입니다.”
 
전 박사는 “단순 구전으로 칭기스 칸 자신으로부터 자그마치 20대 전, 발해 반안군왕, 달리 진국공인 대야발까지의 조상들의 명단은 물론 그들이 한 행장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가 있느냐”며 “《사국사》는 대야발을 넘어서서 그 이전의 계보까지 보여주는데, 이를 합치면 적힌 것만 해도 근 30세대나 된다”고 말했다.
 
“이는 당연히 족보책을 보고 쓴 것입니다. 라시드 웃딘도 여러 번 자기가 쓴 《집사》에서 《황금의 책》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죠. 중요한 것은 이처럼 족보를 중시하는 민족은 전 세계에서 오직 한 민족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조선민족, 한민족입니다.”
 
칭기스 칸의 시조 ‘황금항아리’의 정체
 
-이제는 칭기스 칸 선조가 어떻게 분화되어 나갔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지난 2편의 인터뷰에서 발해-당 전쟁으로 발해 서경 즉, 압록강네 군(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던 ‘키얀’과 ‘네쿠즈’ 후손들 중에 후에 ‘콩그라트 종족’이 먼저 그 지역을 빠져나왔다고 하셨는데.
 
“아, 네, 콩그라트 종족(지파)이 먼저 빠져나오고, 그다음에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 지역을 나옵니다. 콩그라트는 모골, 곧 말갈 종족 가운데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입니다. 이 콩그라트의 전설적 시조가 바로 대야발의 아들인 일하의 아들로 《집사》가 전하는 키얀에게 손자인 황금항아리입니다. 《집사》의 저자 라시드는 이 황금항아리에 대해 이름만 적어놓고, 그의 선조에 대해 적지 않았습니다.
 
그를 제가 추적해 봤습니다. 페르시아어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는 한자로 옮기면 ‘금관(金罐)’인데, 이는 ‘금 칸(金干)’, 달리 표현해서 ‘금 한(金汗)’과 같은 소리이고, 뜻은 ‘황금 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타타르어 사서에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라는 말로 투르크어로 번역하여 적었는데, 때마침 공교롭게도 몽골인들은 조신(女眞)의 금(金)나라 군주를 ‘알탄 칸(금 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조신(女眞)의 금나라 군주의 시조가 바로 《고려사》가 말하는 ‘금행(今幸, 金幸)’입니다. 그런데 나아가 다시 <투르크의 계보>, <행운의 정원> 및 <시바니의 서(書)> 등을 보니 그가 바로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발의 아들 일하, 일하의 아들 ‘간(澗)’에게 손자로 태어난 이가 바로 금행, 황금칸, 황금항아리이죠. 계보 상의 세대로 따지면, 황금항아리는 발해 왕가의 제2시조인 야발의 4대손입니다. 또한 금시조 함보 3형제의 부친이 되는 것이죠.”
 
-지난 2편의 인터뷰에서 ‘황금황아리’가 ‘서해용왕’이라고 했는데요.
 
“그렇습니다. 황금항아리는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 승(僧: 존경받는 직위를 의미, 요즘의 ‘장로’에 해당)’이라고 나와있고, <고려세계>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용왕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고려세계>는 또 《성원록(聖源錄)》을 인용하여 ‘의조(懿祖: 곧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처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 두은점 각간(豆恩坫角干)의 딸이다’고 합니다. 서해용왕의 실명이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이라고 밝히는 것이죠.
 
그런데, 부랴트 전승에는 그가 ‘토곤 테무르 칸’으로 나옵니다. ‘두은(豆恩)-’의 옛소리는 ‘토곤-’이고 ‘-점(坫)’의 옛소리는 ‘-텸무ㄹ’입니다. 우리 옛말의 ‘ㄷ/ㅌ’이 ‘ㅈ/ㅊ’으로 점차 변하는 구개음화를 생각하면 금새 이해가 가지요. 또 ‘-ㄹ’밭침은 한자에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 변화는 금세 이해가 갑니다. 다음으로 ‘각간(角干)’은 투르크어 ‘카간(Kaghan)’, 곧 몽골어로 ‘카안(Khaan)’, ‘칸(Khan)’입니다. 이처럼 두은점 각간이나 토곤 테무르나 고려어로 된 것이냐 부랴트어로 된 것이냐만 다를뿐 같은 이름입니다.”
 
“우리 고대어 표기 방식인 이두와 향찰에 대한 이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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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고려박물관에 소장된 고태조 왕건의 영정.
-서해용왕이 발해-고려왕이라는 말을 도참설(圖讖說) 비문(秘文)의 비밀코드로 적는 표현방식이라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죠.
 
“우리말 표기법에는 한자로 우리말 소리를 그대로 적는 이두(吏讀)와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향찰(鄕札)이 있습니다. 예컨대 ‘고려’는 우리말 ‘고을’과 그 옛소리 ‘구루(城)’의 소리를 한자 소리만을 활용하여 적은 것이고, 이것이 이두인데, 향찰의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중천왕’은 또는 ‘중양왕’이라고도 하는데 삼갈 이름은 연불이고 동천왕의 아들이다(中川王 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라고 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제5 중천왕조>를 보시죠.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왕이름이 3개나 있습니다. ‘中川王(중천왕)’, ‘中壤王(중양왕)’ 그리고 삼갈 이름(諱) ‘然弗(연불)’입니다. 왜 한 사람의 이름이 3가지일까요. 힌트를 하나 드리죠. 이 3개의 이름은 다 하나의 소리이고 한 가지 뜻입니다. 감이 좀 잡히나요?”
 
-이 세 가지가 다 한 가지 소리이자, 한 가지 뜻이라고요?
 
“답은 이 세 이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두나 향찰을 안 쓰고 한글을 쓰는 우리네가 ‘中川王’은 ‘중천왕’, ‘中壤王’은 ‘중양왕’ 또 ‘然弗’은 ‘연불’로만 읽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식 향찰로 읽어 봅시다. 한자로 쓰되 우리말로 읽는 방법입니다. ‘中’은 ‘가운데 중’이고 ‘천(川)은 내’이고, 또다시 ‘中’은 ‘가운데 중’이고 ‘壤’은 ‘땅 양’입니다.
 
그런데 ‘한 가위’ 또는 ‘한 가우’라고 우리말로 할 때 가우/가우는 한자로 중(中)입니다. 川은 내이고 壤은 나/라입니다. 그러면 中川은 ‘가우내/가우래’이고 ‘中壤’은 ‘가우라’입니다. 또 ‘然弗’은 오늘날에는 ‘연불’이라고 읽지만, 옛소리는 ‘캰부르’입니다. 然자 옆에 개 ‘견(犬)’이 보이죠? 그것이 然자의 옛소리입니다. 이제 왜 이 세 이름이 다 같은 소리이고, 뜻인지 감이 잡히시는지요?”
 
-솔직히 ‘가우내/가우래’와 ‘가우라’는 비슷하긴 합니다만, ‘캰부르’가 어째서 같은 소리인지는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이 세 소리는 모두 다 우리 고어로 ‘가우라이’라고 들렸던 ‘고구려’라는 소리이고 뜻도 같은 말입니다. 고구려는 옛날 한자 소리로도 방언에 따라 ‘카부려, 고리, 까오리, 코오라이’ 등으로 소리가 나고, 오늘날 영어나 불어, 러시아 등 서양어로는 ‘코레아, 꼬레, 까례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중천왕 또는 중양왕 연불의 이름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한자들을 소리로 읽지 말고 뜻으로 읽어 보면 앞이 두 가지는 바로 ‘가우(중)-라(양/천)’이고 ‘연불’은 ‘캰부르=큰 부려=커부려=큰 부여=고구려’입니다.  여기에 다가 ‘왕’을 보태보십시오. 결국 그의 이름은 ‘가우-라=고-구려=커-부여-왕’이라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한자로 쓰고 우리말 소리와 뜻으로 읽는 표기방식이 향찰이고, 한자의 소리를 빌려, 그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말 소리를 적는 것이 이두입니다. 한자의 소리로 우리말 소리를 적은 ‘然弗’은 이두이고, 앞의 두 이름은 한자로 적되 우리말 소리로 읽는 것입니다. 바로 고구려 향찰이죠.”
 
고구려 향찰이 신라 향찰보다 먼저 쓰여
 
전 박사는 “우리 학자들이 신라에만 향찰이 있다고 생각하고 고구려나 백제, 발해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 왔다”며 “그런데 한자의 전래과정에서 고대 지나 대륙과 가까운 고구려나 백제가 한자를 먼저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가장 멀리 떨어진 신라가 먼저 받아들였을까 하는 문제는 상식의 문제에 속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고구려와 백제가 한자를 신라보다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간단한 진실이 학자들의 눈에는 뜨지 못하니, 왜 같은 이름이 다른 한자로 적혀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겁니다. 중천왕은 고구려 제12대 왕이고, 248년~270년간에 왕위에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왕들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하다보니, 두 개는 고구려식 향찰로 세 번째 것은 고구려식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군요. 신라 향가 때문에 당연히 신라에만 향찰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전하는 향찰로 적은 글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나오는 신라 향가 14수가 전하므로 신라에만 향찰이 있는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비록 고구려 향가는 전하는 것이 없지만, 고구려 향찰은 오히려 신라보다 먼저 쓰인 것을 증명하는 왕 이름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 드린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왕(高麗王)의 소리만 따서 또 다른 우리말로 읽으면 바로 ‘고렝이/구레이 왕’이죠. 이것이 또 다른 향찰의 한 방법입니다. 이 ‘고렝이/구레이=고려’를 다시 이번에는 한자로 뜻 적기를 하면 바로 ‘용왕(龍王)’, 곧 ‘구렁이 왕’이 됩니다.
 
또 우리 서쪽의 바다 ‘서해(西海)’는 ‘발해(渤海)-만’이라고 하는 것처럼 발해입니다. 그러면 ‘서해’는 ‘발해’이고, ‘용왕’은 ‘고레이=고려왕’이라는 말이고 이제 최종적으로 그 두 말을 합치면 ‘서해용왕’은 바로 ‘발해-고려왕’이라는 말이 되죠. 이것이 바로 도참설(圖讖說) 비문(秘文)의 비밀코드로 적는 표현방식입니다만, 이 풀이방법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가죠. 도참설 비문에는 이런 표기방식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도참설 비문은 뭔가요.
 
“한자의 뜻 적기를 활용한 일종의 비밀코드입니다. 주로 비밀스러운 미래 예언 사상을 쓸 때 많이 활용했습니다. 왕건이 궁예가 세운 고려에서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문 문장이나, 군데군데 비밀코드를 넣어 퍼뜨린 것도 그 가운데 하나로 글의 비밀코드가 이두나 향찰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세계>가 재인용하는 글을 보세요. ‘익재(益齋)가 인용한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에는 ‘국조(國祖)의 성은 왕씨다’고 하는데, <금사 국어해 성씨>도 입을 맞추어 말하듯이, 금나라 완안(完顔)씨도 바로 왕(王)씨입니다. 이 왕씨는 바로 대씨(大氏)와 같은데 왜냐하면 완안씨의 시조가 대함보이기 때문이고 그는 대금행의 아들입니다.
 
결국 황금항아리 금행은 대(大)씨이자 달리 왕건과 같은 왕(王)씨이고, 그래서 그 8대손 완안아골타도 <금사 국어해 성씨>에 따르면 왕씨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골타의 8대조 금행은 우리나라 평주의 승이고, 《집사》에 따르면, ‘왕 같은 사람’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 곧 ‘토곤 테무르 칸’입니다.
 
이 평주승 금행은 바로 평주인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과 같은 지방 사람이고, 다 같이 그 지방의 장로이고 왕같은 인물인데, 그 성씨도 같고 시대도 같죠. 또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 곧 발해고려왕이 바로 금행인데, 평주에서 이 서해용왕 칭호를 취한 이는 바로 황금항아리, 금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는 또 완안 아골타의 선조입니다.”
 
-그 황금항아리가 우리 역사에서 왜 중요한 인물입니까.
 
“황금항아리 금행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입니다. 방금 말한 대로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가 바로 <고려세계>의 서해용왕인데, 이 분은 단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7세 선조 금시조 함보의 아버지인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는 나아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죠. 동시에 그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가계인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고래의 아들 ‘콩크라트’에게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등 동서양의 여러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조의 혈통 상의 고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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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선조가 '솔롱고(고려)'에서 왔음을 말하는 솔롱고 뷰라트인의 사진./저자 책

세 지파로 나뉜 칭기스 칸의 선조들
 
-그 연관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요.
 
“《집사》에 황금항아리 아들 세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추를룩 메르겐’, ‘쿠바이시레’ 그리고 ‘투스부다우’입니다. 이 이름들은 얼핏보면 매우 낯설게 들립니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이는 사실 우리말인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 칭호와 말갈어 칭호, 그리고 한자로 된 칭호입니다. 이들이 바로 《금사》에 나오는 함보 3형제, 즉 카고라이(아고래, 고구려), 함보(큰보, 걸가, 걸씨, 대씨), 보코리(무구리, 고구려)입니다.
 
이 3형제가 각기 당시 신라의 황해도 평산에서 살다가 남국 신라의 그 땅 침략에 더불어 발해내지에서 일어난 발해 왕족간의 내분이라는 내외적인 난국을 맞습니다. 이 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큰형 아고래는 평산에 남아 신라와 싸우고, 둘째형제 함보와 막내 형제 보활리는 당시 발해의 반안군의 두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들어가 살게 됩니다.
 
이 때문에 나중에 그 후손들이 별도의 관향, 곧 다른 본관을 가진 지파, 즉 종족을 이루게 됩니다. 신라로 치자면 경주김씨 안동김씨, 강릉김씨라는 같은 문중의 다른 관향, 본관을 취한 것입니다.큰형 아고래의 콩그라트 종족, 둘째 금시조 함보의 예키라스 종족, 그리고 막내 형제 보활리의 코를라스 종족이 그것입니다.”
 
전원철 박사는 “이 가운데 막내 보활리의 증손자 ‘코를라스’가 바로 칭기스 칸 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종족 지파의 시조”라고 하고 “큰형의 지파인 콩크라트에서는 훗날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곧 말갈말로 ‘부르테 부인’ 및 ‘부여대(씨) 부인’으로 풀리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콩그라트는 ‘큰 고려씨’, 곧 ‘고(高) 구려씨’라는 의미입니다. 《고려사》에 오늘날 몽골리아 지방의 철륵(鐵勒)종족과 함께 왕건에게 병사를 주어 신라를 무찌르게 했다는 ‘콩거라(驩於羅, 환어라)’ 족입니다. ‘驩於羅(환어라)’의 옛소리가 ‘콩고라’, 곧 ‘큰고려=커구려=고구려’입니다.
 
알려진 대로 함보 가문에서는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를 배출하는데 《집사》에는 ‘예키라스 종족’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조선시대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삼한(三韓)의 진한(辰韓) 역라씨(役拏氏)’라고 기록한 종족입니다. 황해도 평산이 자주 신라에 점령당해 ‘진한 땅의 역라씨’이라고 적은 것이죠.
 
마지막으로 막내 보활리는 《금사》에는 갸라이(耶懶, 야라)로 적히고, 《고려사》에는 ‘코라이땅(曷懶甸, 갈라전)’으로 적히고,《원사》에는 ‘코를라(合蘭路, 합란로)’로 적힌 오늘날의 함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땅의 이름 ‘코를라’ 본관을 따서 여기에 ‘씨(氏)’=‘스’를 붙여 자기 칭호로 쓴 사람이 바로 《집사》가 한자는 빼고 그 소리만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코를라스’로 기록한 인물입니다.
 
그는 칭기스 칸의 11대 조부이고, 칭기스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알란 고와의 아버지지요. 이 가문은 청나라 때 만주와 몽골 씨족 계보를 밝힌 《황조통지》에서는 ‘고려나씨(高麗那氏)’로 기록된 가문입니다. 좀 이해가 가시나요?”
 
뿌리 의식을 잃지 않은 칭기스 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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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안군왕 대야발의 형인 발해고왕 대조영.
전 박사는 ‘코를라스’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으로 적혔는데, 이는 곧 ‘고려-나라-씨-말갈’이라는 뜻이고, 부랴트 전승들에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 또는 ‘코리도이 메르겐(고려씨 말갈)’으로 나온다고 덧붙인다.
 
“‘메르겐’은 오늘날 몽골어, 카자흐어 등에서는 ‘활 잘 쏘는 싸람’과 ‘현명한 사람’, ‘부족장’으로 이해되지만, 이는 원래 활 잘 쏘고 현명을 추구하는 군주들인 발해왕가의 관향인 ‘말갈(靺鞨)’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금나라 말로는 ‘메르간/베르겐(勃勤, 발근)’이라는 말로도 바뀌었는데, 이는 ‘씨족장’, ‘문중장’을 말합니다. 원래 대조영, 대야발의 말갈가문의 사람만이 씨족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메르겐” 및 “메르간/베르겐(勃勤, 발근)’은 고구려어로는 ‘낭(郎)’ 또는 ‘낭군(郎君)’이고, 신라어로는 ‘화랑(花郞)’과 같은 말로, 이 후자는 신라어로 김가(金哥, 김씨), 박가(朴哥, 박씨) 등 씨족의 족장 감을 말하는 ‘가랑(哥郞)’의 ‘가(哥)’를 옛날에 같은 음가를 가지나 뜻은 좀 더 예쁜 말인 ‘화(花)’로 바꾸어 쓴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설명이다.
 
“결국 칭기스 칸의 뿌리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서 시작해서, 그 4대손인 황금항아리 금행으로 이어지고, 바로 이 금행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 보활리의 3대손 코를라스의 후손이 바로 칭기스 칸의 코를라스 종족이 되는 겁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이자면, 대야발→아들 일하→간(키얀)→키얀의 아들→금행→3아들 중 보활리→ 아들 콩글리우드(고구려씨)→바르가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 랑)→코를라스(코리라르다이 메르겐)→알란 고와라는 계보입니다.”
 
-결국 칭기스 칸 가문은 왕족으로서 가문에 대한 뿌리 의식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칭기스 칸은 ‘진국왕(震國王)’이라는 말인데, 그 자신이 정벌하는 금나라와 송나라 말기의 한자 소리로 읽은 ‘친기 칸’이라는 소리, 곧 ‘진국왕=발해왕=고려왕’이라는 말입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우리 사람들이 이른 바 ‘중국’이라고 잘 못 부르는 지나 땅을 정복하고 대원국, 원나라를 세웁니다.”
 
고구려 왕가의 후손임을 자각
 
전 박사는 “이 때 마르코 폴로가 서방에서 그의 원나라를 찾아오는데,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불행히도 감옥에 갇힌다”며 “이때 감옥 속에서 친구에게 구술하여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우리가 《동방견문록》이라고 부르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 25번이나 칭기스 칸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단 한 번만 빼고 그의 이름은 항상 ‘친기 칸(Chinghi Kane)’으로 나옵니다. ‘칭기-스 칸’이 아니구요. 그런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르코의 시절에 몽골인들이 남쪽 오랑케라는 뜻에서 ‘만지(蠻子)’라고 불렀던 송나라 백성들의 남방한어로 ‘진국왕(震國王)’은 ‘친귀(기) 칸’이었기 때문이죠. 한자를 몰랐던 그 기록자는 마르코가 말하는 대로 이 한자의 당시소리를 토스카나 방언으로 적은 것이죠. 이 사실이 또 한 번 ‘칭기스 칸’의 진정한 소리와 그 뜻을 알려줍니다.”
 
-‘테무진’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시죠.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와 일가친척 부락인들은 칭기스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라고 자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게 고구려 제 3대왕 ‘대무신=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준 겁니다. 테무진 자신으로 말하자면, 스스로가 종친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취합니다. 이는 테무진 스스로가 자신이 고구려에서 나온 발해국 왕의 후손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몽골이라는 이름을 보세요. 그는 당시에 땅이름조차 없었던 오늘날의 몽골리아에 있던 부족들을 통일하고 ‘몽골’을 창설하는데, 그 ‘몽골=말갈=말고을’입니다 고구려-말갈이라는 두 이름 가운데, 자기가 세운 나라를 친족인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말갈’, 곧 ‘몽골’을 선택한 겁니다. 테무진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죠. ‘조선반도’ 안에 있는 우리와 함께 말입니다.”

(4편에서 이어집니다. 애초 본 인터뷰는 3편으로 기획되었으나, 4편으로 늘어났습니다. 3편까지  칭기스 칸 선조들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4편에서는 칭기스 칸 자신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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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5-08-15 오전 7:41:00   |  수정일 : 2015-12-03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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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방화별감  ( 2017-02-05 )  답글보이기 찬성 : 10 반대 : 11
고고학적 뒷받침이 전혀없고 음상사추론+견강부회적인 사료해석+본인의 상상이 더해진 혼종스러운 주장이네요. 있는사실 그대로를 직시하는게 역사이지 환빠들마냥 본인들의 열등감을 역사를 빙자한 창작물로 보상받고자 하는것은 역사가 아니죠
코난킴  ( 2017-01-31 )  답글보이기 찬성 : 2 반대 : 1
금나라시조는 함보가 맞고 함보는 경순왕의 아들 김행후손이다
마의태자와 배다른 형제다
함보와 대조영과는 200년차이가 난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뒤 30년후에 나타나고 함보가 만주로 간건 신라부흥군이 고려에 광군에 밀려 강원도에서 함경도 만주로 들어간 시기는 다르다
물론 몽골이 말갈쪽에서 나온건 맞다고 치고 발해역시 말갈 여진 즉 고구려왕족녀와 말갈부족장혼혈인 대조영이라치자
말갈이나 고구려나 다 우리민족이다
역사무뇌한  ( 2016-05-13 )  답글보이기 찬성 : 21 반대 : 2
여기 역사학자라고 하면서 서양고고학 발끝도 못 따라가는 인간들 많네.. 내 이런말까지 안하려했는데, 최소한 예의도 없는 소위 우물안 역사학자들 졸 만네 그려.

최소한 논문이나 책으로 자신의 분야에 근간을 흔드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 해당 책과 논문의 레퍼런스 1,2,3은 읽어보고 비평 해야되는거 아닌가?

지지리도 공부 안하다가 호구지책으로 역사학도가 되었으나, 방대한 사료에 덤비려하니 겂은 나고, 밥벌이는 해야겠고해서 편한 시류에 편성해서 제대로 된 징키스칸의 연구 하나 하지 않은 병*신 역사학도들 주제에..

전원철 박사님의 연구 결과를 책조차 읽어보지 않고 글 싸바르는 씌레기들이 좀 보이네...

이상 역사 무뇌한이...
줄리  ( 2015-08-22 )  답글보이기 찬성 : 7 반대 : 20
그럼 왜 자신의 선조의 나라 고려를 침입해 그 몹쓸 짓을 했을까요?
이병곤  ( 2015-08-22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18
그만하시죠. 몽골과 말갈을 연걸시킨 것 까지는 뭐 그럴수도 있었습니다만, 작제건 이야기 나온 것을 보고 선생님의 글은 가치 없을 가능성이 더 많음을 직감했습니다.
박형숙  ( 2015-08-21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10
piruda님 혹시 전원철씨거나 가족이십니까? 아무도 서적관련 신문 기사에 댓글을 쓸때 그 책을 다 읽어본 후 댓글을 쓰지 않습니다. 그 서적에 어떤 주장을 담았다면 그것은 아직 전원철씨의 주장이지 증명된 것이다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고구려 발해의 왕족 출신이면 왜 고씨나 대씨를 쓰지않고 김행혹은 금행이라고 했는지 또 왜 금사에선 우리의 조상은 신라인 김함보라고 했는지 인터뷰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연대상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또 발해-당의 전쟁을 파악할때 기존 사학자들도 신구당서와 다른 역사서를 참조했을겁니다. 다소간 해석의 차이가 있을순 있어도 발해가 망한 전쟁을 사실상 승리한 전쟁이라고 볼만큼 기존 사학자들이 무능할까요? 또 백번을 양보해서 발해땅을 신라에게 줄만큼 진 전쟁이라도 후에 해동성국이라 불릴만큼 폭망하진않았는데 어떻게 한쪽이 완전 패망한 타타르-모굴전쟁이 됩니까?
piruda  ( 2015-08-20 )  답글보이기 찬성 : 11 반대 : 0

1.발해인 금행과 신라인 김행의 혼동에 관해

박형숙 선생님은 물론 그*전박사가 옳을 수도 있지만 가령 황금 항아리 - 금관 - 금한 - 알타이 칸 이런 해석은 틀릴 수도 있다. 또 김행이 대씨이자 왕씨라니... 이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논문이 더 바람직한 형태이지만 책을 내더라도 사학자들의 감수를 받았어야 옳다.” 라고 하셨는데. 전박사는 선생님의 이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이미 그의 저서 2권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권과 2권”에서 모두 자신의 답을 주고 있으니, 그것을 읽어보시고 이런 논평을 하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인터뷰 기사 1이 그 책 사진까지 실어 두셨는데 그것도 안보시고, 또 책도 안보시고 그런 글을 쓰셨나 보군요.

또금나라 시조가 김씨가 아닌 고구려 발해 후손이라고 하는 점도 문제가 많지만”이라고 하셨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전박사는 기존의 설인 재야학자 윤명수씨, 동양대학교 김운회 교수의 대쥬신을 찾아서’, 그리고 김위현 교수의 한국학 중앙연구소 등에서 발표한 몇 편의 논문들이 왜 틀렸는지 모두 분석하고, 심지어 KBS 역사스페셜”이 전국민에게 방영한 잘못된 내용을 지적하면서 왜 여진이 신라 유민”이 아니라, 신라가 망하기보다도 훨씬 이전의 발해인들인지, 또 금시조 함보가 발해인지 자세히 설명해 두었네요. 박선생님이 말하시는 설을 발표한 이 학자들과는 달리 전 박사는 자기 저서의 2권에서 자그마치 8가지 정도의 이유를 들어 이 학자들과 KBS의 설이 틀린 것임을 입증하고, 그 가운데 한 예로서 심지어 전박사의 책 138쪽에서 아래 도표로까지 설명해 두었네요.

아래에서 보시듯이 금태조 아골타는 왕건의 5대손인 고려 예종과 동시대인인데 (아골타는 예종 왕우 때 금나라 황제인 형이 아우 고려국왕에게 형제나라가 되자”고 국서를 보내왔죠), 그 예종의 8대 선조가 작제건의 아버지이고, 그는 아골타의 8대조인 금행(今幸)과 동세대입니다. 또 조선시대 김세렴이 자기 종씨인 신라인 김행(안동권씨 시조 권행)이 아골타의 8대조 금행(今幸)과 같은 사람이라고 잘못 보고 역사를 날조했고, 또 윤명수 선생과 김운회 교수 등은 이 날조된 기록에 의존하여 자기 설들을 펼친 것으로 보이는데, 막상 그 김세렴의 종씨인 신라인 김행(金幸)”은 고려 태조 왕건 시대에 왕건을 위해 안동싸움에서 공을 세운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신라인 김행(金幸)은 전박사가 발해인 금행(今幸)의 외증손(3대손)이라고 결론 내린 왕건 및 그 외증조부인 발해인 금행(今幸)의 3대손이자, 왕건의 외6촌 형제인 발해(跋海)와 같은 세대이자, 동시대 사람입니다.

김세렴은 또 경순왕의 외손(2대손)”이 아골타라고 했고, 윤명수 선생과 김운회 교수 등은 그 김세렴의 노선을 따르는데, 그 막상 경순왕은 979년에 죽어, 877∼943년간을 66세를 살고, 918∼943년간 고려 태조로 재위한 왕건과는 달리 나이로 치면 왕건에게도 아들 뻘입니다. 경순왕이 왕건보다 4세를 더 살아 70에 죽었더라도 그는 909년에 난 사람이고, 이는 경순왕이 왕건보다 32세 어리므로 왕건의 아들 뻘임이 명확하죠.

그 경순왕은 또 왕건의 맏아들 고려 제 2대왕 혜종과 같은 항렬의 외 8촌 형제인 수가(綏可), 곧 아골타의 4대 선조와 같은 세대인데, 그 수가(綏可)는 발해인 금행(今幸)의 4대손입니다. 아골타로 따지면 4대조 세대와 같은 세대입니다.

또 학자들 사이와 KBS등은 경순왕의 한 아들 마의태자”가 여진으로 들어간 금시조 함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함보는 아골타의 7대조로 마의태자보다도 4대 더 높은 선조와 같은 세대의 인물입니다. 왕건의 아들은커녕 손자 나이밖에 안 되는 경순왕의 아들 마의 태자가 어찌 왕건의 3대 선조뻘의 금행이 되겠습니까? 이제 박선생님의 생각이 옳은지 그런지, 전박사의 생각이 왜 옳은지, 다른 학자들이 왜 틀렸는지 명확해지나요? 제가 전 박사의 인터뷰 1에 장원주 선생님의 댓글로 써둔 것도 한 번 보시지요. 그 사서들은 모두 여진과 청나라는 주몽과 발해-말갈의 후손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주몽의 후손”이 과연 신라 김씨”가 될 수 있나요?
今幸 ßa 작제건 父(발해시대, ?∼*819년?
函普 ßa 작제건 (발해시대, ?∼*849년?)
烏魯 ßa 용건(고려 세조 왕륭, 王隆, ? ∼ 879년 5월)-후삼국시대
(김행/권행) 跋海 ßa 왕건(고려 태조, 877∼943년, 재위: 918∼943년)
(경순왕 909?∼979년) 綏可 ßa 왕건 맏아들고려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 혜종 아우 안종(安宗, ? ∼996년) 아들
(마의태자) 石魯(고려녀 아내 아들 호실답(胡失答) ßa 현종(顯宗, 992∼1031년 8대왕, 재위: 1009∼1031년)/ 안종(安宗, ? ∼996년) 아들

烏古乃(? - 1074, 재위 1021 8211; 1074년) ßa 문종(文宗, 1019∼1083년, 고려 제11대 왕, 재위1046∼1083년

劾里鉢(1039∼1092년, 오고래 둘째 아들) ßa 숙종(肅宗, 1054∼1105년,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년)

阿骨打(1068∼1123년, 핵리발 둘째 아들) ßa 예종(睿宗, 1079∼1122년.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년)

그러니 이 설을 최초로 책으로 내어 쓴 윤명수씨와, 다음 이를 이은 김운회 교수, 또 그 뒤를 이은 김위현 교수와 KBS는 모두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써서 잘 못된 지식을 전파한 거지요.

2.타타르 모굴 전쟁과 당-발해 전쟁의 동일성의 문제

또 박형숙 선생님은 타타르족과 모골족의 전쟁이 발해-당 전쟁이라는 점은 역시 큰 문제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 전쟁으로 발해는 큰 영토 손실을 봤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사실상 발해는 전쟁에서 진 후에 해동성국이라 불렸단 소리가 된다. 말이 되나?”라고 하셨습니다. 전원철 박사는 이미 박형숙선생님이 문제 제기한 것을 자신의 책에서 그대로 인 것을 잘 설명해두었습니다. 역시 그 2권의 책들을 안 읽어 보시고 여기서 비판하셨군요.

또 박선생님은 당이 이기지도 못하고 신라도 패배해서 물러났는데 어떻게 당이 발해 남부의 땅을 신라에게 주나?”라고 하셨는데, 이 관점은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들이 네이버 등 인테넷에서 발해의 등주 정벌”과 관련하여 그렇게 써둔 것인데, 그것이 왜 틀린 관점인지, 전박사도 그 사이트를 인용하고는 나아가 신.구당서와 여러 사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바로 그 전쟁 후 당나라가 발해의 그 땅을 신라에게 주었다는 기록을 인용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입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이미 입증해 두었습니다. 또 전박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해 제2대왕 대무예 때인 734년의 발해 당나라 전쟁이 끝난 뒤에 해동성국”이라고 불렸다고 한 것에 관해,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때로부터 자그마치 90년 후 발해 제10대왕 선왕이 826년에 선생님이 말한 바로 그 땅, 곧 발해가 잃어버린 발해 남쪽 주군과 흑수말갈 등을 회복한 뒤에야 비로소 해동성국”이라고 불린 사실을 잘 설명해 두었습니다. 즉 발해-당간의 전쟁은 발해의 선공이었고 당이 간신히 막아낸 전쟁으로 그후로 해동성국으로 불릴 정도의 성공작이었는데”라고 박형숙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박사의 책을 읽어 보지도 않고, 한국학중앙연구소 교수들의 설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신 것일 뿐입니다. 또 전박사의 책 1권에는 박선생님이 이를 다른 사서에 나오는 타타르 - 모골 전쟁으로 오해하는 것은 문제가 큰 것이다”하신 것에 관해 답을 주는 그 이유에 관해서도 제1권에서 여러 고대사서를 동원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박사의 2권의 책들을 잘 읽어보시고 과거의 잘 못된 학설과 새로운 옳은 학설을 잘 읽어 보신 후 이런 글을 올리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3. 모골의 고려 침공에 관해

오현진 선생님께서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왜 하는지... 징키스칸이 발해인인데 왜 고려를 침공했누?”라고 했는데, 신라는 왜 고구려, 백제, 발해를 침공했죠? 또 북한은 왜 형제민족인 남한을 침공했지요? 답을 주실래요?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혈통인데 왜 성노예로 여성들을 끌고 가 무참히 죽였는고?”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김운회 교수가 자기 책에서 일본과 한민족은 형제”라고 하신 것을 말하시는 것이고, 전박사의 글과는 관계 없는 것이 아닌가요?

또 오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면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의 선조를 기준으로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일쎄.”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일본이나 중국이 다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므로 그들이 우리 남북한을 식민 통치해도 좋다는 말씀인가요? 그럼 우리가 한국사”공부를 왜 하지요? 성경만 읽으면 되잖아요?

4. 발해와 신라, 38선의 문제

이주형 선생님께서는 발해의 후손이건 아니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38선 밑에서 지뢰 피해도 보복도 못하는 약한 국가가 되어 있다는 현재가 중요한 게다. 이런 기사는 자긍심은커녕 자괴감만 안겨주는 황당 논리일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전박사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고조선이 망한지 210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남북으로 갈려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우리가 다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고 있습니다. 또 강력한 나라와 민족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되돌아 보고 새로운 미래의 비젼을 보자고 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5. 중국”의 동북공정 주장을 인정하여 신라”를 내세우자는 것에 관해

장원주 선생님께서는 중국에 가서 중국인들하고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다 보면 발해 고구려 등 백제 부여 여진 말갈 몽골 원나라 거란 등 전부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이다 그러나 오직 신라만이 한국의 전통적 역사에 합당한 나라 라고 인정하고 있다 지금 전선생의 주장은 발해 즉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일 뿐이다 이 역사적 기록을 찾지 못한다면 중국측에서는 지금 전선생이 주장하는 모든 것이 다 중국의 역사일 뿐이다 ....먼저 발해나 고구려등 이 모든중국측이 주장하는 소수민족 국가 가 전부 한국의 역사 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받을수 인는 기록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도 문제처럼 일본넘들이 자기들 것이라고 우겨대면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중국인들도 우겨대면 큰 혼란만 올뿐이다 그러므로 금나라 이후는 신라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셨네요.

그러면 장원주 선생님의 이 말은 첫째는 한강 이북의 땅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땅이므로 다시 내어 주어라고 하는 식의 동북공정” 논리를 우리 남북한이 다 받아들이자고 하시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신데, 둘째는 뿐만 아니라 우리도 거짓 역사 공정을 통해 거짓 역사 지어내기 프로젝트인 동북공정과 같은 이야기를 하자는 이야기로 들리네요.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요? 왜 동북아역사 재단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 또는 국사편찬 위원회가 필요하지요? 중국동북공정 접수연구원이라도 만들어 중국애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낫지 않나요?

또 혹시 제가 전박사 인터뷰 제1부에 장현주 선생님의 댓글에 대한 제 댓글을 읽어 보셨는지요? 또 그에 대한 장선생님의 의견을 좀 적어 주실 수는 있나요?

같은 글을 보고도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여하튼 박선생님, 오선생님, 이선생님, 장선생님 모두에게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안소연  ( 2015-08-19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1
김행(권행)은 고창대첩(안동대첩) 906년경에 활동했으며, 신라가 폐망한것은 926년경 김함보가 연변지역으로 이주한것은 946년경입니다..906년경 김행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이고 그의 자식들의 나이는 대략 20 후반일것입니다..왜냐하면 김함보가 연변으로 이주했을때 나이가 60대 노인이었다고 합니다..그리고, 태조왕건이 김행에게 아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태조왕건의 나이가 김행보다는 적었다는 것이죠..아마 고창대첩때의 나이가 30대 후반일것으로 보입니다..
박형숙  ( 2015-08-19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7
여진은 사실상 우리와 같은 민족이고 몽골도 마찬가지. 어리석은 소중화사상과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오랑캐라고 잘못아는 선비 돌궐 오환 흉노등도 전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우리의 형제 민족이다. 여기까지는 모든 재야사학자들과 일부 강단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전원철씨의 주장은 너무나 책들과 그의 해석에만 경도되어있다. 물론 그가 옳을 수도 있지만 가령 황금 항아리 - 금관 - 금한 - 알타이 칸 이런 해석은 틀릴 수도 있다. 또 김행이 대씨이자 왕씨라니... 이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논문이 더 바람직한 형태이지만 책을 내더라도 사학자들의 감수를 받았어야 옳다.
      답글보이기  박형숙  ( 2015-08-19 )  찬성 : 2 반대 : 6
금나라 시조가 김씨가 아닌 고구려 발해 후손이라고 하는 점도 문제가 많지만 타타르족과 모골족의 전쟁이 발해-당 전쟁이라는 점은 역시 큰 문제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 전쟁으로 발해는 큰 영토 손실을 봤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사실상 발해는 전쟁에서 진 후에 해동성국이라 불렸단 소리가 된다. 말이 되나? 그리고 당이 그렇게 크게 이겼다면 그들의 거들먹거리는 국수주의 사서들이 왜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발해 무왕이 왜 무왕으로 불렸겠는가? 바로 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당이 이기지도 못하고 신라도 패배해서 물러났는데 어떻게 당이 발해 남부의 땅을 신라에게 주나? 그리고 패강이 압록강이란 주장은 이미 식민사학등의 잘못된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발해-당간의 전쟁은 발해의 선공이었고 당이 간신히 막아낸 전쟁으로 그후로 해동성국으로 불릴 정도의 성공작이었는데 이를 다른 사서에 나오는 타타르 - 모골 전쟁으로 오해하는 것은 문제가 큰 것이다. 왜 발해-당 전쟁으로 부르지 않고 타타르와 모골 전쟁으로 불렀는지도 설명할 길이없다. 이런 사실로 보아 전원철씨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많은 연구를 했지만 과학적 분석과는 차이가 나고 역사적 사실과도 거리가 멀다.
      답글보이기  박형숙  ( 2015-08-19 )  찬성 : 1 반대 : 5
필요에 따라 때로는 지나(라고 불러야한다는 주장엔 공감)의 역사책을 갖다쓰고 또는 다른 나라의 역사책을 인용하고 또는 말과 글로만 예상하여 주장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연구 방법이라고 본다. 오직 이들이 교차로 검증될 때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한계가 이상한 주장으로 이어진게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이라도 사학자들과 교류하여 어디까지만 주장할 것인지 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게 전원철씨가 해야할 일일 것이다.
      답글보이기  박형숙  ( 2015-08-19 )  찬성 : 2 반대 : 6
얼마전 심백강 선생의 인터뷰는 굉장히 내용도 좋고 옳을 가능성이 큰 또 그래서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정리되지 않은 주장을 조선일보에서 4회나 (사실상 원 기사까지 5회) 긴 글로 내보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주형  ( 2015-08-17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10
발해의 후손이건 아니건이 중요한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38선 밑에서 지뢰 피해도 보복도 못하는 약한 국가가 되어 있다는 현재가 중요한게다. 이런 기사는 자긍심은 커녕 자괴감만 안겨주는 황당 논리일뿐이다
김주현  ( 2015-08-16 )  답글보이기 찬성 : 7 반대 : 17
국내 대표적 주류 언론사에서 이런 쓰레기 같은 걸 인터뷰라고 싣다니...이미 이런 주장은 유사역사학을 반대하는 진영에서 혁파된게 아닌가. 칭기스칸이 우리 민족이랑 아무런 상관없어도 우리 역사는 자랑할만한다. 그리고 이두와 향찰 어쩌구 저짜구 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답글보이기  한심이  ( 2015-08-16 )  찬성 : 12 반대 : 3
아니 언제부터 역사학이 어느 진영에서 인정해야 가능한 학문이 되었남? 여기가 무슨 사이비종교 논하는 종교 분야인가? 살다 별 희안한 논리를 다 보는군..
장원주  ( 2015-08-17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18
중국에 가서 중국인들하고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다 보면 발해 고구려 등 백제 부여 여진 말갈 몽골 원나라 거란 등 전부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이다 그러나 오직 신라만이 한국의 전통적 역사에 합당한 나라 라고 인정하고 있다
지금 전선생의 주장은 발해 즉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일 뿐이다 이 역사적 기록을 찾지 못한다면 중국측에서는 지금 전선생이 주장하는 모든것이 다 중국의 역사일뿐이다 ....먼저 발해나 고구려등 이 모든중국측이 주장하는 소수민족 국가 가 전부 한국의 역사 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받을수 인는 기록을 찾아야 할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도 문제처럼 일본넘들이 자기들 것이라고 우겨대면서 인정하지 않는것처럼 중국인들도 우겨대면 큰혼란만 올뿐이다

그러므로 금나라이후는 신라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것입니다
      답글보이기  지나가다  ( 2015-08-16 )  찬성 : 12 반대 : 5
아직도 조공국인가? 왜 우리가 중국에게 인정으루받아야지?
오현진  ( 2015-08-16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16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왜 하는지... 징키스칸이 발해인인데 왜 고려를 침공했누?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혈통인데 왜 성노예로 여성들을 끌고 가 무참히 죽였는고? 그렇게 말하면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의 선조를 기준으로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일쎄. 말도 되지 않는 이런 기사는 폐지해라. 그러니까 조선일보가 욕을 먹는 것이다. 남의 위대한 역사에 반찬하나 올려놓고 우린 같은 민족이야 집에 가서 낮잠이나 자라. 이 더운 날씨에...
      답글보이기  정론  ( 2015-08-16 )  찬성 : 18 반대 : 1
학문은 학문으로 논해야지.. 무슨 이런 황당한...
이원희  ( 2015-08-16 )  답글보이기 찬성 : 4 반대 : 12
한마디로 억지 춘향..요즘 아이디어로 옛 역사를 창조하는 이들이 왜 이렇게 많이들 등장하는지!
이대희  ( 2015-08-16 )  답글보이기 찬성 : 13 반대 : 2
두 권의 책을 구입해서 곧 읽고 학생들에게도 권할 생각입니다. 연구와 발표를
계속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현용수  ( 2015-08-16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14
중국에서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역사유물론이라는 엄격한 원칙이 있습니다. 즉 역사적 사실을 연구함에 있어서 선차적으로 엄격히 사서나 고고학연구에 기초하여 증명되여야 합니다. 증거가 완미하지 못한 역사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고명하게 그럴듯 하게 해석되였다 하여도 결국 전설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연구는 역사유심론에 빠져있습니다. 즉 선차적으로 자기의 의사에 따라 현실의 수요에 기초하여 역사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거죠. 그리하여 중국의 입장에서는 전설에 불과한 것들을 한국에서는 역사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중국과 한국이 역사연구방면에서 자주 충돌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이진우  ( 2015-08-16 )  답글보이기 찬성 : 30 반대 : 7
남의 연구물을 가볍게 비판하지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본인 역시 역사학 비전공자로서 고조선사부터 고려사까지 중국24사를 참고하여 공부하고 연구물도 내모았으나 내가 알기로도 전원철박사는 우리나라 대학 어느 사학과 교수보다도 연구를 많이 한것으로 보인다.정확한 원전을 근거로 하여 해석하는것은 연구자의 책무이다. 이견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옳고 그름은 논문으로 밝히면 된다.그런데 불행한 것은 우리나라 교수,학자중에 한가지 주제로 동서양사를 이처럼 섭렵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것이다.따라서 스스로 역량이 모자라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은 위서와 이단으로 분류하고 매도하기 시작한다.마치 우리나라 교회가 그렇고 좌파우파가 단 한마디 발언으로 편세우고 갈리듯이. 결과적으로 본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중앙아시아사(북방민족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중세사까지 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본인이 내린 결론이다.
장원주  ( 2015-08-17 )  답글보이기 찬성 : 13 반대 : 10
중국 상해, 성도, 시안에 갔었을때 그곳 학생, 대학원생등등 하고 많은 역사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특히 시안은 역사의 고장이라 많은 학생들이 역사에대해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학생들하고는 갖난아기와 대학생수준만큼이나 차이가 날정도로 역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이 중국사람들하고 한국역사와 동북공정 또는 신라 고구려 금나라 청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을 할때 어떤 사실적기록이 있었는지에 대해 중국인들이 관심이 많았는데요
김일제에 대해 서는 한서 (한나라 역사서) 등 금나라에 대해서는 송막기문 (송나라역사서) 등 중국인들이 쓴 역사서를 보여주며 증거를 들이대면서 설명을하면 그들이 수긍을 하면서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흉노의 김일제부터 그 후손들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 건국 그리고 신나라 황족들의 한반도로 이동해서 신라건국 이후에 통일 그후에 신라황족들의 여진땅 이동 그리고 그 후손 아골타의 금나라 건국 이후 16대 후손인 김누르하치의 후금 건국 그리고 청나라 건국등 특히 청나라 황족들이 한국의 신라인들의 후손이라고 설명하자 그 자존심강한 중국인들이 한국의 위대한 역사에 대해 깜짝놀라고 수긍하면서 전혀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기록에 남아있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라든지 단어의 방언이라든지 부르는 말의 변화등 그것에서 우리가 원하는 역사를 찾게 되면 우리나라사람은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를 할수는 있지만 중국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은 그것에 대해서 이해도 할수도 없고 단지 한국인들은 뭐든지 다 한국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중국측역사서나 혹은 다른나라역사서에 기록되어져 있는것이 정말 그들이 사실에 가깝다고 이해할수 있지 우리만이 주장하게 되면 연구수준으로 끝나게 됩니다
금행이 황금항아리 라든지 하는 말의 변화가 진실인양 설명하는것 보다 기록되어져 있는 역사서가 있는지 먼저 그것을 찾아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선생님의 주장은 한낱 설로서 또하나의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뿐 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역사는 우리만이 주장하는것보다 사실적기록에 의해서 중국인이나 외국인들이 그것을 인정하였을때 바로 그것이 진정한 우리의 역사라 생각된다
김우영  ( 2015-08-15 )  답글보이기 찬성 : 9 반대 : 16
여진을 영어로 JURCHAN 이라 하고 이말은 조선에서 왔습니다. 우리와 같은 민족입니다. 몽골도 같은 민족입니다. 고구려는 구리에서 온 말이고 구리국은 아홉 리국=한국 입니다.이렇게 보면 우리 민족 역사는 일만년을 넘어 갑니다. 그 고고학적 흔적이 홍산 하가점 하층에 남아 있습니다. 구리국 (배달국) 시대에는 오늘날 시베리아,파미르,중앙아시아,몽골 지역이 건조하거나 한대 지역이아니었고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였습니다.
shimis  ( 2015-08-15 )  답글보이기 찬성 : 11 반대 : 25
주몽예님의 대단한 연구가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금 세계 만방에 위대하고 원대한 나라로 우뚝 설수 있는 나라로 가는데 기여하고 있다는데 저 맘이 뿌듯해 집니다. 주몽예님 같은 분이야말로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않될 한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연구하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
김민철  ( 2015-08-15 )  답글보이기 찬성 : 16 반대 : 13
그래서 어쩌라고?
김영준  ( 2015-08-15 )  답글보이기 찬성 : 21 반대 : 11
전박사님, 캐나다 몬트리올 교민으로서 아주 감사히 잘 읽었읍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언어학적으로도 그 유래를 깊이있게 잘 연구하셨군요. 좀 읽기에 힘들었지만 4편의 내용을 다시금 잘 정리해서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국운이 융성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듯 합니다.
현용수  ( 2015-08-15 )  답글보이기 찬성 : 29 반대 : 34
못말리는 한국인들의 대국 대민족의 꿈, 그래서 소국 소민족이면서도 국명에는 클《大》자 부쳤는가? 민족의 뿌리를 함부로 움직여 큰 고목을 골라 억지로 이어 놓을수록 현실의 우리가 더욱 비참해 지는것을 왜 모르는가?
      답글보이기  윤형준  ( 2015-08-16 )  찬성 : 9 반대 : 5
Great Britain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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